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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리븐
날짜: CLE 21년 9월 9일
관찰
리븐이 스스로 짊어진 무게는 리븐 주변을 가라앉게 만드는 듯 싶다. 몇 조각 남은 녹서스의 갑주는 빛이 바랜지 오래며, 이를 통해 리븐이 얼마동안 녹서스에서 스스로를 추방시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부러진 검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하게 크다. 부러진 게 저 정도면 원래는 얼마만큼 컸는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전투의 여파가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녀의 눈빛 속에, 칼을 움켜쥔 그녀의 손에, 그리고 내딛은 한 걸음 한 걸음에서 느껴진다. 그것은 그녀를 놔두지 않는다. 대리석 관문을 통과하는 그 순간에도 리븐은 그 전투를 기억하고 있다.
회고
리븐의 손가락은 그녀의 칼에 새겨진 룬 글자를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오래 전 의미를 상실한, 이유 없는 버릇이었다. 자연스럽게 리븐은 어두운 곳에 있을 때 항상 생각나는 참담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어떠한 칼도 죄책감만큼 날카롭지는 않은 법이다.
자신의 죽음이 그녀 앞에 펼쳐지자 리븐은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마치 그 날의 참상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듯 자욱한 안개가 계곡 바닥을 덮었다.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지만, 그것은 이미 아이오니아의 일부가 된지 오래였다. 죽음은 이제 아이오니아에 영원히 거주하고 있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죽음의 권세가 커져갔다. 그런 광경을 수없이 봐온 리븐은 더이상 그런 것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중대가 그곳을 엄숙하게 행군할 때는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 리븐의 군화 역시 진흙으로 뒤덮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땅을 적시고 있는 게 빗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자 리븐은 순간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을 밀어냈다. 앞으로도 수많은 전장, 안개, 그리고 참상이 있을 것인만큼, 그것을 인지하는 건 모든 게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리븐은 자신의 훈련 교관의 말을 떠올렸다.
"집중은 필수다. 전장은 혼란스럽고 순식간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각자 한 번에 한 가지만을 수행할 수 있음을 명심하도록."
이제 행군할 시간이었다.
분노 중대는 42연대를 따라잡기 위해 며칠 동안 쉴새 없이 행군해왔었는데, 자운 부식부대가 발포한 곳을 지나오는 건 참으로 지저분한 일이었다. 전쟁에는 죽음이 따르는 법이지만, 민간인 희생자의 수는 섬뜩할만큼이나 늘어나고 있었다. 녹서스 고위 사령부는 평화를 사랑하는 아이오니아인들이 녹서스의 대군을 보는 순간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아이오니아의 저항은 강인하고 멈출 줄 몰랐다. 평화를 강조하는 국가 치고는 전쟁에 매우 능한 자들이었다.
리븐은 그것이 나름 인상 깊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그 중에서도 참으로 잔혹한 광경이었다. 쿠르 계곡은 부식부대가 숀-잔 북부 지역으로 가로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다. 아이오니아인들은 그 날 아침에 필사적으로 저항했었지만, 자운의 살상기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었다. 아이오니아의 대패였다. 녹서스 사령부가 예상한 병력의 절반도 긁어모으지 못했던 아이오니아인들은 패퇴했고, 녹서스 군은 부식부대가 지나가기에 앞서 충분히 조치를 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리븐은 그런 역부족인 저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녹서스군 시체가 널부러져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루 정도 뒤쳐진 녹서스 마무리부대가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리븐은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그들의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리븐은 칼을 머리 위로 들어 중대의 진군을 멈췄다. 리븐의 검은 보기만해도 공포를 느끼도록 고안된 녹서스의 진정한 무기였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븐보다 몇 살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녀였고, 앞으로 걸어오면서 그 소녀는 휘청거렸다. 소녀의 옷은 찢겨져 있었고 피투성이였다. 리븐의 중대를 본 소녀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제발, 그만하세요."
소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리븐은 병사 두 명에게 소녀를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은 몇 주 동안 민간인들을 처리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병사를 죽이기 위해 훈련을 받았지, 민간인들을 처리하기 위해 훈련을 받은 게 아니었다. 아이오니아는 정규군조차도 없는 국가였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다'라고 리븐은 스스로 되새겼다.
두 병사는 소녀에게 다가가면서 서로 상대가 선두로 나서기를 바라는 듯 머뭇거렸다. 그것을 보다못한 리븐이 뭐라고 할 무렵, 소녀는 손을 움직였고 그녀의 앞에는 붉은 연무가 나타났다. 두 병사는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죽었다.
"기습이다!"
