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23:53:50

방어진

파일:대동여지도 울산.jpg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방어진

1. 역사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에 있었던 나루.

조선시대에는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 관할의 동면(東面)에 속해 있었다. 세종 때 삼포(三浦)가 개항되면서 이곳 염포(鹽浦)에 왜인(倭人)이 드나들게 되었다. 삼포왜란 후 염포의 왜인들이 물러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인들이 이곳을 군사기지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부근 일대가 국가 경영의 목장으로 이용되었고, 천내봉수(川內烽燧)는 남쪽의 가리산(加里山)과 북쪽의 남목천봉수(南木川烽燧)를 이어주면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울산에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慶尙左道兵馬節制使營)이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상화잠동ㆍ하화잠동을 합치어 방어리라 하였다. 1931년 방어진면, 1936년 방어진읍으로 승격되었다. 1962년 울산시가 생기면서 방어진출장소가 설치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출장소는 1988년 동구(東區)로 승격하여 방어동이 되었다.

방어진의 지명 유래는 이곳에서 방어(魴魚)가 많이 잡힌다는 데서 생겼으며, 광복 전에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어항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917년 방어진등대가 설치되었고, 천연적인 양항인 방어진항에는 방파제가 축조되었다. 방어진항은 울산만의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울산 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울산시가 공업도시로 급속히 성장하면서 태화강(太和江) 서쪽 지역이 개발되고 있으나 방어진 지역은 지형적인 제약으로 한계성을 갖는다. 염포산(鹽浦山, 174m) 줄기가 해안까지 뻗치면서 해식애(海蝕崖)를 이루고 있어 대단위 임해공업단지의 조성이 어렵다. 이 지역은 앞으로 자연 녹지대로 보존되면서 쾌적한 주거 공간으로 개발될 것이다.

2. 방어진 12경

방어진 12경은 과거 울산에 살던 선비들이 모여 자연 풍광이 좋은 곳을 엄선하여 만든 것으로 현대화에 들어서면서 부터 대부분 그 풍경을 볼 수 없는 장소도 있지만 과거의 흔적을 따라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좋다.

2.1. 제1경 ‘화암만조(花巖晩潮)’

동구 방어동 꽃바위 마을의 저녁에는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어 이루는 '화암만조'라 부르는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만조를 이루었을 때, 출렁이는 물결에 드리워진 꽃무늬 바위가 절경을 이뤄 '화암만조'라 불려졌다.
이곳 꽃바위에는 천년동안 안전하게 항해하기를 기원하는 거북이 모양의 '화암추등대'가 자리잡고 있다.

2.2. 제2경 슬도명파(瑟島鳴波)

슬도는 울산광역시 동구의 방어진항으로 들어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바위섬으로 '갯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 거문고 소리가 난다’하여 슬도(瑟島)라 불린다. 슬도명파는 방어진항 입구의 슬도(瑟島)를 향해 거세게 밀어 닥친 파도와 부딪히며 나는 소리를 뜻한다.

2.3. 제3경 마성방초(馬城芳草)

대왕암 소바위산 주변을 묘사한 것으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다. 목장의 울타리를 마성(馬城)이라 했고, 그 끝 지역을 성끝마을이라 불렀다. 옛 목장일 때 우마의 분뇨 따위로 들녘이 비옥해져 철따라 온갖 들풀들이 피어나 아름다운 풍광을 이룬 것을 꽃밭등이라 불렀는데, 이를 '마성방초'라 하였다.'마성방초'의 소바위산 아래 유채꽃이 만개한다.

2.4. 제4경 용추모우(龍湫暮雨)

‘용추(암)’는 대왕암의 다른 이름이다. 대왕암은 신라왕 중에 호국의 염원으로 용신이 되어 해중에 잠겼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문무왕의 죽음 이후 향후의 넋도 큰 용이 되어 하늘을 날아 울산을 향하여 동해의 대암 밑으로 잠겨 용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대왕암을 일컬어 신라왕의 장골처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대왕바위, 큰바위, 왕바위, 댕바위로 부르기도 했다. 저물녘에 내리는 비는 호국성령들을 추모하듯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왕암 앞바다 윤슬의 반짝임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호강하게 한다.

