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로베르트 발라만 (Robert Ballaman) |
생년월일 | 1926년 6월 21일 |
사망년월일 | 2011년 9월 5일 (향년 85세) |
국적 | 스위스 |
출신지 | 레콩빌리에 |
포지션 | 포워드 |
신체조건 | 176cm | 72kg |
소속팀 | FC 빌비엔 (1944-1950)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50-1963) FC 빈터투어 (1963-1964) |
국가대표 | 50경기 19골 (1948-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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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위스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발라만은 1944년부터 FC 빌비엔에서 뛰었으며 빌비엔은 1946-47 시즌에는 나티오날리가 A 우승, 1947-48 시즌에는 준우승의 성적을 냈다. 그리고 발라만은 1949-50 시즌 나티오날리가 A에서 18골을 넣어 리그 득점 랭킹 3위에 올랐다.1950년, 발라만은 당시 나티오날리가 B 소속이었던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로 이적했고 첫 시즌에 그라스호퍼는 다시 나티오날리가 A로 승격에 성공했다. 나티오날리가 A 복귀 시즌에 그라스호퍼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발라만은 22골로 나티오날리가 A 득점 2위의 성적을 냈다.
발라만은 그라스호퍼에서 13시즌을 보내면서 리그 우승 2회, 스위스컵 우승 2회를 거뒀다. 하지만 발라만의 그라스호퍼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196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서 훈련하다 당한 발목 이중골절로 그는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발라만은 1963년에 FC 빈터투어에서 1년을 보내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1.2. 국가대표
발라만은 1948년 6월 20일,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나티에 데뷔했다.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 룩셈부르크와의 1차전에서 발라만은 골을 넣으며 스위스의 5:2 승리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1950년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발라만의 이름은 없었다.
발라만은 1954년 자국에서 열린 다음 월드컵에는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4경기에서 4골을 넣었다. 오스트리아와의 8강전에서 발라만은 2골을 넣었지만 스위스는 난타전 끝에 5:7로 패했다.
발라만은 1958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도 참가했지만 스위스는 조 꼴찌로 탈락해 스웨덴에 갈 수 없었다. 발라만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1961년 5월에 있었던 스웨덴전이었고 상술했듯 그는 1962년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발목 이중 골절로 1962년 월드컵 참가가 무산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발라만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득점력이 뛰어났던 공격수로 스피드와 양발을 이용한 슈팅 파워로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즉흥적인 플레이를 선호해서 상대 수비수들의 예측을 벗어나곤 했다.4. 뒷이야기
- 발라만은 FC 빌비엔에서 뛰던 선수 초창기 때 빌비엔의 감독 하디 발터(Hardy Walter) 덕분에 양발 사용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발터는 시대를 앞선 인버티드 윙어 전술을 썼고 훈련때 발라만의 주발이었던 오른발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그는 스위스 축구계 최초의 양발잡이 선수로도 평가받는다.
- 발라만이 전성기를 보냈던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시절에 그는 자전거로 훈련장에 출퇴근할 정도로 겸손하고 소탈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경기장에서는 열정적인 플레이를 펼쳐서 그라스호퍼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5. 수상
5.1. 클럽
- 나티오날리가 A 우승 3회: 1946-47(FC 빌비엔), 1951-52, 1955-56(이상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컵 우승 2회: 1951-52, 1955-56(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나티오날리가 A 준우승 3회: 1953-54, 1956-57, 1957-58(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컵 준우승 1회: 1952-53, 1957-58, 1962-63(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나티오날리가 B 우승 1회: 1950-51(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