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28 08:14:14

레뮈로 190

레뮈로 190 (ANF Les Mureaux 190)

1. 전간기의 군용기 시장2. 경량 전투기 사상3. 레이서를 만들던 업체4. 전용 엔진5. 시험 비행6. 프랑스 항복

1. 전간기의 군용기 시장

2차 대전이 터지기 몇 년 전, 전간기의 끄트머리에 이른바 항공 선진국들에서는 수많은 프로토타입 군용기가 연구 개발되어 제작되었지만 그 중 일부만이 채용되어 일선에 배치되었다. 이 기간은 항공기 제작 및 엔진 제작사에게 있어서는 매우 큰 진보를 가져온 때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펴능로는 가장 적합한 개념을 찾고 결정하여 가까운 미래에 가장 알맞은 전투용 항공기를 선택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설계자들이 실제로 생산에 많은 자원과 시간을 들이기 전에 처음 그려낸 스케치에서 수많은 수정과 검토를 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 기체의 설계방향이 옳았는지 밝혀지기까지 당시의 항공기 개발자들의 손에 답은 쥐어져 있지 않았다.

2. 경량 전투기 사상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적절한 준비를 하지 못했던 프랑스 공군이었지만, 이들도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로 군용기 설계의 정반합이 뒤얽히는 역사가 돌고 돌았듯이, 전간기에는 빠르게 전략화에 착수할 수 있는 경전투기에 관한 소요 제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 생산이 간단하고 저렴해야한다.
  • 지상에서의 취급과 관리가 간단해야 하며, 이 원칙은 공중에서도 적용된다.
  • 무장은 임무에 필요한 최소한만 갖추도록 한다.
  • 스포츠 및 경주용 레이서 엔진을 기반으로 개발된 공랭 엔진을 장착해야만 한다.

프랑스 공군의 이와 같은 경전투기 사상은 이탈리아 공군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프랑스 공군사령부와 항공성은 차기 경전투기의 프로토타입 제작에 관한 계약을 1934년에 국내 각 항공사에 제시했다. 대출력 엔진에 중무장한 단발 전투기에 비해 약 절반의 출력을 가진 엔진을 올리고 무장은 기관총 2~4정만 갖춘 경량 전투기는 속도와 상승력 면에서 중전투기에 뒤지지 않을 것이고, 기동의 민첩함은 오히려 앞설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무장의 빈약하고 항속거리가 짧아 이 경전투기들은 아군의 중요 전략지점이나 산업시설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됨이 적절할 것이다. 이와 같은 용병사상은 프랑스 공군을 모델로 삼고 있던 일본 육군항공대에도 영향을 주어 국지전투기라는 요격기를 탄생시켰다.

3. 레이서를 만들던 업체

때마침, 프랑스의 민간항공 산업계에는 이와 같은 용도에 꼭 들어맞는 기체들이 몇 가지 있었다. 20년대부터 크게 유행했던 에어 레이서들은 작고 날렵한 디자인의 기체에 강력한 엔진을 결합시켜 눈부신 스피드를 내는 기체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이 동급 항공기를 이미 개발 생산한 경험이 있는 쿠드롱-르노(Caudron-Renault)를 꼽을 수 있었다. 이 회사는 1939년 대전 초창기의 전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경전투기 C.714를 만들어냈다. 그밖에 다른 회사들도 경량 전투기 개발에 참여하여 블로흐(Bloch MB.700), 르와셀(Roussel R-30) 및 ANF-Mureaux 190과 같은 시제 전투기를 만들어냈다.

1918년에 레뮈로(Les Mureaux)에서 설립된 Les Ateliers des Mureaux는 자체 개발 보다는 주로 면허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1930년에 수상기 메이커인 베송(Besson) 사를 흡수한 이 회사는 레 아틀리에 드 콩스트락숑 두 노르 델라 프랑스 엣 데스 뮈로(Les Ateliers de Constructions du Nord de la France et des Mureaux) 줄여서 ANF-Mureaux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업체는 ANF-Mureaux 113 시리즈로 잘 알려진 복좌 정찰기를 자체 개발하고 생산하면서 공군에 자사 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이 기체들은 정찰기라는 잇점을 안기도 했지만 일선 부대원들에게 괜찮은 평가를 받아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한 후에도 비시 정부에 의해 계속 공군에서 사용되기도 했었다.

레뮈로의 설계주임 앙드레 브루넷(André Brunet)은 1937년에 회사가 국유화되면서 SNCAN(Societe Nationale de Constructions Aeronautiques du Nord)에 통합될 때 함께 개발부에 편입되었다.
1935년 앙드레 기사는 항공성의 장비국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콰드롱-르노 C.714와 경전투기 사업에 참여하기 위한 기체 개발에 팔을 걷어붙였다. 르노의 후보가 목제 구조였던데 비해 앙드레는 전금속제 동체에다 우아한 타원형 날개를 통합시키고 새로운 12기통 삼손(Salmson) 공랭 엔진을 탑재한 경전투기 레뮈로 190을 설계했다. 이륙 출력 450 hp의 한정된 파워를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뽑아내기 위해 앙드레 브루넷은 그때까지만 해도 낯선 첨단 기술이던 금속제 가변피치 프로펠러를 선택했다. 그무렵 프랑스에서 이 신형 프로펠러를 만들어내는 곳은 라티에(Ratier) 단 한군데 뿐이었다.

