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武攸宜, 생몰년 미상무주 시기의 외척. 건안왕 자리에 있던 도중 청변도행군대총관으로 영주 반란 진압에 참전했다.
2. 생애
696년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을 선봉으로 하였고 연비석과 종회창을 중심으로 한 1차 진압군이 대패하자[1], 이를 진압하기 위해 우무위대장군으로 있었던 그는 청변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고, 진자앙을 그 참모로 하였으며 범죄자들 중에 용력이 뛰어난 자들을 이끌고 난 진압에 참전한다.그리고 손만영의 군대가 고구수[2], 배현규에게 저지당한 뒤 안동도호부 예하의 장수들에게 승리를 격려하는 서신을 보내나, 안동도호부사인 배현규가 목록에 없었다고 한다.
697년 왕효걸이 동협석곡에서 패사한 뒤[3] 범양에서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 군대에게 격퇴당하고, 유주를 지키게 된다. 이후 해족이 돌궐의 포로가 된 가족의 안위 문제로 손만영을 배반하고 건안왕 무유의가 요구하는 조건인 손만영의 배후를 칠 것을 수락한다.
이후 손만영이 가노에게 죽자 개선하였고 698년에는 무의종과 함께 장안을 지킨다.
천수 원년 회계왕이 되었다. 중종 복위 이후 무삼사가 덕정군왕으로 강봉되고, 임천군왕 무사종은 관국공으로 되었고 우우림대장군이었던 무유의는 식국공이 된 이후 공부상서를 지냈으며, 이 시기에 사망하였다.
3. 기타
[1] 유관도안무대사로 있었던 무삼사는 이를 듣고 황급히 장안으로 도주했다.[2] 중국 측 자료에서 고구수의 다른 이름은 고덕무라고도 한다.[3] 정확히는 소굉휘가 원군을 보내지 않아 불리한 위치에 있었고 왕효걸은 끝까지 싸우다가 떨어져 죽었음[4] 무유의는 군사적으로 무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자앙이 올린 여러 계책을 일개 서생의 계책이라고 무시했다. 진자앙은 이에 대한 울분으로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