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횡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묵
| 성명 | 박영묵(朴永默) |
| 이명 | 박치희(朴致會), 박성묵(朴性默) |
| 본관 | 밀양 박씨 |
| 생몰 | 1845년 8월 10일 ~ 1918년 12월 21일 |
| 출생지 |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조항리[1] |
| 사망지 | 만주 환인현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박영묵은 1845년 8월 10일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조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갔으나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이어서 단발령이 선포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충청도 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충청도·강원도 등지에서 활약해 한때 5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기도 하였다.
1896년 3월 홍천 삼물치에서 관군과 교전하여 적 8명을 사살했으며, 4월 횡성의 성에 주둔해 반년간 수비하면서 포고문(布告文)·격고문(檄告文) 등으로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고종의 의병 해산 조칙에 따라 의병을 해산시켰던 그는 1907년 황해도 구월산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1910년 대세가 기울어지자 만주로 망명하여 유인석 의병장의 문인들과 제휴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활약을 하다가 1918년 12월 21일 만주 환인현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묵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하동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묵
| 성명 | 박영묵(朴永默) |
| 본관 | 밀양 박씨 |
| 생몰 | 1881년 5월 5일 ~ 1970년 2월 17일 |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
| 사망지 | 경상남도 하동군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영묵은 1881년 5월 5일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마을의 이종인(李宗仁)·정상정·정의용(鄭宜鎔) 등 33인과 더불어 일신단(一身 )을 조직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4월 6일의 주교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신단 동지인 정재기(鄭在基)에게 하동읍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재기가 도중에 체포되었고 일제는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게 되었다.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주교리 장터에 1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그는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가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신단원 및 장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조선인 경찰 박도준(朴道俊)과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제지하자, 시위군중은 그들의 총검을 빼앗는 한편 모자와 제복을 벗기고 구타하였다.
그러나 급거 응원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행사로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 헌병 20명과 경찰 10명이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성천리(城川里) 지소부락(紙所部落)에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치자, 그는 미리 부녀자와 아이들을 동리 뒤의 삼봉산(三峰山)으로 대피시킨 뒤, 정상정·이종인·정의용과 함께 주동자임을 자처하며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하동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0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