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e1d32,#e0e0e0><bgcolor=#0e1d32><tablebgcolor=#0e1d32>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2em; color:#fff; max-width:84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or:#000; letter-spacing:-1px"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카롤루스 Charlemagne | |
군사 중심 | 과학 중심 | |
특유 능력 | |
유럽의 아버지 (Father of Europe) | |
특유 안건 | |
황금의 목자 (The Golden Shepherd) | |
1. 개요
카롤루스
카롤루스 대제, 혹은 샤를마뉴는 서기 768년에 프랑크인의 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하고도 통제하기 어려운 민족들을 통치해야 했던 카롤루스 대제는 옛 전통과 새로운 체계를 통합하여, 왕국을 재건하고 유럽 전역에 맹위를 떨치는 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카롤루스는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더불어 타고난 호기심을 바탕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문화적 부흥을 촉진하였으며, 곧 카롤루스의 궁정은 외교관과 지식인이 모이는 허브가 되었습니다.
카롤루스 대제, 혹은 샤를마뉴는 서기 768년에 프랑크인의 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하고도 통제하기 어려운 민족들을 통치해야 했던 카롤루스 대제는 옛 전통과 새로운 체계를 통합하여, 왕국을 재건하고 유럽 전역에 맹위를 떨치는 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카롤루스는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더불어 타고난 호기심을 바탕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문화적 부흥을 촉진하였으며, 곧 카롤루스의 궁정은 외교관과 지식인이 모이는 허브가 되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 역사적 배경 [ 펼치기 · 접기 ]
- > ‘로마의 몰락’이라는 용어는 다소 의뭉스러운 용어입니다. 동쪽의 비잔티움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수 세기 동안 로마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은 결국 더 작은 신생 국가에 의해 그 자리를 위협받게 됩니다. 프랑크족은 게르만 부족으로, 오늘날 우리가 프랑스라고 알고 있는 땅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이미 혼재되어 있는 갈리아 문화에 자신들의 문화를 융화시킨 민족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프랑크족의 왕들은 중세의 토대를 마련하고 현대의 프랑스와 독일을 형성했습니다.
서기 768년, 비교적 안정적인 프랑크 왕국을 물려받은 카롤루스는 왕국을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카롤루스는 동쪽의 이교도 유럽인들을 공격적으로 압박했고,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기마 유목 부족 아바르족의 땅을 포함하여 넓은 바이에른 지역과 독일 북부 및 이탈리아의 일부를 정복했습니다. 스페인에서 카롤루스는 부흥하고 있던 우마이야 칼리파국과도 충돌했습니다. 이 무슬림들은 스페인 지역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고트족과 바스크족으로부터 스페인을 빼앗으려 했지만, 카롤루스는 스페인을 더 큰 제국으로 통합하려 했습니다.
로마는 카롤루스가 주도하는 프랑크 왕국의 확장에 긴장하여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한편, 새로운 교황 레오 3세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로마에서 가족의 앙갚음을 당할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카롤루스의 궁정으로 도망쳐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바로 카롤루스가 레오의 교황 지위를 뒷받침해준다면 레오는 그에게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를 주겠다는 거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직함이 아니었습니다. 비잔티움에서 이미 자신들을 로마의 상속자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갑자기 프랑크 왕국이 새로운 서양 제국이라고 주장하며 나선 것입니다. 게다가 선제적 기독교 왕국이라는 신성한 자리에 도전한 것입니다(이러한 긴장은 후에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의 분립으로 이어집니다). 비잔티움과 프랑크 왕국의 갈등은 성차별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 수 있는데, 당시 비잔티움은 아테네의 이리니라는 여성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카롤루스에게 성유를 붓기 전까지는 로마 황제를 보지 못했다는 레오의 주장은 이리니의 통치권에 대한 공격이었을 수 있습니다. 레오 3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교황은 유럽의 최고 통치자 결정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첫걸음을 떼었으며, 천 년 후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 제국을 장악할 때까지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을 지배하는 지위를 갖게 됩니다.
즉위 당시 카롤루스의 업적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바이킹 시대가 시작되면서 데인족을 상대로 몇 차례 더 전투를 벌였지만, 814년에 사망했습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카롤루스는 유쾌하면서도 맹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롤루스는 영원한 유산을 만들고자 하는 중세 게르만 통치자들의 전통 가운데 종종 자신의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항상 확고한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날조하는 버릇이 있었기에 이 인물의 성격을 재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스페인의 무슬림과 벌인 전쟁을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성전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이 예루살렘에서 아주 먼 것은 아니었지만, 그 주장은 후기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롤루스는 자신이 가톨릭교의 신자라고 언급하면서 자신만이 진정한 기독교 왕이라고 주장했고(당시 세계에서 활동하던 다른 기독교 종파에 대한 모욕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통치 지역에 예루살렘을 포함했지만, 그 당시 그 도시의 아바스조 통치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카롤루스의 신성 로마 제국은 나폴레옹이 도달할 때까지 정치세력이 되었고, 독일 연방과 오스트리아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정의하는 요소가 됩니다. 요약하자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대부분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며, 추후 이 둘은 빈과 베를린 간의 경쟁으로 인해 갈라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