리븐의 외침은 병사들의 당황한 소리에 묻혔다. 중대 주변에 널부러진 수많은 시체들이 무기를 든 채 일어서 그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들은 시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산 자만이 가진 의지를 보이며 그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리븐은 첩보원의 말을 기억했다: "예상했던 병력의 절반도 안 되는 숫자가......" 함정이었다.아이오니아 놈들은 이것을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이었다.
이미 중대의 후방은 함몰 직전이었다. 리븐은 중대에게 수비 태세를 갖추라고 크게 외쳤다. 사령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리븐은 허리춤에서 신호탄을 꺼내 어두워지는 하늘로 그것을 쏘아올렸다. 희미한 녹색 빛이 계곡 전체를 밝혔다.
아이오니아인 한 명이 리븐을 향해 몸을 날렸다. 리븐은 한 칼에 그 상대를 두동강내버렸다. 아이오니아 놈들이 작전을 훌륭하게 짠 건 맞았지만, 리븐은 항복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정당한 승리였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니까.
남아있는 녹서스 군사들은 서로 등을 맞대며 진형을 좁혔다. 중대의 절반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아이오니아 병사들은 이제 슬슬 녹서스 병사들의 절망을 즐기는 듯 공격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그들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포위당해 있었다. 리븐의 병사들은 이미 피곤하고 사기가 꺾인 상태였다. 반대로 아이오니아 병사들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리븐은 그들이 도대체 얼마동안 동료들의 시체 사이에 누워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끝을 보겠다고 결심한 리븐은 칼을 굳게 쥐었다.
그 때, 리븐의 앞에 눈부신 빛이 폭발했고, 아이오니아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라갔다. 포격이 어디서 온 건지를 알기 위해 몸을 돌린 리븐은 그 순간 또다른 포탄이 녹서스 진형 언저리에 명중하는 것을 봤다. 귀가 멍해진 리븐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녹서스와 아이오니아 병사들은 모두 혼란에 빠져있었다. 일부는 싸웠고, 일부는 도망쳤고, 일부는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순간, 리븐은 깨달았다. 자운의 부식부대가 포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다'라고 리븐은 되새겼지만, 그것은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 누구도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생각대로라면 아이오니아 군대가 이 전투의 승자였지만, 그들 역시 처참하게 죽어갈 뿐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녹서스의 가르침과 부합한단 말인가?
그 저주받은 계곡에서 도망가던 리븐의 주변에는 연이어 포탄이 작렬했다. 양측 병사들은 참으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 사건은 그녀를 바꿔놓았다. 그녀를 전장으로 앞장서게 했던 의지가 사라져있었고, 그 의지를 상실한 리븐은 길을 잃은 셈이었다.
기억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미 그 기억을 수천 번 되살아본 리븐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날, 왜 그렇게 상황이 전개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녹서스가 스스로의 군대가 아닌, 자운의 끔찍한 기계공학에 의존했던 것인가? 자신이 왜 그 기습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도, 자신이 왜 그곳에서 살아남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리븐?"
리븐의 등 뒤에서는 흐느끼던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목소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야, 뭔가 맞지 않아......" 리븐은 말하기 시작했지만, 계곡 전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술수를 부리고 있었다.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리븐?"
"무슨 말을--"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리븐?" 이번에는 상당히 짜증난 목소리였다.
"모르겠어!" 리븐이 내뱉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을 뒤져봤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나쁜 일이었다. 이미 몇 년 동안 그 기억을 가진 채 살아온 리븐이었지만, 그 기억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도 없었고,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다. 리븐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난 한 때 무언가를 위해 싸웠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어."
자신의 목소리로 그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난 여전히 녹서스를 사랑해. 하지만 이제......난 내 방식대로 싸우고 싶어."
"속 마음이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리븐은 그 질문을 곱씹었다. 그동안 리븐은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기를, 누군가가 함께 이 기억의 무게를 짊어지기를 바랬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공유하는 것, 자신의 눈으로 그 기억을 되살아보는 것은 그 무게를 줄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였고,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리븐은 깨달았다.
"드러나든 말든, 변하는 건 없어."
소녀가 사라졌고, 다음 순간 리븐은 전쟁기관소에 홀로 있었다. 부러진 그녀의 검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상당히 공격적인 절차였지만, 그를 통해 리븐은 거의 잊을 뻔했던 자신의 검의 무게를 느꼈다. 마치 그 자각에 응하듯, 리븐의 부러진 검에서 녹색 검기가 나타나 부러지기 전의 검의 형태를 따라 흘렀다. 리븐은 자신감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길을 되찾은 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