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6 12:53:44

마르셀 프티오


<colbgcolor=#000><colcolor=#fff> 마르셀 프티오
Marcel Petiot
파일:asdasdsafd.jpg
본명 마르셀 앙드레 앙리 펠릭스 프티오
Marcel André Henri Félix Petiot
출생 1897년 1월 17일
사망 1946년 5월 25일

1. 개요2. 상세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연쇄살인범.


2. 상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시절 활동한 연쇄살인범. 의사 행세를 하며 프랑스 국내 유대인들을 해외로 탈출시켜주겠다는 거짓으로 속이고 살해했다. 일생동안 약 60-200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실제 발견된 희생자 수는 23명이 전부다. 희생자 중에는 유대인, 레지스탕스, 일반 범죄자 등 다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인행각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환자들에게 친절함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살인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파리 의과대학에서 해부학 실험을 하다 살인을 하면 무슨 기분일지 궁금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거짓으로 나치에 쫓기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아르헨티나, 남미 등으로 나갈 수 있는 루트를 본인이 가지고 있다며 접근하였다. 그가 제시한 가격은 1인당 25,000프랑이었다. 그는 희생자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Dr. Eugène”이라는 가짜 코드네임을 사용하였고 본인을 레지스탕스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그후 탈출할 국가에서 질병때문에 예방접종을 한 사람만 입국이 가능하다고 속인 뒤 병원에 초대하여 예방접종을 가장한 치사량의 맹독을 주입했다고 한다.

더욱 잔인한 건 방음처리가 되어있는 자신이 살인을 위해서 설계한 진료실 옆 밀실로 이동해 옮긴뒤 유대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수 있게 구멍을 뚫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희열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후에 희생자의 짐을 뒤져 값이 나가는 귀중품을 갈취하고 나머지 것들과 희생자의 시신은 소각로에 불을 태워 증거를 없앴다. 처음에는 센강에 시신을 유기 했으나 그후 토막내거나 불태워서 없앴다고 한다. 이렇게 희생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프랑스를 떠났다고 생각했기에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는 완전범죄에 가까웠다.

1943년 프랑스 의사 소문을 들은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에게 끌려간 프티오는 8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나치들의 고문과 심문에도 자신의 살인 행각을 철저히 숨겼다.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프티오는 1944년 1월에 풀려난다.

그의 범행이 막을 내린 것은 1944년 3월 11년, 이웃들이 그의 집에서 다량의 연기와 악취가 난다고 신고한 후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했고 소방관 한 명이 그의 집 지하에서 석탄 난로와 아직 활활 타오르는 난로 속에서 사람의 뼈 등이 발견되었고, 뒷마당이나 그의 캔버스 가방에서도 발견되었다. 또한 희생자들의 옷가지와 다양한 물건들도 발견되었다. 이 모든 진실이 드러나자 경찰들은 황급히 그를 체포하기 나섰고 당시 프티오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도주한 상태였으나 7개월간의 도피 행각 끝에 파리의 한 기차역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그는 5번의 재판을 치렀는데, 마치 사형을 면할 속셈인 듯이 자신의 살인 방법을 웃으면서 설명한다든가 재판 도중 조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27명중 19명의 살인건을 인정하였지만 희생자들이 독일인이었다던가 나치 부역자였다는 둥 헛소리또한 아끼지 않았다. 물론 법조인들은 모든 정황 증거를 확보한 상태였기에 그의 거짓 변호 따위는 먹히지 않았다.

결국 프티오는 재판에서 25명의 살인혐의로 유죄 판결과 사형을 선고를 받고 라상테 교도소에서 투옥되었다. 이후 1946년 5월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보는 가운데 단두대에 처형됐다.

3. 대중매체

  • 유튜브에서 마르셀 프티오에 관한 주제로 영상들이 세기의 살인마를 비롯해 꽤 많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