최근 수정 시각 : 2023-12-11 01:48:09

레롱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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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장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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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없음
시호 와조황제(臥朝皇帝, Ngọa Triều Hoàng Đế, 응오아 찌에우 호앙 데)
존호 개천응운성문무측천숭도대승명광효황제
(開天應運聖文神武則天崇道大勝明光孝皇帝)
레(Lê, 黎/여)
롱 딘(Long Đĩnh, 龍鋌/용정)
생몰기간 986년 ~ 1009년
재위기간 1005년 ~ 1009년

1. 소개2. 생애3.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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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베트남 전 레 왕조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로, 시호는 와조황제(臥朝皇帝)이다. 휘는 롱딘(Long Đĩnh, 龍鋌, 용정). 와조황제라는 시호는 레롱딘이 치질을 앓아 매일 누워서 정사를 돌보았기 때문에 받은 시호이다.[1]

2. 생애

대월사기전서》에서의 첫 등장은 흥통(興統, Hưng Thống, 흥통) 4년인 992년 정월의 기록으로, 아버지 레호안에 의해 개명왕(開明王, Khai Minh Vưong, 카이 민 브엉)으로 책봉되어 당쩌우(Đằng Châu, 藤州, 등주)[2]에 거했다고 한다.

그 후 응천(應天, Ứng Thiên, 응티엔) 11년인 1004년 정월의 기록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아버지 레호안에게 개명대왕(開明大王, Khai Minh Đại Vương, 카이민다이브엉)이란 작호를 더 받았다고 한다. 이 때 롱딘은 아버지 레호안에게 태자 자리를 요구하자, 레호안은 이를 허락했으나, 장자를 세우지 않고 차자를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고, 대신 레호안의 셋째 아들이자 롱딘의 셋째 형인 레롱비엣(Lê Long Việt, 黎龍鉞, 여용월)이 황태자가 되었다.[3] 레호안의 맏아들인 터우(Thâu, 鍮, 유)가 1000년에 요절했어도 롱비엣의 위로 둘째 형인 동성왕(東城王, Dông Thành Vương, 동타인브엉) 응언띡(Ngân Tích, 銀錫, 은석)[4]이 있었는데 어째서 레롱비엣이 태자가 됐는지는 의문. 롱비엣과 롱딘이 동복형제라는 기록으로 보아 응언띡이 이 둘과 달리 적자가 아니라서 태자 자리에서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레호안 사후인 1005년(응천 12년)에는 자신의 동복형이자 태자인 레롱비엣 및 둘째 형인 동성왕 응언띡, 레호안의 아홉째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동생인 중국왕 낀과 제위를 두고 다투다가, 같은 해 10월에 레롱비엣이 분쟁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즉위하자, 레롱비엣의 즉위 3일만에 레롱비엣을 시해하고 제위에 오른다.[5][6] 레롱딘은 즉위 직후 자신의 존호를 개천무응운성문신무칙천숭도대승명광효황제(開天應運聖文神武則天崇道大勝明光孝皇帝, Khai Thiên Ứng Vận Thánh Văn Thấn Vũ Tắc Thiên Sùng Đạo Đại Thắng Minh Quang Hiếu Hoàng Đế, 카이 티엔 응 번 타인 반 떤 부 딱 티엔 숭 다오 다이 탕 민 꽝 히에우 호앙 데)로 정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흥국광성황태후(興國廣聖皇太后, Hưng Quốc Quảng Thánh Hoàng Thái Hậu, 흥 꾸옥 꽝 타인 호앙 타이 허우)로 추존하였다.

