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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사선대형의 왕 Friedrich, Oblique | |
군사 중심 | 과학 중심 | |
특유 능력 | |
베를린 아카데미 (Berlin Academy) | |
특유 안건 | |
전투 준비! (To Arms!) | |
프리드리히, 바로크 Friedrich, Baroque | |
군사 중심 | 문화 중심 | |
특유 능력 | |
호헨프리트베르거 마르쉬 (Hohenfriedberger Marsch) | |
특유 안건 | |
파리시민 감성 (Parisian Sensibilities) | |
1. 개요
프리드리히(사선대형의 왕)
프리드리히 대왕이 군국주의로 노선을 강화하고 있던 프로이센에서 권력을 잡은 것은 언뜻 모순같아 보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전쟁보다는 예술과 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좌에 오르자마자 그는 군사 이론에 대한 날카로운 식견과 정복에 대한 프로이센의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공격적으로 국경을 확장했으며 군사대국으로서 프로이센의 명성을 공고히 다졌습니다. 한편 예술에 대한 애정도 잃지 않았던 그는, 철권통치와 더불어 당대를 주도하는 지식인 후원, 두 정책간의 균형을 잡으며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군국주의로 노선을 강화하고 있던 프로이센에서 권력을 잡은 것은 언뜻 모순같아 보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전쟁보다는 예술과 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좌에 오르자마자 그는 군사 이론에 대한 날카로운 식견과 정복에 대한 프로이센의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공격적으로 국경을 확장했으며 군사대국으로서 프로이센의 명성을 공고히 다졌습니다. 한편 예술에 대한 애정도 잃지 않았던 그는, 철권통치와 더불어 당대를 주도하는 지식인 후원, 두 정책간의 균형을 잡으며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프리드리히(바로크)
군국주의로 노선을 강화하고 있던 프로이센에서 프리드리히 대제가 권력을 잡은 것은 언뜻 모순같아 보입니다. 그는 군사 이론에 관심이 많았고 프로이센의 호전성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프리드리히는 철학에 대한 글을 쓰고 음악을 작곡했으며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일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예술가로서의 면모와 군사 지도자로서 필요한 논리적 엄격함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며 늘 전장을 주시했습니다.
군국주의로 노선을 강화하고 있던 프로이센에서 프리드리히 대제가 권력을 잡은 것은 언뜻 모순같아 보입니다. 그는 군사 이론에 관심이 많았고 프로이센의 호전성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프리드리히는 철학에 대한 글을 쓰고 음악을 작곡했으며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일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예술가로서의 면모와 군사 지도자로서 필요한 논리적 엄격함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며 늘 전장을 주시했습니다.
프로이센의 국력과 군사력을 크게 향상시킨 프리드리히 2세로 문명 4에서 지도자로 등장한 바 있다.
2. 역사적 배경
- 역사적 배경 [ 펼치기 · 접기 ]
- > 독일의 유래는 무엇일까요? 로마인이 게르마니아라고 불렀던 지역은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한계인 라인강 동쪽의 한 지역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면에서 게르만어는 바이에른 방언과 오스트리아어, 독일어 같이 매우 비슷한 언어부터 네덜란드어와 플라망어같이 조금 다른 언어, 그리고 스웨덴어와 덴마크어, 영어 같은 아예 다른 언어까지 포괄하는 느슨한 언어 연합체를 지칭합니다. 하지만 민족 면에서 게르만인들은 종종 분열되었으며, 이러한 사례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두 국가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강력한 가톨릭교 국가였습니다. 반면 프로이센은 북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 외부의 영향(튜턴, 한자, 폴란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 상태를 유지하려면 군사력을 키워야 했습니다.
