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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라이 이드리스 제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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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이드리스 조의 수도 (789 ~ 809년)2.2. 모로코 최대의 순례지
3. 볼거리

1. 개요

아랍어 مولاي إدريس زرهون
베르베르어 ⵎⵓⵍⴰⵢ ⴷⵔⵉⵙ ⵣⵕⵀⵓⵏ
영어 Moulay Idriss Zerhoun

모로코 중북부의 도시. 페스에서 서쪽으로 40km, 메크네스에서 북쪽으로 17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인구 약 1만 2천의 소도시지만, 모로코의 주요 역사 도시 중 하나이자 성지이다. 789년 이드리스 1세에 의해 볼루빌리스 (왈릴리) 유적 동남쪽의 험지에 세워진 요새 도시로, 808년 이드리스 2세가 페스로 천도하기 전까지 이드리스 왕조의 초기 수도로 기능하였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이드리스 1세 영묘는 모로코 최대의 성지 중 하나로, 매년 8월마다 순례객들이 몰려든다. 모로코의 최대 성지로 여겨지는 물라이 이드리스는 20세기 초까지 비무슬림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현재도 이드리스 영묘 (자위야) 자체는 무슬림만이 출입할 수 있다. 시가지는 제르훈 산 기슭의 두 언덕에 형성되어 있고, 남쪽 언덕에 이드리스 영묘가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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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라이 이드리스의 험준한 입지 조건

786년 팍크 전투에서 압바스 왕조에 의해 대량의 알리 가문원들이 살해된 후 하산 이븐 알리의 증손자 이드리스는 이집트를 거쳐 세상의 서쪽 끝으로 여겨지던 마그레브로 피신하였다. 베르베르 대항거 후 모로코에는 중앙 권력이 미치지 못한 채로 카와리지계 베르베르 부족들이 할거 중이었는데, 789년 이드리스는 왈릴리 (볼루빌리스)의 아우라바 부족장 이샤크 빈 무함마드의 지지를 받아 이맘으로 추대되었다. 본래 볼루빌리스 성벽 밖에 거처하던 그는 탁 트인 평원이 방어에 용이하지 않다고 여겨 동남쪽 제르훈 산자락의 와디 라흐마네 협곡 북안으로 도시를 옮기니, 후일 물라이 이드리스 제르훈의 원형이 되었다. 이후 전자는 점차 버려져 유적으로 변하였고, 후자가 왈릴리라 불리게 되었다.

2.1. 이드리스 조의 수도 (789 ~ 809년)

791년 이드리스 1세가 하룬 알 라시드의 자객에 의해 독살된 후 그의 아우라바 출신 아내 랄라 켄자는 유복자 이드리스를 낳았고, 그가 장성할 때까지는 이드리스 1세의 아랍인 해방 노예이자 심복이던 라쉬드가 섭정을 맡았다. 801년 라쉬드마저 압바스 조에 암살당하자 이듬해 11세의 이드리스 2세가 이맘에 등극하였다. 이드리스 2세는 왈릴리에 아랍 이주민들을 유치, 재상과 법관에 아랍인을 임명하며 베르베르 색채를 줄이고 중앙 집권에 나섰다. 이에 이샤크가 아글라브 왕조와 결탁해 이드리스 2세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뒤이어 공신이자 실권자인 이샤크를 처형한 이드리스 2세는 809년, 아우라바 부족의 본거지인 왈릴리를 떠나 부친이 세운 페스 (알-알리야_로 천도하였다.