한편, 어북왕(禦北王, Ngự Bắc Vương, 응으박브엉) 껀(釿, Cân, 근)[7]이 중국왕과 함께 푸란채(Trại Phù Lan, 扶蘭寨, 부란채)[8]에 근거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레롱딘의 토벌군과 2~3개월을 대치하다가 식량이 부족하고 형세도 좋지 않아 계속 버티기가 힘듦을 깨달은 어북왕이 중국왕을 잡아서 레롱딘에게 바치고 죄를 용서받았다. 레롱딘은 돌아오는 길에 퐁쩌우(Phong Châu, 峯州, 봉주)[9]에 근거하고 있던 자신의 바로 윗형이자 레호안의 넷째 아들인 어만왕(禦蠻王, Ngự Man Vương, 응으만브엉) 딘(Đinh, 訂, 정)도 토벌하여 항복시켰고, 아이쩌우(Ái Châu, 愛州, 애주, 지금의 타인호아성)로 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끄 롱(Cử Long, 莒隆, 거륭)의[10] 반역자들 또한 토벌하였다. 그 뒤로 모든 왕들과 반역자들이 레롱딘에게 복종했다고 한다.

1006년(응천 13년) 정월, 장자(長子) 사(Sạ,乍, 사)를 개봉왕(開封王, Khai Phong Vương, 카이퐁브엉)으로 책봉하고, 양자 티에우리(Thiệu Lý, 紹理, 소리)를 초왕(楚王, Sở Vương, 소브엉)으로 삼아 왼쪽에 두었고, 티에우후언(Thiệu Huân, 紹勳, 소훈)을 한왕(漢王, Hán Vương, 한브엉)으로 삼아 오른쪽에 두었다, 또, 송나라의 제도를 따라 문무신료와 승려·도사의 제도와 조복(朝服)을 고쳤다.

1007년(응천 14년) 봄, 레롱딘이 동생 민쓰엉(Minh Xưởng, 明昶, 명창)과 장서기(掌書記) 호앙타인냐(Hoàng Thành Nhã, 黄成雅, 황성아)를 송나라에 보내 하얀 코뿔소를 주고, 대장경[11] 문서를 요청하였다. 그해 8월에는 북송에 의해 교지군왕(交趾郡王)으로 책봉받았으며[12], 민쓰엉과 호앙타인냐도 작위를 받았다. 9월에는 북송에서 주조한 교지군왕인(交趾郡王印)을 광남전운사(廣南轉運使)를 통해 하사받았다.

1008년, 연호를 경서(景瑞, Cảnh Thụy, 까인투이)로 고치고, 감성황후(感聖皇后, Cảm Thánh Hoàng Hậu, 깜 타인 호앙 허우)의 양자 레옥투옌(Lê Ốc Thuyên, 黎偓佺, 여악전)을 삼원왕(三原王, Tam Nguyên Vương, 땀응우옌브엉)[13]으로 책봉했다.

같은 해에 레롱딘은 도르엉(Đô Lương, 都良, 도량)[14]과 비롱(Vi Long, 渭龍, 위룡)[15] 두 주로 친정하여 만인(蠻人)과 말 수백 필을 노획했다. 이 때 사람을 시켜 몽둥이로 공격하게 하였는데, 만인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고 한다. (윗 문단에도 언급된 레호안의 휘를 범했다는 사건이 이 사건.) 또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호안쩌우(Hoan Châu, 驩州, 환주)[16]와 티엔리에우주(Châu Thiên Liễu, 千柳州, 천류주)[17]를 토벌하며, 사람들을 잡았는데, 곳간을 만들어 사람을 그 안에 들여보내고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1009년(경서 2년), 응오 도독(都督, Đô đốc, 도독)과 끼에우하인히엔(Kiểu Hành Hiến, 矯行獻, 교행헌)이 표를 올려 아이쩌우에 항구를 개척하고 길을 만들고 비석과 돈대[18]를 세우길 건의하자, 조서를 내려 그 주의 군인과 백성들에게 도로를 개척하게 했다. 이 도로는 찌 롱(Chi Long, 支隆, 지륭)[19]에서부터 개척하여 딘선(Đỉnh Sơn, 頂山, 정산)을 넘어 부룽강(sông Vũ Lung, 武瀧江, 무롱강)에 이르렀다.

