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1-20 16:20:21

면천


1. 개요2. 상세
2.1. 군공2.2. 사민2.3. 포도2.4. 납속
3. 면천에 대한 반발과 타협4. 면천 = 실직?

1. 개요

조선 시대노비신분이 격상되어 양인이 되는 것.

통상 노비는 부세와 군역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조선 정부는 재원과 군역 자원 확보(군액 보충)를 위하여 합법적으로 면천을 조선 초기부터 제도화하였다. 속량(贖良), 종량(從良)이라고도 불린다. 면천은 주로 군공, 사민, 포도, 납속 등의 공로를 인정받거나, 특수한 경우에 허용되었다. 초기에는 국가에 공로를 세운 이들에게 부분적으로 시행하였으나 점차 확장되면서 조선후기 신분 구조 자체에 변동을 가져온 요인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의 면천 제도는 주요 법령인 《경국대전》과 《대명률》 등에서 그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경국대전》은 국가의 통치와 사회 질서를 규명하는 법전으로, 면천에 관한 규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법령은 특정 조건 하에 노비가 면천을 받을 수 있도록 명시하였으며, 그 조건은 노비가 봉사한 기간이나 그 공로의 정도에 따라 달라졌다.

면천은 흔히 면천종량(免賤從良) 또는 면천속량(免賤贖良)의 경우처럼 종량이나 속량 등의 용어와 함께 쓰인다. 면천이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므로, 면천종량은 천인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속량의 경우는 속가(贖價)를 내고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속량은 면천의 한 방법일 뿐이다. 조선 전기에는 군공, 사민, 포도, 납속 등의 경우 면천이 가능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군공과 납속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면천의 혜택은 상대적으로 사노비에 비해 공노비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초기부터 그러한 현상은 있었으나 조선후기로 올수록 공노비에게 혜택이 편중되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부담이 적은 방향으로 진행되다 보니 공노비를 면천 대상으로 택하게 된 것이다. 공노비 중 이미 확보한 경제적 기반이 있는 경우 이를 활용하여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대에 각사노비의 면천이 많았고, 그 가운데는 납가(納價)면천도 많았다.

천민이 80세가 넘으면 누리기 힘든 천수를 했다고 하여 양인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전개된 노비 면천의 확대는 신분제를 동요시켰고, 결국 1894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가 폐지되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2. 상세

2.1. 군공

군공 면천(軍功免賤)은 국내외적으로 전란이나 변란을 당하여 국가가 곤경에 처하게 될 때 군사적 공로에 의해서 면천종량을 허락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인 1405년(태종 5)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永爲遵守奴婢決折條目)」을 반포하면서 노비는 일시적인 공로에 의해서 ‘기신방역(其身放役)’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러한 규정은 조선시대 내내 준수되었는데, 일례로 1460년(세조 6) 여진정벌에 대한 공로를 논하면서 천인을 면천하여 주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 노비 역시 모두 면천하여 주었다.

2.2. 사민

사민 면천(徙民政策)은 북변 지역의 국방 내지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천인을 이주시키는 대신, 그 보상으로 면천해주는 방법이다. 사민은 세종 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세종 대 대여진(對女眞) 정책의 일환으로 북변 지역, 특히 함길도의 방어체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민을 실시하면서 노비의 면천을 공인하여 주었다. 사민 면천은 성종 대까지 시행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다.

2.3. 포도

강도(强盜)를 잡은 것에 대한 포상으로 주는 면천이다. 포도 면천은 세종 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대전속록(大典續錄)』의 반포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속대전(續大典)』이 반포되면서 강도를 잡은 천인은 면천되지 못하고, 면포를 시상으로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명화적(明火賊)을 5인 이상 잡은 천인에게는 면천의 특혜를 주었다. 조선후기에도 포도면천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납속을 통한 천인의 양인화가 면천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2.4. 납속

납속 면책(納粟免策)은 국가에 곡식을 헌납하면, 그 반대 급부로 천인의 경우 면천을 허락해주는 정책이었다.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관군의 부족한 무기와 군량을 조달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 때 노비가 그 역할을 하거나, 50섬을 납곡하면 면천방량하도록 했다. 납속은 군수 납속과 진휼 납속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군수 납속은 전란이나 변란시에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휼 납속은 기근시에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납속 면천은 조선 전기에는 널리 시행되지 못하다가 양란을 겪은 17세기부터 널리 시행되었다. 조선전기보다 상대적으로 속가(贖價)도 높지 않고 규정도 까다롭지 않아 납속면천이 현실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조 대에 들어와서는 납속과 함께 납전(納錢)을 통한 면천도 실시되었다. 『속대전(續大典)』에는 공사천의 속량하는 가격을 동전 100냥 이하로 규정했다.

