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03990><colcolor=#FFFFFF> 역사 | 역사 · 3당 합당 | |
전당대회 | 민주자유당/역대 전당대회 | ||
선거 | 1991년 지방선거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제14대 대통령 선거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
비판 및 논란 |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 · 초원복집 사건 | ||
대통령 | 노태우 · 김영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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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여의도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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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국제민주연합 | ||
관련 틀 | 역대 사무총장 · 역대 원내총무 · 역대 정책위원회 의장 ·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 제13대 국회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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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주자유당의 역대 전당대회에 대한 문서.2. 제1차 전당대회
1990년 5월 9일 개최된 민주자유당의 창당대회이다. 이날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 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 당헌을 채택하고 내각제 추진 의사를 포함하는 강령을 채택했다. 우선 최고위원에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이 선출됐고, 이후 김영삼 최고위원의 제청에 따라 노태우를 당 총재로 추대했다. 이후 노태우 총재가 대표최고위원으로 김영삼을 지명했다. 이 같은 민자당의 지도부 구성은 합당 전의 3당 대표들을 고루 안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안배의 원칙은 이후 오랫동안 민자당의 중요 당직과 행정부의 각료 임명에도 적용됐다.3. 제2차 전당대회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로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1992년 5월 19일 개최됐으며 전체 대의원 6,882명의 97%가 참여한 가운데 6,660명이 투표해서 김영삼이 4,418표를 얻었고 이종찬이 2,213표를 얻으면서 김영삼이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1][2] 참고로 이 전당대회는 집권 여당에서 경선 방식으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한 최초의[3] 사례다.4. 제3차 전당대회
김종필 대표위원과 공화계의 탈당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전당대회이다. 1995년 2월 7일 민주자유당은 김영삼 대통령을 총재로 재추대했고, 당의 세계화를 위한 새 강령과 기본정책 그리고 당헌 개정안을 의결하였다. 당헌 개정을 통해 대표위원은 대표로 변경됐고, 신임 당 대표로 김영삼 총재가 지명한 이춘구 국회부의장을 선출했다. 한편 정재철 중앙상무위원회 의장을 전당대회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또한 개편 과정에서 민주자유당은 당 로고와 당가를 바꿨다. 이때 전당대회 수임기관이 중앙상무위원회 운영위원회에서 신설된 전국위원회로 변경됐다.3차 전당대회는 1차 전당대회와 2차 전당대회 사이의 텀처럼 2년의 간격을 가진 정기 전당대회로써 원래는 1994년 5월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김영삼 총재는 2대 대표였던 김종필 지도부의 임기가 늘어나길 바랬고 민주자유당은 1994년 1월 12일 당무회의를 통해 5월로 예정됐던 전당대회를 ‘총재가 지정하는 기일까지’ 연기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다 1994년 12월 말부터 1995년 2월 7일로 결정된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김종필이 차기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둘러싼 계파 갈등으로 인해서 1995년 1월 19일 김종필은 대표직에서 사퇴하고 같은 해 2월 9일에 탈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