또, 아이쩌우에 행차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강을 헤엄쳐 건너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잦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만들어 부롱·밧끄(Bạt Cừ, 拔渠, 발거)·동룽(Động Lung, 洞瀧, 동롱)강의 네 곳에 두어 건너서 다니게 하였다.[20][21]

7월, 레롱딘은 호안드엉(Hoan Đường, 驩唐, 환당)[22]·타익하 등의 주로 친정하였는데, 호안 쟝(Hoàn Giang, 環江, 환강)에 이르자, 방알사(防遏使, Phòng át sứ, 퐁 앗 스) 호 투 익(Hồ Thủ Ích, 胡守益, 호수익)을 보내 호안드엉주(Châu Hoàn Đường, 環唐州, 환당주)[23]의 군사 5000여 명을 거느리고 도로(道路)를 보수하여 군사가 다니는 일이 편리해졌다고 한다. 당시 레롱딘은 배도 탔었는데 해구에서 나오자 폭풍우가 일어 배를 돌려 도읍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0월, 레롱딘이 침전에서 붕어했다. 그의 사후 친위전전지휘사(親衛殿前指揮使, thân vệ điện tiền chỉ huy sứ, 떤 베 디엔 띠엔 찌 후이 스) 리꽁우언이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라 리 왕조를 창건하였다.

3. 이야깃거리

帝性好殺, 凡人臨刑, 或用茅纏身燃之, 其人爲火所焦逼近死。或使宋優人廖守心持短刃鈍刀解之, 令不得速死, 其人哀號痛切, 守心戲曰:“不慣受死”, 帝乃大笑。征伐虜獲俘囚, 押赴江岸, 潮退, 令人作水牢, 驅入其中, 潮漲呀呷而死。或使高登木秒, 而伐其樹, 樹倒人堕死, 親觀以爲樂。嘗之寧江, 其江多蛇, 繫人舟倒, 來往中流, 欲令蛇害之。凡牢牲欲供庖者, 先手刀刺之, 後方入胞。管削甘蔗於僧郭昂頭上, 假爲失手, 傷僧頭流血, 仍大笑。或因宴殺猫, 賜諸王食畢, 以猫頭示之, 諸王皆惧, 乃悅。每視朝, 必使詼諧者侍左右, 帝或有言, 則喋喋應聲取笑, 以亂執政之奏事者。又以守宮爲膾, 使詼諧者相爭食。

황제의 천성이 살인을 좋아하여, 범인(凡人)들이 사형에 임하면, 어떤 때에는 를 사용하여 몸을 얽어서 태워버리니, 그 사람이 불에 태워져 죽음에 매우 가까이 닥쳤다. 또, 송나라의 광대 리에우투떰(Liêu Thủ Tâm, 廖守心, 요수심)을 시켜 짧은 날의 무딘 칼을 가지고 분해해서 빨리 죽지 않게 하여, 그 사람이 애처롭게 고통을 부르짖으면, 투떰이 희롱하며 “죽음을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황제가 이에 크게 웃었다.

정벌하여 사로잡아 얻은 포로는 강기슭으로 압송[押赴]하여 썰물이 되면 사람들에게 수뢰(水牢)[24]를 만들게 하고, 그 안에 몰아넣어서 밀물이 차면 입을 벌려 마시게 하여 죽였다. 또, 나무의 꼭대기로 높이 올라가도록 하고, 그 나무를 베어서 나무가 넘어져서 사람이 떨어져 죽게 하였는데, 친히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과거에 닌강(sông Ninh, 寧江, 영강)[25]에 갔을 때, 그 강에 뱀이 많았는데, 사람을 묶어서 배가 뒤집히면 중류를 오가면서 그 사람에게 뱀의 해를 입게 하고자 하였다.