3. 면천에 대한 반발과 타협

면천에 노비 주인들은 대체로 반발했다. 노골적으로 납속을 방해했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왜구 문제로 고민하던 조정은 군공을 세운 노비에게 면천을 제공하겠다고 보증했다. 이에 적잖은 노비 주인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사적 형벌을 가했다. 노비가 주인을 배반했기에 정당한 대응을 했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조정은 대응책을 고민했다. 사헌부는 노비 주인들을 처벌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이처럼 노비 주인들의 피해를 고려한 적도 있으나 대체로는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면천을 시행했다. 그만큼 다급한 경우가 많았다.

면천을 약속한 조정이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도 제법 있다. 노비들의 도움을 받은 뒤에 나 몰라라 한 셈이다. 인조반정 직후가 대표적 예다. 광해군 때 면천된 공노비가 너무 많다면서 이들의 면천을 취소했다. 대신 일정 기간 이들의 의무를 면제해주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양반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외에도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반대로 노비는 많이 있지만 경작시킬 토지는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소작을 주기도 하고 자기 노비를 보내서 경작시키도 했고, 후자는 자기 노비를 다른 사람의 토지에 소작인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주인과 떨어져서 살게되는 외거노비가 생기기 시작한다.(조선 이전부터 있었음)

원래대로라면 노비의 수익은 모두 주인의 것이지만 도로도 교통도 발전하지 못했던 그 옛날, 멀리 떨어져사는 노비를 통제하고 수익을 정확히 측정해서 받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시인이나 관리인을 두기도 했지만 그럼 먹여살려야할 입이 늘어나는 것이고, 관리인을 관리하는 관리인을 두지 않는 이상 그 관리인이 제대로 일을 할지 말지 역시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타협책이 바로 외거노비의 재산권을 일정부분 인정해주는 것이다. 매년 농사가 얼마나 잘될지 예측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깝고, 먼 타지의 외거노비나 그 관리인이 삥땅을 쳐도 제대로 알아내기 힘든 상황이니 그냥 매년 정해진 액수의 금액(당시는 보통 포나 쌀 같은거로)을 내면 나머지는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면 정해진 액수가 빵꾸났을때만 조지면 되니 따로 감시인도 필요없고 매년 수익을 측정할 필요조차 없다.

대신 수익이 높았을 경우 그 잉여 수확물은 주인이 아닌 외거노비가 가지게 되는 것이니 나름 윈윈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4. 면천 = 실직?

노비들은 항상 면천을 열망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

면천은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명예퇴직 같은 것이었다. 물론 부유층 양반가의 얼자(孼子·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생긴 아들)가 면천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들의 경우에는 어차피 생계가 보장돼 있으므로, 면천은 곧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계가 보장되지 않은 일반인들은 달랐다. 이들은 면천되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면천되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재앙이었다.

'노비들은 항상 면천을 희망했다'(A)는 현 시대의 말로 바꾸면 '노동자들은 항상 퇴사를 희망했다'(B)가 될 것이다. B 문장은 우리 시대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A 역시 조선시대 실정에 맞지 않는다. 노비제도의 실태를 검토해보면 이 점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됐다. 이 중에서 공노비(관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됐다. '선발된 노비'라는 뜻인 선상(選上)노비는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하고 비번을 활용해서 영리활동을 했다.

한양의 선상노비는 2교대 근무, 지방의 선상노비는 7교대 근무를 했다. 근무시간 외의 시간을 활용해서 농사를 하건 장사를 하건 그것은 선상노비의 자유였다. 또 선상노비의 일종인 관기가 비번을 활용해서 민간 술집에서 서빙을 보건 자기 농토에서 농사를 짓건, 그건 본인의 자유였다.

납공노비의 상당수는 국유지를 불하받은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수확물의 일부를 지주인 국가나 왕실에 납부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많은 납공노비는 이런 형태로 존재했다.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됐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에 기거하면서 주인의 일을 처리했다. 외거노비는 독립적 주거지에 살면서 주로 주인의 농토를 경작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납부했다. 물론 모든 외거노비가 소작농의 형태를 띤 것은 아니다. 주인에게 농작물 이외의 물건이나 서비스를 납부하는 노비들도 있었다.

위의 네 가지 유형 중에서 면천이 노비에게 확실한 이익을 주는 경우는 선상노비뿐이었다. 선상노비는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면천이 이익을 의미했다. 그래서 면천을 가장 열렬히 희망하는 쪽은 바로 이들이었다.

물론 서리 자격으로 관청에서 무보수로 근무하는 대신에 상관의 묵인 하에 뇌물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 선상노비들은 면천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무식한 노비들이 어떻게 서리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한 서리 중에는 노비가 매우 많았다. 노비 중에 시인이나 서당 훈장도 적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무식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국가 입장에서는 유(有)임금인 양인보다 무임금인 노비를 서리로 기용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유리했다.

선상노비와 달리, 납공노비·솔거노비·외거노비의 경우에는 면천이 이익이 되기보다는 손해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국유지를 불하받아 먹고사는 납공노비의 입장에서 면천은 국유지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했다. 더 좋은 일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면천은 곧 실직이었다. 만약 국가가 특정 지역 납공노비들에게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공약했다면, 그 노비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생계 보장을 요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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