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1 18:16:26

무유의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武攸宜, 생몰년 미상
무주 시기의 외척. 건안왕 자리에 있던 도중 청변도행군대총관으로 영주 반란 진압에 참전했다.

2. 생애

696년 조인사장현우, 마인절을 선봉으로 하였고 연비석과 종회창을 중심으로 한 1차 진압군이 대패하자[1], 이를 진압하기 위해 우무위대장군으로 있었던 그는 청변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고, 진자앙을 그 참모로 하였으며 범죄자들 중에 용력이 뛰어난 자들을 이끌고 난 진압에 참전한다.

그리고 손만영의 군대가 고구수[2], 배현규에게 저지당한 뒤 안동도호부 예하의 장수들에게 승리를 격려하는 서신을 보내나, 안동도호부사인 배현규가 목록에 없었다고 한다.

697년 왕효걸이 동협석곡에서 패사한 뒤[3] 범양에서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 군대에게 격퇴당하고, 유주를 지키게 된다. 이후 해족이 돌궐의 포로가 된 가족의 안위 문제로 손만영을 배반하고 건안왕 무유의가 요구하는 조건인 손만영의 배후를 칠 것을 수락한다.

이후 손만영이 가노에게 죽자 개선하였고 698년에는 무의종과 함께 장안을 지킨다.

천수 원년 회계왕이 되었다. 중종 복위 이후 무삼사가 덕정군왕으로 강봉되고, 임천군왕 무사종은 관국공으로 되었고 우우림대장군이었던 무유의는 식국공이 된 이후 공부상서를 지냈으며, 이 시기에 사망하였다.

3. 기타

  • 이진충의 난 진압 때 진자앙이 무유의의 참모로 종군했는데, <등유주대가>[4]가 지어졌다.



[1] 유관도안무대사로 있었던 무삼사는 이를 듣고 황급히 장안으로 도주했다.[2] 중국 측 자료에서 고구수의 다른 이름은 고덕무라고도 한다.[3] 정확히는 소굉휘가 원군을 보내지 않아 불리한 위치에 있었고 왕효걸은 끝까지 싸우다가 떨어져 죽었음[4] 무유의는 군사적으로 무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자앙이 올린 여러 계책을 일개 서생의 계책이라고 무시했다. 진자앙은 이에 대한 울분으로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