모든 제물용 짐승[牢牲]이 요리사[庖者]에게 베풀어지게 하고자 하며 먼저 손수 칼로 그것을 도축하고, 나중에 부엌으로 들였다. 사탕수수를 승려 꽈익응앙(Quách Ngang, 郭昂, 곽앙)의 머리 위에서 불면서 깎았는데, 실수(失手)를 가장하니, 승려가 다쳐 머리에 피를 흘리면 이로써 크게 웃었다. 또, 연회를 이용하여 고양이를 죽이고, 모든 왕에게 하사하여 전부 먹게 하였는데, 고양이의 머리가 그들에게 보여서 모든 왕이 다 두려워하면, 이에 기뻐하였다. 매번 정사 때는 반드시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에게 좌우에서 시중들게 하고, 황제가 혹시라도 말을 하면 곧 재잘거리는 소리로 대답하여 남의 웃음거리가 되니, 정무를 맡아 아뢰는 일이 혼란스러웠다. 또, 수궁(守宮: 도마뱀붙이)으로 회를 만들어 광대들에게 서로 싸우며 먹게 하였다.
《대월사기전서》레기 와조황제 中
  • 《대월사기전서》에는 그가 잔악한 행위를 즐기는 폭군이었다고 기록하나, 레 롱 딘의 잔악한 행위에 대한 기록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이 기사를 제외한 와조 치세의 나머지 기록을 보면, 와조의 잔악함에 대한 기록은 도르엉주와 비롱주로의 친정 기사가 전부이며, 나머지 기사에서는 잔악한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이 기사의 기년조차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와조의 잔악함에 대한 악명이 송나라에까지 전해진 것(‘至忠纔年二十六, 苛虐不法, 國人不附。찌쭝은 겨우 26살이었는데, 가혹하고 모질며 법도를 지키지 않아 국인들이 따르지 않았다’ 《송사》 〈교지전〉 중)을 보면 그의 성품이 잔악하였음은 사실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리태조와 그를 추대한 사람들이 그를 폄하하기 위해 과장하거나 날조한 사건으로 보인다. 실제로 베트남 역사학계에서도 그렇게 추정한다고. 실제로 이 양반이 단순한 폭군이었으면 베트남 현지 사당에서 이 양반을 모실 리가 없다.
  • 그가 치질로 인해 누워서 정사를 보았다는 기록 또한 문제가 있는데, 치질 환자가 누워 있어야 할 정도의 치질 증상은 내치핵(內痔核)[26]이 손으로 넣어도 항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4단계에 해당하는데, 누워서 정사를 봐야 할 정도로 치질이 심각한 사람이 붕어 3개월 전에도 도로를 만들고 친정을 하는 등 외부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치질이 심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베트남 현지에서도 위 기록의 신빙성이 낮다고 평가하고 있다.
  • 송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재밌는 기록이 있다. 레롱딘의 동생 민쓰엉이 북송에서 돌아와 송나라 여인 띠에우씨(Tiêu thị, 蕭氏, 소씨)를 바치자 레롱딘이 궁녀로 삼았다는 기록이나, 레롱딘이 코뿔소를 북송에 바쳤는데, 북송 측에서 코뿔소가 멀리서 와 성질이 안 좋다는 이유로 돌려 보내려 하였는데, 선물을 거절할 수 없어 레롱딘의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변에 코뿔소를 놔주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 비롱주에서 하얀 망아지를 받았는데, 뒷발에만 있어야 할 며느리발톱이 네 발에 모두 나 있었다는 기이한 기록이 있다.


