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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갑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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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민태자의 약혼녀
민갑완 | 閔甲完
파일:external/www.greatcorea.kr/2012090305137128.jpg
출생 1897년 10월 20일[1]
사망 1968년 2월 19일 (향년 70세)
묘소 부산 실로암 공원 묘원 납골당
본관 여흥 민씨 삼방파
부모 부친 - 민영돈(閔泳敦, 1863 ~ 1919)
모친 - 전주 이씨 (1892 ~ 1911)
형제자매 2남 4녀 중 3녀
배우자 의민태자[2] → 없음

1. 개요2. 생애3. 백년한(百年恨)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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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閔甲完. 1897년 양력 10월 20일(음력 9월 25일)[3][4] ~ 1968년 양력 2월 19일. 의민태자 이은의 전 약혼녀.

2. 생애

명성황후의 일족인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민영돈(閔泳敦)[5]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효령대군파) 이원의(李元儀)의 딸이다. ‘갑완’이라는 이름은 할머니가 환갑을 맞은 해에 태어난 손주라는 의미라고 한다.

민갑완의 할아버지 민석호는 이완용의 외사촌 형이었으며, 민갑완의 언니는 순정효황후의 백부이자 친일파였던 윤덕영의 맏며느리였다. 민갑완이 황태자비로 간택된 데에는 이러한 집안 배경과 인맥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황태자 영친왕의 약혼녀로 간택되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일본은 유학이란 구실을 붙여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1910년 한일 병합이 되면서 영친왕은 일본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후 민갑완은 1917년까지 10년간 영친왕의 귀국과 혼례만을 기다리며 지냈으나, 영친왕이 일본 황족인 마사코 여왕정략결혼하게 되면서 파혼을 당한다.[6]

그리고 민갑완은 3개월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는데,[7] 이때 부친 민영돈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다.[8]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김규식의 후원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한동안 신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일본 영사가 학교에 찾아와 민갑완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압력을 행사하여, 교장은 결국 민갑완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녀는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면서 거절했다.

당시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미국인에게 교육받고 신학문에서도 배우고, 게다가 어찌보면 일제에 대항하기위해 수절을 지키고 있었던 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든 조선의 여인이 그러하듯, 그녀는 마음이 여리고 인내심이 강하고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이후 그녀는 독서뜨개질로 세월을 보냈고, 여러 번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하였다.[9]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였지만, 가난에 시달리며 유복하지 못한 말년을 보냈다.

1963년 영친왕이 박정희 정부의 허가로 귀국하였으나 그는 이미 뇌연화증으로 말도 못 하는 식물인간이 된 상태였고, 그나마도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1968년 2월 19일 민갑완은 후두암으로 향년 70세로 생을 마감했고, 부산천주교 공동 묘지에 묻혔었지만, 현재는 개장하고 화장하여 부산 실로암 공원 묘원 납골당에 동생 민천행 부부 내외와 함께 안치되어있다.

3. 백년한(百年恨)

민갑완이 쓴 회고록 <백년한(百年恨)>은 간택 당시 상황이 적혀 있어 영친왕의 간택 행사에 대한 사료 중 하나로 뽑힌다. 그러나 문제는 어렸을 적 일을 몇십년 뒤에야 회상한 것인데다, <백년한> 자체는 본인이 직접 쓴 게 아니고 그녀의 수기를 몇 년 후 친척이 다시 정리한 거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기록과 비교해 봤을 때 오류가 많다고 한다.

게다가 거짓말을 한 부분도 있다고 한다. <백년한>에는 민갑완이 재간택에 뽑힌 3명의 규수 중 1명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실록에 따르면 재간택 후보에 그녀의 이름은 없다. 그런데도 그녀가 태자비로 최종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이 영친왕을 유학 보내려는 것 때문에 궁지에 몰린 순헌황귀비가 아들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민씨 집안에 약혼 예물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택에서 탈락했는데 약혼자가 된 비정상적인 경우였다는 걸 후대에 숨기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있을지도.[10]

4. 여담

  • 영친왕의 회고록과 이방자의 <세월이여, 왕조여>에서는 이름 대신 거의 '민 규수(閔閨秀)'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방자 여사에 의하면 민갑완은 영친왕을 납치하려는 계획이 세워지고 있는 것을 알고 관계자들에게 "이미 결혼한 영친왕을 모셔오면 이방자 여사는 어찌되는 것이냐. 그녀도 일본에게 결혼을 강요당한 몸인데, 남을 해치고 나의 행복을 잡는 것은 도리가 아니며 같은 여자로서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 영친왕을 모셔오려면 이방자 여사도 같이 데려오라."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는 이를 듣고 민갑완이 황태자비가 되었다면 그 넓은 도량으로 매우 훌륭한 국모가 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고.
  •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던 이헌재의 아버지 이강하의 고종사촌 누나가 된다고 하였다. 즉, 이헌재의 대고모가 민갑완의 어머니이다.

  • 어찌보면 민갑완 그녀에게 시누이가 될 수 있었던 덕혜옹주의 약혼남이자 김을한의 동생 김장한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김장한의 경우는 훗날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어 평범하게 살았다.[11]

[1] 음력 9월 25일.[2] 1907년에 약혼녀로 간택되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일본의 강제로 인해 파혼당하였다.[3] 영친왕도 같은 날 태어났다. 영친왕비 간택 시 처녀 단자 명단을 보면 민갑완의 생년월일이 정유년 9월 25일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민갑완이 태어난 날은 음력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날로부터 2주기 되던 날이라고 착각해서 음력 8월 20일생으로 돌아다니는 자료가 많다. 그러나 시해당한 날로부터 2주기가 되는 해의 명성황후의 생일(음력 9월 25일)에 태어났다.[5] 원래는 감찰공파였으나 삼방파 민석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민석호의 양자로 들어갔다.[6] 다만 민갑완과 마사코는 면식은 없었지만 서로에게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영친왕 납치 시도 사건 당시에도 민갑완은 ’마사코 역시 나처럼 피해자이니 영친왕과 함께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마사코 역시 민갑완의 사정을 알고 동정했다고 한다.[7] 민갑완의 사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에도 포함된) 베일처럼 머리두건을 쓰고 있는 젊은 시절 사진인데, 이 사진이 바로 이때 여행증명서에 사용했던 사진이다.[8] 독살 당했다는 소문도 있다.[9] 민갑완 본인이 영친왕의 약혼녀라는 이유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소리도 있다.[10] 혹은 민갑완은 수기에 사실대로 썼는데, 친척이 숨기려고 거짓으로 쓴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시 민갑완 본인도 어렸기에 자신은 재간택 대상인 줄 알고 있었던(어른들이 쉬쉬하며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것일 수도.[11] 그러나 덕혜옹주와의 파혼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평범하다고도 단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