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17:30:13

로버트 더들리

<colbgcolor=#D8D6D0><colcolor=#000000> 초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Robert Dudley, 1st Earl of Leicester
파일:Robert Dudley.Earl of Leicester.jpg
이름 로버트 더들리
(Robert Dudley)
출생 1532년 6월 24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사망 1588년 9월 4일 (56세)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주 콘버리
배우자 에이미 롭사트 (1550년 결혼 / 1560년 사망)
레티스 놀리스 (1578년 결혼)
자녀 로버트
아버지 제1대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
어머니 제인 길퍼드
형제 헨리, 토마스, 존, 엠브로즈, 헨리, 길포드[1], 메리, 찰스, 캐서린, 탬퍼런스, 마거릿, 캐서린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초대 레스터 백작.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이다.

2. 생애

노섬벌랜드 공작인 존 더들리의 차남으로 어린 시절부터 엘리자베스 1세와 잘 알고 지냈다. 에드워드 6세의 승하 이후 아버지 존 더들리가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자 이를 도왔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런던탑에 투옥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버지와 형은 처형되었지만 1554년에 석방되었으며, 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에 입대하여 생캉탱에서 승리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에는 노퍽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엘리자베스 1세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지냈다.

1558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가마 관리관에 임명되었다가, 1559년에는 추밀원 고문과 기사에 임명되었으며 여왕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행동했다.
에이미 롭사트(Amy Robsart)의 상상화 에이미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
그러던 중 1560년 첫번째 아내 에이미 롭사트(에이미 더들리)가 사고로 사망하자[2] 이전부터 엘리자베스 1세에게 지속적으로 구애한 전적 때문에,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살해했다는 소문[3]이 퍼지면서 귀족과 평민 가릴 것 없이 평판이 최악으로 떨어졌다.

또한 할아버지, 아버지, 형 등 3대에 걸쳐 반역죄로 참수된 가계로 인한 자신의 가문에 대한 편견도 있었기 때문에, 세간으로부터 지조없는 기회자이자 이기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로버트 더들리는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여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고 하며, 키는 180cm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남이었기 때문에 '집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젊을 때부터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이를 먹은 뒤에도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그 체격을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어이탈리아어에 유창했고, 고전 학문에도 능했으며 예술 분야에 대해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중에서도 수많은 시인, 극작가, 다양한 유파들의 화가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유머 감각도 있었기 때문에 더들리의 친구는 더들리가 누구보다도 엘리자베스 1세의 성격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녀를 즐겁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유머 감각 덕분에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가정교사이자 친구인 캣 애슐리가 로버트 더들리를 탄원했을 때도 엘리자베스 1세는 그를 변호했다.

1564년에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4] 결혼할 것을 제안받으면서, 레스터 백작 겸 덴비 남작에 봉해졌다. 이후에는 셰필드 경의 미망인과의 스캔들로 사교계를 놀라게 했고, 에식스 백작(1541~1576)의 미망인인 레티시 놀리스(1543~1634)와 1578년에 비밀 결혼을 단행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청교도를 자처하여 국내 가톨릭 교도에 대한 탄압을 수행했고,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자 1584년에는 로버트 더들리를 비판하는 《레스터의 공화국》이라는 책까지 출판되었다. 1585년에는 네덜란드군에서 일어난 봉기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공작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이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6,000명의 잉글랜드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에게 매우 거만하게 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반감을 사서 1587년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이르마다)에 대항하기 위해 잉글랜드 함대의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아서 1588년 8월 말에 더비셔의 버스턴에 있는 온천으로 떠났다. 도중에 리딩 근방의 라이코트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는 집에 머물면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스페인과 전쟁을 하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가 우드스톡 부근의 콘베리 파크에서 1588년 9월 4일 새벽 4시에 사망했다.

로버트 더들리의 죽음을 들은 엘리자베스 1세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하며, 더들리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의 겉표지에
로버트 더들리의 마지막 편지
라는 글을 적어넣은 뒤 살아생전 내내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후처 레티스 놀리스(Lettice Knollys)
후처인 레티스 놀리스[5]는 로버트 더들리가 죽은지 1년도 안되서 12살 연하인 크리스토퍼 블런트와 재혼했지만, 크리스토퍼는 1601년 레티스의 장남인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함께 반역 혐의에 연루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당시 기준은 물론 현재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장수한 91세까지 살았고 그만큼 모든 자식들과 손자 및 손녀가 죽는 걸 봐야했지만, 전남편들인 에식스 백작과 로버트 더들리로부터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풍족하게 살았으며 증손들 앞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다.
[1] 제인 그레이의 남편.[2] 1560년 9월 8일 일요일 오전에 집안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 당시 에이미의 나이는 28세였다. 에이미는 이전부터 아버지인 존 롭사트 준남작과 이복동생 아서 롭사트, 사촌오빠 스펜서 롭사트에게까지 남편인 더들리가 자신을 죽이려든다며 독살당할까봐 음식도 개에게 먼저 준 다음에야 먹고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못자겠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렸다. 이에 놀란 존 롭사트와 스펜서 롭사트가 손수 부하들을 데리고 에이미의 곁을 감시하며 지켰지만 그녀가 허무하게 사고사하자 롭사트 일가는 모두 에이미가 로버트 더들리에게 살해당했다고 믿고, 평생 더들리를 증오했으며 특히 에이미의 아버지인 존 롭사트는 지방의 작은 귀족임에도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왕실에까지 딸이 사위에게 살해당했다는 상소문을 올리며 억울함을 읍소했다.[3] 당시 러시아나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큰 화제가 되어, 엘리자베스 1세와 로버트 더들리가 서로 짜고 에이미 더들리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오죽하면 프랑스 대사가 이런 소문으로 비웃음을 듣는다고 하소연하는 편지까지 썼다.[4] 재위 기간 내내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를 위협했던 최고의 정적이자,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자베스 1세의 오촌 조카(고모인 마거릿의 친손녀)이기도 했다.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가 스코틀랜드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연인인 로버트 더들리를 메리 여왕과 결혼시키려 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5] Lettice Knollys(1543년~1634년). 더들리와 결혼하기 전에는 에식스 백작 월터 데버루와 결혼했다가 사별했다. 에식스 백작과의 장남 로버트 데버루는 친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2대 에식스 백작이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도 총애받았지만 후술하는 양아버지 크리스토퍼 블런트와 함께 반역에 휘말려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