[1] 하지만 레롱딘이 치질을 앓았다는 기록엔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2] 지금의 흥옌성(Tỉnh Hưng Yên) 낌동현(Huyện Kim Động).[3] 이 때 롱딘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는지, 본인이 제위에 오른 뒤인 경서(景瑞, Cảnh Thụy, 까인투이) 원년인 1008년에 이민족을 정벌하면서 사람을 시켜 몽둥이로 두들겨 고통을 줘서 이민족들이 아버지의 휘를 범하게 했고, 그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는 싸이코같은 기록이 《대월사기전서》에 전해진다.[4] 응언띡은 레호안 사후 태자인 레롱비엣, 자신의 동생이자 레호안의 아홉째 아들인 중국왕(中國王, Trung Quốc Vương, 쭝꾸옥브엉) 낀(Kính, 鏡, 경), 레롱딘과 함께 8개월동안 제위를 두고 다투다가 권력다툼에서 패하자 참파로 달아나다가 꼬라해구(cửa biển Cơ La, 機羅海口, 기라해구: 지금의 하띤성Tỉnh Hà Tĩnh 껌쑤옌현Huyện Cẩm Xuyên에 있는 느엉 반하구Cửa Nhượng Bạn)에서 지금의 하띤성 타익 하현(Huyện Thạch Hà)인 타익하주(châu Thạch Hà, 石河州, 석하주)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5] 이 일에 대해 《대월사기전서》의 저자인 응오시리엔(Ngô Sĩ Liên, 吳仕連, 오사련)은 롱딘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중종이 동복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이지 않고 그를 용서하였다가 후에 롱딘이 도적을 시켜 담을 넘어 궁 안에 들어가 중종을 살해하였다는 야사까지 인용해 레롱비엣의 냉철하지 못한 성격을 비판하였다. 《대월사기전서》의 전신 격 역사서인 《대월사기(大越史記, Đại Việt sử ký, 다이비엣스끼)》의 저자 레반흐우(Lê Văn Hưu, 黎文休, 여문휴)가 레호안의 태자 책봉이 어설프게 이뤄졌음을 비판한 것과는 상반된 평.[6] 1년 후인 1006년 송나라의 능책(凌策)이 이 분쟁을 명분으로 베트남 침공을 건의했으나, 당시 송나라의 황제였던 진종이 레호안이 충실하게 북송을 섬겼는데 그의 죽음을 위로하지 않고 오히려 벌을 내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하여 거절하였다.[7] 레호안의 여섯째 아들, 레롱딘에겐 바로 바로 아랫동생이다.[8] 지금의 흥옌성(Tỉnh Hưng Yên) 미하오현(Huyện Mỹ Hào). 어북왕 껀의 근거지였으며, 레호안 사후 왕자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당시 도읍이었던 호아르(Hoa Lư, 華閭, 화려)가 혼란스럽자 국인들이 피난한 곳이기도 하다.[9] 지금의 푸토성(Tỉnh Phú Thọ) 푸토시사(Thị xã Phú Thọ).[10] 지금의 타인호아성(Tỉnh Thanh Hóa) 껌투이현(huyện Cẩm Thủy)의 므엉족 거주지역.[11] 석가모니가 일생 동안 설법한 경전과 계율 및 그 내용들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첨부한 논서, 주석서, 이론서들을 집대성한 불교경전의 총서(叢書). 고려팔만대장경을 떠올리면 된다.[12] 찌쭝이라는 또다른 이름도 이 때 북송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13] 이원왕(二原王. Nhị Nguyên Vương, 니응우옌브엉)이라고도 한다.[14] 위치 미상.[15] 뚜옌꽝성(Tỉnh Tuyên Quang) 찌엠호아현(Huyện Chiêm Hóa).[16] 지금의 응에 안성(Tỉnh Nghệ An)과 하 띤성(Tỉnh Hà Tĩnh).[17] 위치 미상.[18] 홍수때 침수 방지나 군사용 목적 등으로 터를 쌓아 주변 지대보다 높고 평평하게 만든 소규모의 대지.[19] 지금의 타인호아성 찌응아현(Huyện Chi Nga)과 응아선현(Huyện Nga Sơn) 사이에 있던 관문의 이름.[20] 이 때 레롱딘이 사람을 시켜서 그 강에서 놀면서 헤엄치게 하는 것을 세 번 반복했는데, 해를 입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21] 원문: 帝幸愛州, 至武瀧江, 其俗相傳游涉此江者多被害, 帝因使人游泳, 凡三反, 無所害。詔造舟置于武瀧拔渠、洞瀧江四處, 以濟人行。[22] 현 응에안성의 남단현(Huyện Nam Đàn), 아인선현(Huyện Anh Sơn), 도르엉현(Huyện Đô Lương) 일대.[23] 위의 호안 드엉(Hoan Đường, 驩唐, 환당)과 같은 곳임.[24] 물을 넣은 감옥.[25] 지금의 하노이시 쯔엉 미현(Huyện Chương Mỹ)에 있는 강이다.[26] 항문관 위쪽의 정맥이 부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