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9 19:39:21

무성 전투

1. 개요2. 배경3. 전투의 전개4. 결말5. 전후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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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투. 조선이 제나라 무성을 얻기 위해 대장군 거를 주장으로 하여 대군을 투입한 전투이다. 조선은 차후의 교두보로써 무성을 선택하였고 이를 통해 하간 지역을 얻게 된다.

2. 배경

기원전 375년, 제후 전섬은 그 이상주의적 성향을 못마땅하게 여긴 전오의 지지자들에 의해 제후 자리를 동생 전오에게 넘겨주게 되고[1] 아이 보는 것을 금지당한 채 유폐된다.

이렇게 전오로 공위가 넘어가자, 원래부터 친조선적인데다 이상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전섬을 기꺼워했던 조선의 신하들부터 제와의 동맹을 유지할 미련을 버렸고, 마침 동맹을 맺고자 한 위나라의 손을 우여곡절 끝에 잡게 된다.

이 동맹의 소식이 열국에 퍼지니, 위나라가 열세에 몰렸다는 것보다 그 동안 2류 국가로 여겨졌던 조선이 위나라와 대등한 위치로 동맹을 맺었다는 것에 주목, 조선의 평가와 인지도가 오르게 되고 그 소식을 들은 제후 전오는 판이 뒤집힌 점 때문에 신하들이 의원을 부르게 할 정도로 잠시 얼어붙었다.

후일 이 동맹을 견제하기 위해 전오의 주도 하에 거짓 침공 정보를 살포, 고거는 당황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에게까지 이를 온전히 기대할 수는 없어 복속도를 높일 수 없었다. 이에 세후 기식은 맞대응을 위해 직접 제 국경지대 방비에 대하여 간자를 풀어 확인하니, 사실 제나라는 이 상황에서도 조선과의 관계를 크게 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과 제북의 힘만으로도 조선을 견제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세후 기식은 역으로 제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군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2년 뒤 주장에 대사마대장군 거, 부장에 조나라 협공전으로 별부사마에서 위장군이 된 악자를 두어 6만 9천의 대군을 무성을 점거하기 위하여 보내게 된다.[2]

3. 전투의 전개

무성은 유사시 평원과 요안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묶인 황하방위 전선의 일각이었고, 진공 당시 무성과 평원은 전시방위태세를 유지중이었다. 그러나 이 세 군데의 장군은 모두 범장이었으며,그 중 최전선인 무성의 병력은 2만 3천에 딱 기본적인 방비만 되어있었다.
무성 성주는 조선의 공격은 상정 내의 일로 여겼다. 그러나 그녀가 이내 마주한 것이 아무리 봐도 무성만 노리기에 3배는 많아 보이는 대군이 되자 황하를 넘어 평원을 노리는 것으로 판단, 평원에 유사시 지침대로의 지원을 막고 대신 역하와 야읍과 긴밀히 연계해 방어태세를 구축하라는 전령을 파견, 모든 것을 걸고 시간을 끌기 위하여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러나 무성은 애초에 요새지역이 아니었기에 성주는 야전으로 이들을 맞상대해야 했고, 너무나도 압도적인 격차로 인해 이 곳까지 조선군이 진주하는데 들인 피로와 물자 이외의 것을 희생시키지 못한 채 병력의 39%가 사상당했다. 이렇게 전투는 좀 과할 정도의 준비를 갖추고 필요한 목표만을 취하려 한 조선의 승리가 되었다.

4. 결말

허나 전쟁과 전투를 패해 본 적이 없는 거조차도 생각지 못한 일이 직후 펼쳐졌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은 무성성주는 주군을 볼 면목이 없어 조선군이 손을 쓸 틈도 없이 자결하고 만 것이다.
성주의 인망은 범인으로써는 드높은 편이었기에 무성은 조선이 취하였으나 민심이 떠나가기 직전까지 몰렸다.
무성 성주의 친척이었던 평원현령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도 약간의 동요 뒤 묵묵히 서신을 받은 대로 2차 방어선을 결집시켰지만, 강 건너에서 고거 또한 건너오면 막을 태세로 주시하자 도저히 넘을 생각을 못하고 그렇게 무성 일대가 조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대규모 동원에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조선의 신료들도 승리하자 더 이상 군말을 붙이진 않았다.
이 전투는 거의 생전에 있어 마지막 전장이었으며, 손자병법을 읽어 전국시대의 전쟁을 깨우친 이래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조선에게 승리만을 안겨준 대사마대장군은 그렇게 후대에게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광을 찬란히 비추며 스스로의 삶을 수놓았다.

5. 전후처리

조선에게 접수된 무성은 즉시 요새화 작업에 돌입하였다. 당연하게도 당장 시급한 민중 위무와 하간 치수 또한 최대한 신속히 이행되었다.
제나라 역시 황하의 경계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장기인 특유의 재정능력을 동원해 추가적인 방어선 구축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되는 일은 굉장히 한참 뒤가 되니, 그것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이 전투 이듬해, 대사마대장군 거는 향년 52세를 일기로 천수를 다하였으니, 그 생전 고씨를 수여한 조선후 기식을 대신해 조선상 문예가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빈 대사마대장군 고거의 자리는 조선의 장수 중 가장 오래 복무했고 직전에 위장군이었던 악자가 올라서게 되었고 빈 위장군에는 우장군 황이 오르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무성에 2차 방어선 구축을 진두지휘하던 진남장군 악조가 후장군으로 승진하였다.


[1] 대외적으로도 건강상의 양위라 발표된다.[2] 메타적으로 대장군 거의 힘과 합쳐져 숙련도가 93에 이르는 작중 시점 상 무지막지한 정병들이었지만, 이 동원 때문에 다른 대소신료들에게 해명하느라 좀 곤욕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