2.2. 모로코 최대의 순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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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알라위 왕조에 의해 중건된 물라이 이드리스 자위야 (영묘)

마그레브 서부를 장악하며 이드리스 조의 전성기를 일군 이드리스 2세가 사망한 후 왕조는 한세기 간의 쇠락에 접어들었고, 결국 후우마이야 왕조파티마 왕조에 분할되었다. 한편 왈릴리인 지명은 점차 물라이 이드리스로 바뀌었고, 이드리스 2세의 천도 후부터 페스의 위상에 가려졌다. 다만 모로코에 최초로 매장된 샤리프의 영묘라는 인식 덕에 종교적인 성지로 유지되었다. 10세기 페스를 장악한 친파티마 부족인 미크나사는 옛 왕조의 영향을 지우기 위해 이드리스 2세가 페스가 아닌 물라이 이드리스에 매장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1세기 성자 숭배를 배격하는 등 이슬람 원리주의 색채가 강하던 무라비트 왕조는 물라이 이드리스 순례를 억압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칼리파를 칭한 무와히드 왕조 시기에도 이어졌다. 두 베르베르 왕조가 지난 후 14세기 마린 왕조는 (사실 베르베르계지만) 빈약한 정통성의 보완을 위해 아랍 혈통을 강조하였고, 이드리스 1세를 아랍 이주민들의 선조라 여겨 그를 포함한 이드리스 왕가에 대한 숭상을 재개하였다. 그 신호탄은 1318년 이드리스 1세 유해의 '재발견'이었고, 모로코 전역에서 순례 움직임이 일었다. 이후 매년 8월마다 물라이 이드리스에서는 종교 행사인 모우셈이 열리게 되었다. 수세기간 원형을 유지하던 물라이 이드리스 영묘는 (이드리스 1세와 마찬가지로) 하산 이븐 알리의 후예를 자처하던 알라위 왕조 대에 대대적인 재건과 증축을 거치게 되었다.

이드리스 1세를 모로코의 국조로 여기던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기존의 영묘를 허물고, 인근 부지를 매입한 후 영묘를 훨씬 더 큰 크기로 재건하였다. 1719-21년간의 공사 끝에 영묘-모스크 (자위야)에서는 매 금요일마다 알라위 술탄을 언급한 쿠트바가 낭송되었다. 1822년 술탄 물라이 압델라흐만은 모스크를 확장하였고, 19세기 후반 모하메드 4세는 수도 메크네스의 장인 이븐 마클루프에게 영묘에 타일 장식을 더하게 하였다. 모로코 독립 후 무함마드 5세하산 2세는 모스크를 보수, 증축하였다. 모로코 내에서 이슬람 성지로 여겨지는 도시는 프랑스령 모로코가 성립되는 1912년까지 비무슬림 출입이 금지되었고, 2005년까지 비무슬림의 숙박이 금지되어 있었다.

3.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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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도심 (메디나)
    물라이 이드리스 자위야와 인접한 광장 2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내부의 센티시 모스크 (마드라사 이드리시)에는 1939년 핫지를 마친 현지인이 세운 미나렛이 있는데, 모로코에서 유일한 원통형 미나렛이라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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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라이 이드리스 영묘 (자위야)
    9세기 무렵 처음 조성된 후 14세기 증축되었고, 18세기 대대적인 중건을 거쳐 현재는 알라위 건축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자위야는 영묘와 모스크를 합친 종교 복합 단지이다. 매년 여름 순례 기간때마다 인파로 북적인다. 비록 도시 자체는 비무슬림도 출입 가능하지만, 자위야 건물은 무슬림만 출입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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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성문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옛 성문. 1916년 이곳을 통해 위베르 리요테 총독 부부가 도시를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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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니예 수도교
    20세기 초엽 알라위 술탄 압델아지즈가 물라이 이드리스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운 수도교. 로마 수도교 양식으로 세워져 종종 로마 시대 것으로 오인되고는 하나, 명백히 백년 전의 구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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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니예 수도교에서 바라본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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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루빌리스 (왈릴리)
    로마 제국기 마우레타니아의 주요 내륙 도시였고, 이드리스 왕조의 초기 수도였던 유적

[1] 대부분의 이슬람권에서는 이라크에서 유래한 원통형 미나렛이 주류이나 모로코에서는 무라비트 왕조 때부터 사각꼴 미나렛만을 고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