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6 13:57:03

레온 포우

레온 포우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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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보스턴 셀틱스 등번호 0번
오리엔 그린
(2005~2006)
레온 포우
(2006~2009)
올리버 라파예트
(2010)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번호 44번
앨런 핸더슨
(2005~2006)
레온 포우
(2009~2011)
루크 하랑고디
(2011~2012)
멤피스 그리즐리스 등번호 7번
그렉 버크너
(2008~2009)
레온 포우
(2011)
제리드 베일리스
(2012~2014)
}}} ||
파일:레온 포우.jpg
레온 포우 주니어
Leon Powe Jr.
출생 1984년 1월 22일 ([age(1984-01-22)]세)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신학교 UC 버클리
신장 203cm (6' 8")
체중 109kg (240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드래프트 2006 NBA 드래프트 2라운드 49순위
덴버 너기츠 지명
소속 팀 보스턴 셀틱스 (2006~2009)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09~2011)
멤피스 그리즐리스 (2011)
아틀레티코스 드 생제르맹 (2012)
등번호 0번 - 보스턴
44번 - 클리블랜드
7번 - 멤피스

1. 개요2. 생애3.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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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농구선수였다.

2. 생애

7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가출하는 일을 겪었지만 벼룩시장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벌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7살 때 화재로 집이 전소되어 가족들과 함께 대피소, 허름한 아파트와 모텔, 폐차 안 등 모든 곳을 옮겨다니며 가난한 노숙자 생활을 했다. 하지만 10살이 되던 해에 물건을 훔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으나 포우를 포함한 동생들 모두 양아들로 주겠다는 사회복지사들의 결정에 따라 헤어진 뒤 불량배들과 마약에 빠지기도 했지만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 마약을 끊고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클랜드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형편이 어려워서 잘 다니지 못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학업에 열중했다. 그런데 2학년으로 올라가자 점점 두각을 나타냈는데 농구부의 주축 선수 중 한 명이 장기결장한 것을 기회로 삼아 에이스급의 활약을 보이며 평균 24득점, 13리바운드의 성적을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아디다스 농구 캠프에도 참가해 명문 대학교와 NBA 스카우트들로부터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반 때 주 토너먼트 결승전을 앞두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슬픔에 굴하지 않고 모교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캘리포니아 주 최우수 선수상 및 올아메리칸 퍼스트팀에 선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맥도날드가 주최한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고등학교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친 덕에 장학금을 받고 UC 버클리로 진학했는데 당시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첫 해 때 15.1득점, 9.5리바운드를 기록해 Pac-10 컨퍼런스 처음으로 리바운드 왕에 발탁되었고 신인왕까지 수상했다. 이듬해에는 무릎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지만 3학년이 돼서야 부상에서 복귀 후 20.5득점, 10.1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컨퍼런스 득점왕 및 리바운드왕을 수상한데 이어 올세컨드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스였는데도 파워 포워드로는 사이즈가 부족했기 때문에 2006년 NBA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49순위로 덴버 너기츠에 지명되다가 미래 2라운드 지명권과 바꾸는 합의에 따라 보스턴 셀틱스로 트레이드되었다.

3. 선수 시절

부상으로 이탈한 센터진들의 백업으로 많은 기회를 얻은 루키 시즌에는 64경기를 뛰어 평균 11.4득점, 4.2득점, 3.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007-08 시즌에는 미네소타에서 이적한 케빈 가넷의 백업으로 출전하면서 정규 시즌 커리어 하이 7.9득점을 달성하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베테랑 포워드인 P.J. 브라운에게 출전기회를 빼앗겨 존재감은 미미했지만 라이벌이기도 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파이널 2차전에서 15분 동안 자유투 13개를 포함해 총 21득점을 기록하면서 팬들에게 각광받았고 마침내 입단 2년만에 우승반지를 손에 넣었다.

3년차를 맞은 포우는 최다 출전기록인 70경기를 뛰었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 시카고 불스전에서 왼쪽 무릎 십자연대가 파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2009년 3월 13일 멤피스 그리즐리스와의 홈 경기에서 부상으로 이탈한 케빈 가넷 대신 선발로 출전해 커리어 하이 30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2연패를 끊어냈다.

보스턴에서 3년간의 동행을 마친 뒤 FA가 된 포우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2년간 180만 달러의 최저연봉으로 계약했다. 그러나 르브론 제임스과의 포지션 경쟁에서 밀려 나갈 기회는 많지 않았던데다 플레이오프에서 또 한번 무릎 십자인대를 다쳐 대부분을 재활로 보내야만 했고, 르브론이 떠난 2년차 때도 여전히 기회는 적었고 결국 2011년 2월 24일 구단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멤피스 그리즐리스로 이적해 16경기를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