2.5. 제5경 어풍귀범(御風歸帆)

일산진마을 동북쪽에 바다로 돌출된 바위언덕 어풍대를 향해 고기잡이 갔던 어부들이 잔광을 싣고 돌아오는 범선(帆船)을 묘사한 것으로,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어풍대[1]는 조선조 중종12년(1517) 모재(慕齋)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울산지역을 순시하던 중 이곳 일산진 해안을 다녀가면서 같은 이름의 시와 시서를 그의 유고집에 남겨 더 유명한데, 시서(詩序)가 이채롭다. “어풍대에 올랐다. 어풍대는 울산바닷가에 있는데, 남쪽 최고운의 해운대, 북쪽 이목은의 관어대와 함께 경승을 겨루어 갑을인바, 고금에 유람하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이곳은 이름이 없으니 어찌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이름하여 ‘어풍대’라 하니 감히 최고운 이목은과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 뜻을 따를 뿐이다(登御風臺 臺在蔚山海邊 南則崔孤雲海雲臺 北則李牧隱觀魚臺 景勝相甲乙 古今遊賞者多矣 ?無名稱 豈非一大欠事 因名之曰御風臺 非敢自擬於牧老崔仙也 聊寄意耳).”
일산만의 석산에 북쪽을 향해 구멍이 뚫린 두 곳이 있는데, 대왕암의 용굴과 고늘개의 니구무나달이다. 이곳 주민들은 고늘 끝을 어풍대라 불러왔다. 고늘[2] 끝에는 어풍대, 노리창, 물탕, 니구무나달 등 절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연안을 군수밭이라 불렀다.

2.6. 제6경은 안헌창송(案憲蒼松)

어느 고을이나 마을 앞에 풍수해를 막아주고 마을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앞산이 있었고 이를 안산(案山)이라 하여 방풍림을 조성하고 늘 신성시했다.

2.7. 제7경 유정만선(楡亭晩蟬)

지금은 없어진 풍경이다. 옥류천과 제기천이 합류하는 동천가에는 미루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는 참외, 수박 밭을 가꾸고 지키던 원두막이 드문드문 지어져 정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듣는 저녁녘 매미소리는 선남선녀의 합창으로 들렸을 것이다.

2.8. 제8경 촉산락조(矗山落照)

촉산은 남목삼거리 쪽에 있던 팽이를 엎어놓은 것처럼 뾰쪽하게 생긴 작은 산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너무나 가팔라 사람이 오르내리지 못해 송림이 늘 수려했고, 석양에 해가 촉산에 걸려 내려앉는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을 법하다.

2.9. 제9경 섬암모운(蟾巖暮雲)

동축사 뒤쪽의 관일대[3]를 이르는 말로, 옛사람들은 ‘두꺼비바위[4]’라 불렀다. 여기서 바라보는 석양에 물든 구름은 환상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목관 원유영은 부상효채(扶桑曉彩)라는 명필적을 남겨놓았다. 이 글귀는 '부상(, 높이와 둘레가 수천 길이나 되는 중국 신화 속 뽕나무)의 새벽빛'을 뜻한다.

2.10. 제10경은 옥동청류(玉洞淸流)

옥동이란 남목의 별칭인 남옥(南玉)을, 옥류(玉流)란 남옥을 흐르는 내를 가리킨다. 마을의 토질이 마사토여서 옥류천을 흐르는 물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2.11. 제11경 승동청화(勝洞晴花)

불당골의 옛 지명으로, ‘동면 8경’에는 불당골을 만승(萬勝)폭포의 경승지라 칭송했으나 지금은 개인의 집터 안에 있어 아무나 볼 수는 없다.

2.12. 제12경 망양조하(望洋朝霞)

태화강 하류 염포의 풍경을 이르는 말로, 염포 해안에는 갈대밭이 뻗어 있었다. 여기서 피어나는 수증기에 아침햇살이 투영되어 빚어지는 아침노을은 실로 장관이다.

3. 방어진항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에 위치한 어항이다. 1971년 12월 2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다.
방어진항은 1900년대 초반 어업전진기지로 번성했던 동해안 최대의 항구로 100년전 근대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울산광역시 동구는 방어진항의 끝에 있는 성끝마을을 벽화마을로 조성하고 방어진항 일대의 역사문화자원을 정리해 방어진 근대역사문화 탐방코스 2.1km 구간을 발굴해 변모를 꾀하고 있다. 방어진동에 위치한 방어진 철공조선소는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모태가 된 곳이며, 울산수협위판장에는 새벽에 들어온 어선들이 잡아 온 싱싱한 수산물을 경매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연락처 울산광역시 동구청 관광과
☎052-209-3361
주소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 일원
관리청 해양수산부 동해어업관리단
시설관리자 울산광역시 동구청장

4. 기타

울산 동구 중 남목동(행정동 총칭)을 제외한 전역을 가리키는 속칭, 일제강점기 ~ 대한민국 제2공화국 시기 행정구역인 울산군 방어진면 / 방어진읍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1] 임금이 풍류를 즐기던 곳[2] 임금의 행차에 따르던 화사한 옷을 입은 궁녀들이 삼삼오오 뱃놀이를 하니 온 바다가 꽃나루 같이 보였다는 전설이 있다.[3] 영조 때 선비 정만양 형제는 이곳을 '일관대'라고 하였는데, 언제부터인지 '관일대'로 바뀌었다.[4] 택미암, 동대라고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