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박두을 朴杜乙|Park Du Eul | |
출생 | 1907년 11월 28일 |
대한제국 경상북도 대구군 (現 대구광역시 달성군[1]) | |
사망 | 2000년 1월 3일 (향년 92세)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자택 | |
본관 | 순천 박씨 (順天 朴氏)[2] |
국적 | 대한제국(1907~1910) 일본 제국(1910~1945) 대한민국(1948~2000) |
부모 | 아버지 박기동, 어머니 김씨 |
배우자 | 이병철(1926년 결혼~1987년 사별) |
자녀 | 슬하 3남 4녀[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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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배우자. 박준규의 당고모이자 백남억의 처당고모[4]이기도 하다.2. 생애
아버지 집안이 의령 일대에서는 부자라고 했지만 굳이 비교해보자면 당시 달성에 있었던 외가 쪽이 더 부농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시집이라고 왔더니 집도 좁고 그렇게 가난해 보일수가 없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집안 어른들에 따르면 친가 쪽도 물론 3000석 지기에 가까울 정도의 부를 지닌 집안이었고 서원을 세울 정도의 성리학자셨지만 외가 쪽 지체가 워낙 높아서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였다는 말들이 있었다. 실제 어머니는 시집 올 적에도 몸종을 비롯하여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묻어둔 이야기 中[5]
묻어둔 이야기 中[5]
1907년 11월 28일에 경상북도 대구군(現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박기동(1885 ~ ?)과 김씨(1882 ~ ?)의 4녀로 태어났다.[6]
1926년, 19살때 이병철과 결혼하였다. 이후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이병철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내에 대해 남긴 회고에 따르면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삶을 산 것으로 추측되는데, 자서전에서의 회상은 다음과 같다.
처음 본 인상은 건강한 여성이라는 것이다. 슬하에 3남 5녀를 두고 반세기여를 서로 도우면서 살아왔다. 내자 역시 유교를 숭상하는 가문에서 전통적인 부덕(婦德)을 배우고 성장해서 그런지, 바깥 활동은 되도록 삼가고 집안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예의범절에도 밝아 대소사가 두루 화목하다. 지금까지 몸치장 얼굴치장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처럼 수신제가의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는 내자에게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호암자전 中
호암자전 中
그러나 이런 칭찬이 무색하게도, 결혼 직후에는 이병철의 비행으로 인해 꽤나 속앓이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에 이병철은 대학을 중퇴하고 무위도식하며 술과 노름을 즐겼고, 각기병에 걸려 끙끙 앓고 다니기나 했기 때문이다.
이후 1930년경 이병철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자, 남편이 항상 입고 다녔던 명주로 된 한복을 빨래하고 관리하느라 힘들어했다고 한다.
"소감은 어떠신지요?”
“축하야 뭐 회장님이 받으셔야지. 내야 뭐라고 하노.”
“그래도 60년을 함께 산 부부로 지금 느끼는 심정이야 각별한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거사 그렇지만 지난 세월 돌이켜봐도 지금은 마 담담하요.”
“평소에 회장님 생신뿐 아니라 아들 딸 며느님 생일까지 일일이 기억하시고 선물을 마련해주신다던데요.”
“허이, 우째서 그런 말까지 밖에 났는가. 내사 본시 며누리라고 꼭 시어머이 노릇보다 출가한 딸처럼 생각하고 선물이라고 해야 별것 없어요. 그저 평소에 생활비 같은 걸 아껴 모아놓았다가 주거나 그걸로 조그만 선물 사서 나누어주는 것이지. 또 가을에 햇곡식이나 과일들이 들어오면 모두 불러 나누어주고. 그나저나 반갑습니다. 그렇게 섰지 말고 마 앉아요.”
“댁에서 회장님 식사는 손수 해드리십니까. 아니면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직접 봐드렸제. 지금은 딸들하고 며느리들이 더 잘하니까. 나는 회장님 좋아하는 음식을 일러주고 소홀하지 않게끔 당부하고는 하지.”
