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04:06:37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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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
Robert-François Damiens

1. 개요2. 고문3. 처형

1. 개요

1715~1757.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람. 아리스 지방 출신으로 과거 군인이었다가 후에 하인으로 일하였고 암살시도 당시에는 직장이 없는 상태였다.

1757년 1월 5일 오후 4시 루이 15세는 베르사유를 떠나 트리아농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는데 마차에 타려는 순간 다미앵이 나타나 칼을 휘둘렀다. 루이 15세는 두꺼운 겨울 옷을 입었기에 가슴에 1cm 정도만 관통당하는 얕은 상처만 입고 생명을 건졌으며, 다미앵은 현장에서 근위병들에게 바로 붙잡혀 파리로 압송되었다.

2.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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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시해하려 한 대역죄인이었고, 당시 루이 15세의 무능과 우유부단함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기에 배후가 있을 거라고 판단하여 이를 캐내기 위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우선 다리를 단단하게 묶은 후 무릎 사이에 쐐기를 박아 강제로 다리를 벌리게 했다. 그리고 물을 18L 정도 강제로 삼키게 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고문을 처형당하기 전 2개월 가까이 당했지만 끝내 암살 배후가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미앵은 왕의 무능, 과도한 세금,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불행에 분개하여 왕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인정했지만 단지 자기 혼자서 맘먹고 그런 행동을 저질렀을 뿐, 다른 자들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고 국왕에게 개인적인 원한 역시 전혀 없다고 하였다.

결국 다미앵의 진술을 사실로 보고 단독 범행으로 분류한 프랑스 고등법원은 1757년 3월 앙리 4세를 살해하고 이를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한 암살자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과 같은 범죄자라는 점을 들어 사형을 선고했다. 사람 자체는 선량했던 루이 15세는 자신이 죽지 않았는데 다미앵의 처형이 지나치게 잔혹하다며 선처를 요구했지만 왕을 살해하려 든 자에게 관용은 없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마지못해 사형 집행을 승인했다.

3.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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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 와 공개적으로 사과를 할 것,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 간 다음, 그 곳에 설치된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에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물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 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프랑스 고등법원의 판결로, 얼마 후 그대로 집행되었다. 그 와중 잘 찢어지지 않아, 몇몇 관중들이 교수형을 요구하자 칼로 사지의 힘줄을 수십차례 끊은 뒤에야 간신히 찢어졌는데, 다만 완전히 찢어지지는 않아 말 그대로 너덜너덜한 상태였다고 한다. 다미앵은 처형되기 전 거세까지 당했고, 술에 취한 기수가 탄 말 네 마리에 의해 사지가 찢어질 당시 군중들은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처형은 샤를 앙리 상송의 숙부인 니콜라 샤를 가브리엘 상송이 주관했으며, 당시 18세였던 샤를 앙리 상송은 그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1]

후에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맨 처음에도 그대로 인용되며, 이 처형은 앙시앵 레짐의 야만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다.

처형 후에 다미앵의 집은 불태워졌고, 가족들[2]은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형제자매들은 강제로 성을 바꾸게 되었다.[3] 그나마 암살 미수범의 가족들에게는 루이 15세에 의해 상당한 연금을 지원받는 자비가 베풀어졌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다미앵의 조카라고 몬 적이 있다.

만화 이노센트에서는 당시 프랑스 국민들 생활고를 상징하는 인물로 나오며, 이 사람의 처형장면이 몇화에 걸쳐서 처절하게 묘사된다 처형이 시작되기 전 루이 15세와 귀족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프랑스 대혁명의 불씨를 제공하는 인물로 표현된다. 사형제 폐지가 자신의 꿈이라는 상송에게 자신의 꿈은 아이들이 빵을 배불리 먹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긴다.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도 이 처형이 언급된다.
[1] 이 처형 후, 니콜라 샤를 가브리엘 상송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사형 집행인 일을 그만두었다.[2] 아버지, 아내, 딸[3] 다만 프랑스 혁명 당시 그의 먼 후손들이 다미앵이라는 성을 썼다고 한 것을 보면 직계 가족들에게만 한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