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1:34:21

마로치아

파일:마로치아.jpg
Marozia
생몰년도 892년 ~ 미상
출생지 이탈리아 왕국 교황령 로마
사망지 산탄젤로 성
칭호 로마 원로원 의원, 파트리키아

1. 개요2. 행적3. 평가

[clearfix]

1. 개요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귀족 여성. 914년부터 932년까지 교황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4명의 교황을 좌지우지한 여인. 교황청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창부정치'의 대명사로, 여교황 요한나의 모티브로 지목되기도 한다.

2. 행적

892년 로마에서 투스쿨룸 백작이자 베스타라리우스(Vestararius: 교황의 재정과 옷장 관리를 담당하는 최고 관원)이며,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군사령관)이고 로마 원로원 의원이기도 한 테오필락트와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인 테오도라의 딸로 출생했다. 그녀에게는 적어도 4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남자 형제 테오필락토스, 세르기아누스, 보니파초는 어렸을 때 사망했고, 테오도라 2세는 교황의 재무관을 맡은 요하네스 크레센티우스와 결혼하여 수도사 크레센티우스를 낳았다.[1]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의 저서 <안타포도세(Antapodose)>에 따르면, 15살 때인 907년 교황 세르지오 3세와 "사악한 간음(nefarium adulterium)"을 하여 요한이라는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나중에 교황 요한 11세가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연대기 저자들은 리우트프란트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탈리아 공교육 장관 피에트로 페델(Pietro Fedele, 1873 ~ 1943)과 역사가 파울 브레찌(Paolo Brezzi, 1910 ~ 1988)를 포함한 일부는 마로치아를 깎아내리기 위한 비방이라고 봤다. 한편 일부 기록에 따르면, 요한은 알베리크와 마로치아의 정상적인 관계를 통해 태어났다고 한다.

909년, 스폴레토 공작이자 카메리노 변경백인 알베리크와 결혼했다. 그녀는 알베리크와의 사이에서 훗날 로마의 통치자가 될 알베리크[2], 네피 주교 세르지오, 교황 베네딕토 7세의 아버지인 다비드 또는 테오다투스를 낳았다. 한편 마로치아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자신의 애인이자 라벤나 대주교인 요한 10세를 교황으로 앉히기 위해 노력했고, 요한 10세는 그 덕분에 914년 교황 란도가 사망한 후 선출 과정도 거치지 않고 교황에 선임되었다. 요한 10세는 교황이 된 뒤 이탈리아에 전초 기지를 세우고 약탈을 일삼던 사라센을 물리치기 위해 알베리크 및 이탈리아의 여러 군주의 힘을 빌려 사라센을 몰아냈다.

그 후 알베리크는 917년 장인인 테오필락트의 지원에 힘입어 로마인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들을 숙청하다가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고, 결국 922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테오필락트는 924년경에 사망했고, 알베리크 역시 오르테에서 마자르 용병을 고용해 로마를 탈환하려 했다가 925년에 마음이 바뀐 마자르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동안 자신의 어머니 테오도라와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요한 10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테오필락트와 알베리크의 사망으로 요한 10세의 후원자가 끊긴 틈을 타 토스카나 변경백 귀도와 결혼한 뒤 그의 지원을 얻어 요한 10세를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요한 10세의 형제이자 주요 고문이었던 피에트로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형을 설득해 924년경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오르테 호숫가에 거점을 마련한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926년 로마로 귀환해 귀도와 마로치아를 일시적으로 제압하고 권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928년 토스카나 변경백 귀도가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라테라노 궁전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귀도가 이리 나올 줄 예상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붙잡힌 뒤 형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절단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요한 10세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몇 달 만에 옥사했다. 리우프란트에 따르면, 그는 마로치아에 의해 입에 쿠션이 씌워진 채 숨막혀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원로원 의원(senatrix Romanorum)이자 파트리키아(patricia: 고귀한 인간) 칭호를 획득했으며, 교황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했다. 요한 10세 사후 수산나의 사제급 추기경이었던 레오 6세를 애인으로 삼고 교황에 선출했다가 6개월 만에 자신 몰래 다른 여인과 만나는 것을 알게 되자 폐위한 뒤 이듬해 2월에 죽을 때까지 지하감옥에 갇혀 있게 했으며, 그 다음에 세운 스테파노 7세가 성직자들의 불의를 치죄하고 교회를 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거슬리고 자기 아들을 교황으로 세우고 싶었기에 2년만인 931년 2월에 폐위하고 3월 15일 감옥에서 목졸라 죽였다. 이후 마로치아의 아들 요한 11세가 21살의 나이에 새 교황에 등극했다.

이렇듯 내리 세 교황을 죽인 929년 남편 귀도가 사망한 뒤 적절한 남편을 물색하다가 아를 백작이었다가 이탈리아 국왕이 된 위그와 결혼하기로 했다. 위그는 그녀와 결혼하면 로마와 토스카나를 손아귀에 쥘 수 있을 거라 여기고 곧장 로마로 향했고[3], 산탄젤로 성에서 마로치아와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첫번째 남편인 알베리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알베리크는 자신이 어머니와 계부의 정치적 책략의 희생자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리우프란트에 따르면, 알베리크는 어머니의 부탁에 따라 의붓아버지인 위그 왕의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부었다. 그런데 위그는 물을 적당히 조심스럽게 따르지 않았다고 질책하며 알베리크의 뺨을 쳤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는 로마인들을 불러놓고 아래와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로마시의 위엄은 한없는 어리석음으로 추락하여 이제 매춘부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소. 로마라는 도시가 한 여자의 불결함으로 멸망하고 한때 로마인의 노예였던 부르고뉴인이 로마인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천박한 일이 어디 있겠소? 그가 내 얼굴, 즉 자기 의붓아들의 얼굴을 사정없이 갈기는데, 하물며 당신들에게 무슨 짓을 할 거라 생각하시오?"

이에 로마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산탄젤로 성을 공격했다. 위그는 밧줄로 성벽을 타고 내려가 탈출했지만, 마로치아와 요한 11세는 체포되었다. 알베리크는 로마의 통치자가 되었고, 어머니와 의붓형제를 산탄젤로 성에 계속 투옥하게 했다. 요한 11세는 935년 12월에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마로치아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는 936년경에 사망했다고 하고, 또다른 기록에는 945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사후 비아 라티나에 있는 성 키리아코와 니콜라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진다.

3. 평가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는 마로치아를 "scortum"(창녀) 및 "meretrix"(여주인)이라고 지칭하면서, "여신처럼 아름답고 암캐처럼 불타오른 그녀는 교황의 칸막이에 살았고 결코 라테라노 궁전을 떠나지 않았다"며 교황을 우스갯거리로 만든 간악한 여자라고 비난했다.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 교회의 도덕적 해이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론되었으며, 에드워드 기번은 그녀가 여교황 요한나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중세 이탈리아 전문 여성 역사가 루이지나 파솔리(Luigina Fasoli, 1905 ~ 1992)는 그녀가 단순히 음란함과 사치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많은 재능과 정치력,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는 본성에 따라 권력을 좌지우지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 요한 13세도 크레센티우스와 테오도라 2세 부부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2] 알베리크 '2세'로도 칭해지나, 스폴레토 공작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3] 사실 위그의 어머니 베르타는 두번째 결혼 때 마로치아의 전 남편이었던 귀도를 낳았기 때문에 이 결혼은 교회법상 성립하기 어려웠지만, 위그는 어머니가 두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녀들의 존재를 지우면서까지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