“주로 즐겨 드시는 음식 종류가 뭔지 궁금한데요.”
“특별히 가리시는 음식은 없어요. 워낙에 젊었을 때부터 별 가리는 음식 없이 다 잘 드셨으니까. 요즘은 조반에는 흰죽 콩죽 잣죽에다 김, 콩 절인 것, 생선구이같이 가벼운 걸로 드시고 출근하시지.”
1986년 2월 12일, 호암 77세 희수 기념 및 자서전 출간 축하행사 中
“축하야 뭐 회장님이 받으셔야지. 내야 뭐라고 하노.”
“그래도 60년을 함께 산 부부로 지금 느끼는 심정이야 각별한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거사 그렇지만 지난 세월 돌이켜봐도 지금은 마 담담하요.”
“평소에 회장님 생신뿐 아니라 아들 딸 며느님 생일까지 일일이 기억하시고 선물을 마련해주신다던데요.”
“허이, 우째서 그런 말까지 밖에 났는가. 내사 본시 며누리라고 꼭 시어머이 노릇보다 출가한 딸처럼 생각하고 선물이라고 해야 별것 없어요. 그저 평소에 생활비 같은 걸 아껴 모아놓았다가 주거나 그걸로 조그만 선물 사서 나누어주는 것이지. 또 가을에 햇곡식이나 과일들이 들어오면 모두 불러 나누어주고. 그나저나 반갑습니다. 그렇게 섰지 말고 마 앉아요.”
“댁에서 회장님 식사는 손수 해드리십니까. 아니면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직접 봐드렸제. 지금은 딸들하고 며느리들이 더 잘하니까. 나는 회장님 좋아하는 음식을 일러주고 소홀하지 않게끔 당부하고는 하지.”
“주로 즐겨 드시는 음식 종류가 뭔지 궁금한데요.”
“특별히 가리시는 음식은 없어요. 워낙에 젊었을 때부터 별 가리는 음식 없이 다 잘 드셨으니까. 요즘은 조반에는 흰죽 콩죽 잣죽에다 김, 콩 절인 것, 생선구이같이 가벼운 걸로 드시고 출근하시지.”
1986년 2월 12일, 호암 77세 희수 기념 및 자서전 출간 축하행사 中
1986년 2월 12일, 호암 이병철의 자서전 출간 행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때의 인터뷰는 위와 같다.
상기된 이맹희의 회고대로 원래는 박두을 집안이 이병철 집안보다 부자였다고 한다. 이병철이 대구에서 삼성상회로 재기를 할 때 박두을 집안의 네트워크 덕분에 사과 과수원 조성과 고품질 사과 매입에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큰 며느리인 손복남 여사와 친밀한 사이로 2000년 1월 사망할 때까지 큰 며느리의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자택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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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빈면에 순천 박씨 집성촌이 있다.[2] 충정공파(忠正公派) 18세손 노(魯)○ 항렬이나 항렬을 따르지 않았다.(족보)[3] 남편이 사실혼 관계였던 여자와 낳은 4녀 이덕희(1939년생)와 첩 사이에서 낳은 4남 이태휘(1947년생), 5녀 이혜자(1952년생)가 있다.[4] 백남억은 박두을의 큰당조카딸인 박갑규(朴甲圭, 1922. 5. 25 ~ 1990. 9. 25)와 결혼했다.출처: 《순천박씨족보》 박갑규편.[5] 사망하기 7년 전인 1993년에는 장남 이맹희가 책에서 어머니에 대해서 비사를 더 풀었는데, 이에 따르면 박두을의 집안도 결혼 당시 이병철에 결코 꿇리지 않는 부농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6]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기도 했다. 단종복위운동 당시 박팽년의 가족이 처형될때 유일하게 생존했던 박팽년의 손자 박비에서 대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