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7:35:27

릿다 전쟁

배교 전쟁에서 넘어옴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활약3.2.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vs 툴라이하

1. 개요

632년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이슬람 세력(움마) 대 비무슬림 아랍 부족 간의 전쟁.

2. 배경

무함마드메카에 입성하여 아라비아 반도 서부 홍해 연안인 히자즈의 주도권을 잡은지 2년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에 아라비아 반도 각지의 아랍 부족들은 자신들의 복속은 무함마드와의 계약이었는데 그가 사망했으니 메디나에 대한 조공 계약은 이제 무효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무함마드의 아라비아 반도 통일은 완전한 것이 아닌 큰 부족들만을 복속시킨 것이었고, 그들마저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아닌 그의 군사력과 권력에 복종한 것이었기에 그의 죽음 이후 분란이 생기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무사일리마 알 카다브, 툴라이하 빈 카와일리드 등 일부 부족장들은 자신이 무함마드 다음의 알라의 사도라며 독립을 선언하고 메디나를 공격했다. 이에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제1대 정통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는 경쟁자였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힘을 합쳐 주요 전력이 우사마 빈 자이드의 아라비아 북부 원정에 할애된 양면전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중용하며 차례차례 반란을 진압해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다수의 부족들이 이슬람 진영과 반란 세력 간을 저울질하며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세를 잡는 쪽이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기에 이슬람 군대는 비록 소수였지만 곧바로 출정했다.

3. 전개

주요 반란 세력은 아라비아 반도 중앙부의 도시 부타의 말리크, 중북부 도시 부자하의 툴라이하, 동부 야마마의 무사일리마였고 그 외에도 바레인, 오만, 하드라마우트(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 등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바레인에서도 주민들이 배교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부 바크르가 파견한 총독 알 알라 알 하드라미에게 진압되었다.

주요 반란 세력 목록
  • 무사일리마 알 카다브 - 주요 수괴로, 아라비아 반도 중앙부 네지드의 야마마 지역을 기반으로 예언자를 칭했다. 무함마드 생시부터 하니파 부족 중심으로 세력을 꾸며 아라비아 반도 분할까지 제안했다. 632년 아부 바크르의 제1차 토벌 시도(이크라마 빈 아비 자흘)[1]를 분쇄했으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끈 제2차 토벌때 분쇄되었다.(633년 초엽)
  • 사자흐 앗 타이미야 - 타밈 부족 출신의 여인. 4,000명에 달하는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진군했으나, 툴라이하의 패전 소식을 듣고 무사일리마에게 원조를 청하며 그와 결혼한 후 휘하에 들어갔다.
  • 툴라이하 빈 카와일리드 - 아라비아 남부 아사드 부족 출신이었다. 역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패배한 후 시리아로 도주했다.
  • 알 아스와드 알 안시(압할라 빈 카압)- 예멘 출신으로, 항상 얼굴을 가렸기에 '베일의 예언자'라 불렸다. 또한 당나귀를 훈련시켜 꿇으라 하면 따르게 하여 사람들에게 보였기에 '당나귀의 주인'이란 의미인 '둘 히마르'라고도 불렸다. 무함마드가 와병하던 때 이미 예멘 총독 샤흐르 빈 바단을 죽이고[2] 사나를 장악했으나 무함마드의 임종 직전에 암살당했다. 그 후 잔여 세력이 카이르 빈 아브드 야구트를 지도자로 세워 반란을 이어나갔으나 무함마드가 파견했던 페르시아인 사하바 피루즈 앗 다일라미에게 패배한 후 항복했다.
  • 라키트 빈 말리크 알 아즈디 - 아즈드 부족 출신으로, 디바(현 푸자이라)를 중심으로 오만에서 예언자를 칭했다. 토벌을 위해 파견된 이크라마 빈 아비 자흘은 라키트의 병사 수백 명을 전사시키며 승리했고, 디바에 입성하여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메디나로 보냈다.[3]

3.1.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활약

메디나 북쪽에 거주하던 가타판, 하와진, 타이 부족이 이슬람을 거부하고 메디나를 공격했지만 이미 아부 바크르는 이들이 메디나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무슬림 군대는 굳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그들을 격퇴했으며, 야습을 통해 도리어 그들의 근거지인 두키사를 함락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 시점에 우사마 빈 자이드의 북부 원정군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 메디나의 사기가 올라갔다. 패배한 부족군은 더 북쪽의 아브라크로 도주했다.

아부 바크르는 지친 원정군을 무리하게 또다른 전투에 바로 투입시키는 대신에 본인이 병사를 모집하여 아브라크로 진군해, 함락시켰다. 가타판, 타이 부족은 부자하에 위치한 툴라이하의 진영으로 도주했다. 이후 아부 바크르는 우사마 빈 자이드의 군대를 포함하여 11개 군단으로 구성된 반란 진압군을 편성했다.

3.2.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vs 툴라이하

메디나에게 가장 위협적이었고, 스스로 무함마드와 동급의 예언자라고 주장한 아사드 부족의 툴라이하 진영으로는 '알라의 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군단이 파견되었는데, 명석한 할리드는 타이 부족과 자딜라 부족을 설득하여 툴라이하 진영으로부터 이탈시킨 후 무슬림 군대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툴라이하의 군대는 여전히 15,000명에 이르렀고, 할리드군은 6,000명이었다. 할리드는 꾀를 내어 툴라이하에게 지휘관끼리의 1대1 대결을 요구했고, 할리드의 무공에 밀린 툴라이하가 도주하자, 무슬림 군대가 아사드 - 가타판 연합군에 공세를 가해 대파했다.(부자하 전투, 632년 9월) 할리드는 이에 멈추지 않고 감라까지 진격하여 패잔병을 섬멸하고, 아라비아 중부의 툴라이하 세력을 모조리 격퇴한 후 패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나콰르 전투와 자파르 전투를 통해 632년 8월 살마 부족을 굴복시켰다.

계속해서 할리드는 부족들을 공격했고, 야마나 전투에서 무사일리마의 마지막 군대가 전멸함으로써 632년 12월, 초창기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크게 위협했던 릿다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1] 이슬람에 극렬히 반대하던 메카 귀족 아부 자흘의 아들이자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의 외사촌이었다.[2] 이후 그의 과부와 결혼함[3] 포로 중에는 훗날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장군이 되는 무할라브의 아버지 아비 수프라도 있었다. 포로들은 우마르가 제2대 정통 칼리파가 된 후 몸값없이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줄란다 가문이 총독위를 세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