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라일 Ron Lyle | |
<colbgcolor=#000000><colcolor=#aa9872,#8c7a55> 본명 | 로널드 데이비드 라일 Ronald David Lyle |
출생 | 1941년 2월 12일 |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 | |
사망 | 2011년 11월 26일 (향년 70세) |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권투 전적 | 51전 43승(31KO) 7패(4KO) 1무 |
신장/리치 | 192cm / 193cm |
체급 | 헤비급 |
스탠스 | 오서독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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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2. 전적
- 주요 승: 마누엘 라모스, 잭 오핼런, 조지 존슨, 비센테 론돈, 버스터 마티스, 그레고리오 페랄타, 유르겐 블린, 오스카 보나베나, 지미 엘리스, 분 커크먼, 어니 셰이버스, 조 버그너, 스캇 르두
- 무승부: 그레고리오 페랄타
3. 커리어
1941년 2월 12일,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윌리엄 라일, 넬리 라일이 둔 19명의 자녀들 중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라일의 아버지 윌리엄은 목사였고, 제철소에서 일했다. 라일이 아직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덴버로 이사했다.10대 시절 라일은 갱단 싸움에서 21세의 더글러스 버드를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결국 2급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라일은 15~25년형을 선거받고, 콜로라도 주립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라일은 칼에 찔려 7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는데, 이때 수술대에서 두 번이나 사망 선고를 받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혈액 35파인트가 필요했다. 라일은 교도소의 운동 감독이었던 클리프 매택스 중위 덕분에 권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인생을 바꿀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라일은 야구, 농구, 미식축구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던 데다가, 교도소 권투 팀에 들어가 복싱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첫 경기에서 라일은 텍사스 존슨에게 패했으나, 이후 교도소에서 치른 복싱 경기에서 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라일은 7년 6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된 후, 1969년 11월 22일 일요일에 가석방되었다.
수감자의 재활을 위해 일했던 덴버 케이블 텔레비전 임원인 빌 대니얼스는 감옥에서 나온 라일이 Denver Elks Gym에서 본격적으로 권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라일은 프레드 후프를 3라운드에 KO시키며 아마추어 경력 첫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14개월 동안 아마추어 커리어를 이어갔다. 라일은 1970년 내셔널 AAU 헤비급 챔피언, 1970년 북미 아마추어 헤비급 챔피언, 1970년 국제복싱리그 헤비급 챔피언이었으며, 또한 미국 권투 팀에서 싸웠다. 그는 러시아의 이반 알렉시에게 졌지만, ABC 텔레비전의 와이드 월드 오브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러시아의 헤비급 복서 카모 사로얀을 KO시켰다. 라일은 아마추어 전적 25승 4패 17KO를 기록하며 30세의 늦은 나이에 프로로 전향하였다.
빌 데니얼스의 지원 아래 라일은 트레이너 바비 루이스에게 지도를 받았다. 이후 비센테 론돈, 버스터 매티스, 래리 미들턴을 상대로 인상적인 KO승을 기록하며 19승 무패 17KO의 전적을 쌓은 라일은 탑 컨텐더의 자리에 들어섰지만,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제리 쿼리에게 만장일치 판정패를 당하면서 라일의 무패행진은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를 이어가던 라일은 호세 루이스 가르시아, 오스카 보나베나, 어니 셰이버스를 상대로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지미 영에게 패배했으며, 1980년 무패의 게리 쿠니에게 1라운드 KO패를 당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1995년 54세의 나이에 링으로 복귀하여 2류급 복서들을 상대로 4전 연속 KO승을 거두었고, 포먼과의 재경기를 원했다. 하지만 둘의 2차전은 끝내 성사되지 못한 채로 라일은 두 번째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구세군 권투 프로그램을 감독했다.
2011년 11월 26일,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갑작스러운 위장 질환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4. 파이팅 스타일
5. 여담
- 그 당시의 선수들과는 다른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다. 다만 성질이 그렇다기 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빈민가에서 자라면서 갱단에 가입했고, 상대 갱단원을 살해한 이유로 25년 형을 선고받은 것. 실제로 감옥에서 복싱을 배우면서 큰 사고를 일으키지 않아 1969년에 가석방이 되면서 복싱 선수로 데뷔했다.
- 1978년 새해 전날 밤 집에서 전 보좌관을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라일은 그 남자가 총을 겨누고 자신을 강탈하려고 하자, 자기방어를 위해서 몸싸움을 벌인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번에는 무죄 판결을 받으며 철창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 핵주먹으로 유명한 조지 포먼이 자신과 상대했던 선수들 중 가장 펀치력이 세다고 했던 선수가 바로 라일이었다.
1976년 11월 6일, 라일과 지미 영의 2차전에서도 스포츠 캐스터 하워드 코셀과 함께 해설로 참여한 포먼은 라일이 "현 헤비급 최고의 하드펀처들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