4. 전용 엔진

레이서 엔진 개발 경험이 있던 삼손 사는 무게가 겨우 300 kg에 지나지 않았으나 최대출력이 450마력에 달해 중량대마력비가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냈다. 이 엔진은 그 무렵 프랑스에서 열리던 최대 규모의 에어 레이싱 대회인 도이치 델라 뫼르테 컵(Coupe Deutsch de la Meurthe : 1909~1936)에 참가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것으로, 레뮈로 190에 탑재하기 위하여 약간의 개조와 튜닝이 더해졌다.

앙드레 브루넷에 의해 설계된 경전투기는 프랑스 항공성으로부터 뮈로 190 C1(Mureaux 190 C1)이라는 분류기호가 주어졌는데, 뒤에 덧붙여진 C는 샤쇠르(chasseur : 전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1은 단발기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ANF 레뮈로는 이 프로토타입에 대한 마무리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1934년 공군에 원형기를 제시했으며 1937년에는 경전투기 프로젝트에 참가한 경쟁 후보들 사이에 자리잡게 된다.

1936년에 아직 제작이 한창이던 레뮈로 190은 파리에서 열린 연례 에어쇼에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한 모양새로 전시되었다. 190 C1의 첫 번째 비행은 업체의 테스트 파일럿 미쉘 데즈호베르(Michel Desjobert)가 조종해서 1936년 7월에 시작되었다. 앙드레는 항력을 줄이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고안한 유선형 카울링과 층류익과 흡사한 얇은 에어포일을 이 전투기에 적용시켰고, 그 디자인은 특허로 등록되었다.

5. 시험 비행

자체 테스트 중에 190의 날개에는 플랩이 설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익면하중으로 인해 저속 영역에서 기동이 둔해지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하지만 중속과 고속에서 레뮈로 190의 전반적인 기동성은 아주 좋았다. 그런데 막상 정성들여 튜닝한 엔진에서 각종 문제가 터져나왔다. 기계적인 신뢰성은 좋지 못했고, 특히 냉각 효율이 떨어지는 뒷쪽 실린더가 과열되는 증상이 제일 문제였다. 그 결과, 레뮈로 190은 조금 날리다가 수리와 점검을 위해 본사로 돌려졌다가 다시 비행에 나서는 일을 반복했는데, 그 덕분에 비행장 보다 공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원형기가 테스트하는 동안 설치되지 않았지만, 이 전투기에는 각 날개에 이스파노-수이자 20mm 기관포 1문과 7.7mm MAC 34 기관총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말썽많던 삼손 12 엔진의 대체 수단으로 750 hp의 고출력 신형 엔진의 탑재 방안도 연구되고 있엇지만, 이것은 공군이 정해준 규격을 위반하는 행위인 관계로 최후의 수단으로 미루어 뒀다.

그렇지만 삼손 12 엔진의 문제점은 끝내 해결되지 않아, 결국 750마력 엔진으로 동력계를 교채하는 재설계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게 중심이 변하는 탓에 양력 모멘트를 고려한 전반적인 검산이 필수라는 점이 문제였다. 재설계에 맞춰 기체 개량도 해줘야 했으니 이쯤되면 아예 신형기를 만드는 작업과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 레뮈로에 기대를 품고 있던 항공성도 자꾸만 삼천포를 흘러가며 계획이 표류하는 기색이 보이자 흥미를 잃어버렸다. 1939년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 국경을 넘을 때, 레뮈로 190의 개발 작업은 이미 중지된 상태였다.

6. 프랑스 항복

레뮈로 사가 SNCAN에 통합된 후에 190C1의 개발은 연구 목적으로 계속되고는 있었지만, 관할은 포테즈(Potez)로 이관되었다. 여기서 앙드레 기사 곁에는 그를 보조하기 위해 르메트르(Lemaître)와 위베르(Hubert)라는 엔지니어들이 붙여졌고, 개발 명칭도 포테즈(Potez 230)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450마력 엔진을 올린 ANF-레뮈로 191 C1은 미완성작으로 남게 된다.

630마력 액랭 엔진인 이스파노-수이자 12Xcrs을 설치한 시제 전투기 Potez 230 C1은 1940년 3월에 처음 날아올랐지만, 이미 조국 프랑스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 앞에 백기를 들기 직전이었다. 그들의 연구 작업은 프랑스가 항복한 후에도 독일 공군의 감시 하에 계속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앙드레 브루넷이 고안해낸 새로운 에어포일을 가진 날개가 그들의 관심을 끌어모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