이러한 권력을 향한 도약의 과정 중 프리드리히 2세가 등장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0년부터 1786년까지 가장 오래 프로이센을 통치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시대는 예술과 문학의 시대이자 프로이센이 군사 면에서 우위에 섰던 시대였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가 사랑한 예술은 당시 군국주의와 충돌했고, 동성애자인 그의 성 정체성은 결혼해서 후계자를 낳으라는 제국의 요구와 충돌했으며, 그의 프랑코필리아, 즉 친 프랑스 성향은 프로이센에 팽배했던 공격적인 반프랑스 민족주의와 충돌했습니다. 요컨대 프리드리히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프로이센의 예술과 군사 양쪽 면을 모두 육성하기도 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비교적 문화를 홀대하고 군사력을 우대하고 검소함과 금주라는 '프로이센의 미덕'(여기서는 '부족한 유머'를 의미)을 장려한 것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독재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이었습니다. 빌헬름의 아내인 조피 도로테아는 그와는 정반대였으며 궁중 생활을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그녀 또한 프리드리히 빌헬름보다 훨씬 친 프랑스적이었으며, 다른 많은 궁전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의 궁중 언어는 프랑스어였고 두 군주 모두 프랑스어에 유창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문법을 틀리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검소함이 승리하면서 다른 프랑스 궁중 관습은 기피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어린 프리드리히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조피 도로테아는 남편이 경멸했던 고급 문화와 궁정 생활에 대한 사랑을 아들에게 심어주고자 노력했습니다. 프리드리히도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사실 그는 독일인이었지만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라틴어와 고급 문화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가혹한 금욕 생활을 강요했습니다.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자, 프리드리히는 마을 건너편 궁전에 숨겨진 도서관을 운영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프리드리히 윌리엄은 아들의 성적 지향성을 걱정했습니다. 청소년기에 들어선 아들의 연애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지만, 윌리엄은 아들의 '여성성'을 가장 걱정했습니다. 냉정하고 군사주의적인 왕이 없으면 새로운 프로이센이 무너질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외교적 무능은 제국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독일 군주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엄격한 프로이센을 경멸하는 오스트리아 군주들의 호감을 사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스 헤르만 폰 카테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카테는 젊은 시절 프리드리히의 10대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분명히 친구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프리드리히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둘은 파리 청년들의 최신 헤어 스타일을 하고 호화로운 드레스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카테와 프리드리히가 프리드리히의 방에서 음악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왕이 위층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카테는 옷장에 숨었으며, 화가 난 왕은 온갖 호화로운 옷을 불 속에 집어 던지고는 프리드리히에게 다시 군복을 입혔습니다.
다음 부분이 나올 때까지는 이 이야기가 희극처럼 들립니다.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행동에 너무나 분개하여 카테와 영국으로 달아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붙잡혔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처벌을 면했지만, 카테는 처형당했고 프리드리히는 억지로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1740년에 사망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왕관이 넘어갔습니다. 새로운 왕의 치하에서 궁전에서는 예술이 만개했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식인에게 초대장이 발송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완전히 공개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개인적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궁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와 아버지의 관계는 더 복잡했습니다. 젊은 왕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후 승인을 원했고 아버지의 공격적인 군사 및 외교 노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1740년 실레지아를 침공하고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군을 물리쳤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불안정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은 갑자기 주요 군사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는 특히 오스트리아의 가장 부유한 지역을 점령한 뒤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프로이센이 부상하자, 유럽의 동맹 체제는 오스트리아/영국 동맹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으로 재편성됐습니다.
전쟁과 전쟁 사이의 간격은 짧았습니다. 7년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가 프로이센/영국과 싸우면서 동맹 체제가 바뀌는 또 다른 혼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도 프리드리히가 작센(색스니)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다시 장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프리드리히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대담했지만, 그 정도가 너무 과했던 것입니다. 점점 줄어드는 그의 군대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는 것이었습니다.
짧게 말하자면 프리드리히는 유능한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외연을 계속 넓혔습니다.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프리드리히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계획을 세워 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압도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보급선과 병참 지원에 대한 예리한 이해력을 보였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본인의 궁전에서 1786년에 사망했습니다.
이 시기는 절대주의 시대였습니다.프리드리히는 본인을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인 지배자인 계몽된 독재자, 철인왕으로 일컬었습니다. 결코 민주주의라 볼 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당시 유럽 지도자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평생 예술,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볼테르 및 다른 저명인사들과 우정을 쌓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예술가와 사상가들의 입지가 점점 불확실해지자, 이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같은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같은 고전 시대 작곡가들과 함께 프로이센 궁정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았습니다. 또한, 프리드리히는 프랑스 건축의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를 부드럽게(또는 압도적으로) 만들려는 계몽주의 양식에 대한 정교화, 특히 후기 바로크 양식(로코코)의 건축 부흥을 후원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유산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부상과 후기 바로크 예술의 번영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뉩니다. 토마스 만과 같은 사람들은 프리드리히를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려는 무자비한 팽창주의자로 보았습니다(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프리드리히가 프랑스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자유롭게 선동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설립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고 비난했습니다(이 역시 사실입니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칼과 펜으로 통치하며 봉건적 과거와 단절된 진정한 근대적 전제정치의 모델격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