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아 메르세데스 미라벨 레예스(Patria Mercedes Mirabal Reyes), 1924년 2월 27일 ~ 1960년 11월 25일[1]
마리아 아르헨티나 미네르바 미라발 레예스(María Argentina Minerva Mirabal Reyes), 1926년 3월 12일 ~ 1960년 11월 25일
안토니아 마리아 테레사 미라발 레예스(Antonia María Teresa Mirabal Reyes), 1935년 10월 15일 ~ 1960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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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미니카 공화국의 민주운동가 자매인 파트리아 미라발, 미네르바 미라발, 마리아 테레사 미라발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셋 다 라파엘 트루히요의 독재에 항거하다 생을 마감했다.
2. 상세
부유한 지주의 딸들로 태어났다.미네르바는 자신의 친구인 데이시 아리자 (Deisi Ariza)의 아버지가 반정부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반독재 투쟁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언니 파트리아는 미네르바의 활동을 알고 난 후 미네르바에게 동조하게 되었고, 여동생 마리아 테레사도 종교 행사에서 트루히요의 부하들에 의한 학살을 목격하고는 미네르바 편이 되었다.
1949년에 열린 지역 엘리트를 위한 파티에 초대받아 가족과 함께 참석한 미네르바는 트루히요로부터 은밀한 접근을 받았으나, 미네르바는 자기가 타겟인 것을 깨닫고 거절했다. 이후에도 트루히요는 미네르바에게 계속 접근해왔고, 이 때문에 그녀의 부모는 미네르바가 정치에 연루되어 결국 살해당할 것을 우려하여 딸이 소망하던 법대 진학을 한동안 거부해 왔으며, 이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 조국의 착취와 독재로 인해 견뎌온 불의를 견디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6년 후인 1955년에 부모의 마음이 누그러들자 미네르바는 산토도밍고 대학 법대에 진학한 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미네르바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법대를 졸업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트루히요는 자신을 거부한 그녀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여, 결국 그녀는 변호사 면허를 따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반독재 운동에 참여했다가 트루히요의 명령으로 여러 번 체포되는 등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게다가 미라발의 아버지 엔리케 (Enrique Mirabal)가 잡혀가[2] 잔인한 감옥살이를 했고 풀려나자마자 부친은 사망하게 되고 집안의 재산도 거의 모두 잃으며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미네르바의 남편, 마리아 테레사, 파트리아는 1959년 6월 14일에 일어난, 쿠바로 추방된 도미니카인들이 주도한 반트루히요 운동을 추모하는 6월 14일 운동 (일명:1J4)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는데, 회원이 수백 명에 달했던 1J4에서는 파트리아의 10대 자녀를 포함하여 미라발 일가 모두가 트루히요가 죽인 사람에 대한 팜플렛을 배포하는 것과 트루히요를 몰아낼 반란을 위해 사용할 총과 폭탄의 제조를 도왔다. 그룹 내에서 이들 자매는 '나비들 (Las Mariposa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1960년 1월에 트루히요의 부하들은 이들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마리아 테레사와 파트리아를 체포했으며, 미네르바와 마리아 테레사는 1960년 1월 22일부터 2월 7일까지 수감되었고, 동년 5월 18일에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두 자매의 남편도 수감되었다. 물론 이에 대해 미주기구를 위시한 국제적인 항의가 있었고, 이에 트루히요는 자신의 '관대함'을 보여주고자 파트리아의 남편, 미네르바와 마리아 테레사를 동년 8월 9일에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들 자매는 반독재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다른 자매의 남편들은 여전히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거기다 트루히요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으로 국제적인 제재를 당하던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트루히요는 호세 르네 '푸포' 로만 페르난데즈 (Jose Rene 'Pupo' Roman Fernández, 1909~1961) 국방장관에게 미라벨 자매를 '영구적으로 사라지게 할' 계획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미라벨 자매 3명은 1960년 11월 25일에 여전히 교도소에 있는 마리아 테레사와 미네르바의 남편[3]들을 면회하러 갔으나[4] 돌아오는 중에 운전사 루피노 데 라 크루즈 (Rufino de la Cruz)와 함께 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가서 목이 졸린 후 죽을 때까지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고 이들의 시체는 이들이 타고 온 차에 실린 후 요원들에 의해 산길 낭떠러지로 밀어뜨려 사고사인 척 위장되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사고사로 믿는 사람은 당연히 거의 없었으며 이 자매들의 암살은 트루히요가 자행한 다른 만행 대부분보다 도미니카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결국 그녀들이 끝까지 싸운 결과 결국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약 반년 정도밖에 안 지난 1961년 5월 30일에 군수뇌부가 트루히요를 암살한 후 '푸포' 로만 장군은 이 세 자매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닌 트루히요의 오른팔이던 빅터 알리시니오 페나 리베라 (Victor Alicinio Peña Rivera)의 주도 하에 비밀경찰 4명이 자행한 살인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트루히요의 퇴진 후에도 트루히요의 부하였던 호아킨 발라게르가 집권하던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이 사건은 공식적으론 신중하게 다루어졌으나, 발라게르가 1996년에 물러난 후인 1997년에 이 자매는 '국가적 순교자'로 인정되었고 이후 UN은 1999년에 결의안을 통해 미라벨 자매가 살해당한 11월 25일을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로 선언했다.
3. 기타
4자매 중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아 살아남은 유일한 자매 벨기카 아델라 '데데'[5]는 2014년 2월 1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물론 데데 역시 자매들의 사상에 동조하여 열심히 사회운동을 하였다.이후 2007년 10월 2일부터 새로 발행되어 사용되는 도미니카 200페소 지폐에는 그들의 모습이 남아 있으며, 미네르바의 딸은 하원의장을 역임한 데다가 데데의 아들은 아예 부통령에까지 오르는 등 이들 자매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잘 살고 있다.
[1] 결혼해 3명의 자녀를 뒀으며, "우리는 이 부패하고 폭군적인 정권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도록 허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하며, 필요하다면 제 목숨까지도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2] 잡혀간 이유가 황당하게도 집에 트루히요의 초상화가 걸려있지 않아 반정부 인사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3] 마리아 테레사의 남편은 '후안 페데로즈 카밀로', 미네르바의 남편은 '마놀로 타바레스 후스토'이다.[4] 참고로 파트리아의 남편인 '페드로 곤잘레스 루비오스'는 다른 교도소에 수감된 상황이었다.[5] Bélgica Adela 'Dedé' Mirabal Reyes, 1925년 3월 1일 ~ 2014년 2월 1일 4자매 중 둘째로 유일하게 대학에 가지 않고 아버지의 가업을 도왔으며 살해된 자매들의 자식 6명을 돌보면서 이들을 기리는 박물관과 재단을 만들며 죽을 때까지 이들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