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병철(朴炳喆) |
이명 | 박유산(朴有山) |
본관 | 음성 박씨 |
생몰 | 1901년 10월 14일 ~ 1946년 1월 21일 |
출생지 |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1] |
사망지 | 충청북도 음성군 |
매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212실 107호 |
추서 | 대통령표창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병철은 1901년 10월 14일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말 민병철(閔丙哲)·박영록·박제성 등과 함께 음성군 대소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거사일을 4월 2일로 정했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함께 거사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포섭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4월 2일 밤 면사무소에 운집한 군중은 1천여 명에 달했다.이들은 미리 준비해 간 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 면장과 면직원이 시위의 해산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두 차례에 걸쳐 면사무소의 유리창과 의자들을 부수고 기구, 장부 등을 파손시키면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또한 시위를 탄압하는 일경에 대하여 육탄전을 벌여 일경에 중상을 입혔으며, 면사무소를 불지른 다음 뒷산에 올라 밤이 새도록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진천의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박병철은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10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와 벌금 20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음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6년 1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병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2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212실 107호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