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2 15:33:06

부민고소금지법

部民告訴禁止法.
1. 개요2. 내용3. 역사
3.1. 성립3.2. 쇠퇴3.3. 부활
4. 옹호

1. 개요

조선시대에 지방의 향직자(鄕職者)나 일반 백성들이 관찰사수령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던 제도. 세종 2년인 1420년에 세종의 명(상왕인 태종의 동의와 함께)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 내용

수령고소금지법(守令告訴禁止法)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백성들이 수령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던 법을 의미한다. 유교의 사상에 ‘군사부일체’라는 것이 있는데, 지방 수령 역시 백성들에게는 군, 즉 임금을 대신하는 사람이므로 어버이와 같고, 따라서 고소할 수 없다는 논리가 기반이 되었다.

3. 역사

3.1. 성립

처음 법이 시행된 시기는 1420년으로, 이 법을 주도한 인물은 허조이다. 세종과 허조가 이 법을 제정한 목적은 사리에 맞고 안 맞는 것을 불문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상하존비(上下尊卑)의 명분을 확립하고자 함에 있었다. 수령은 백성의 부모이고 백성은 수령의 자식인데, 자식으로서 부모를 고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매우 아름다운 법이라고 보았다.

법의 내용은 관찰사·수령을 일반 백성이 고소한 경우 이를 수리하지 않으며, 고소자를 장(杖) 100, 도(徒) 3년에 처하였다. 또한 타인을 몰래 사주해 고소하게 한 자도 같으며, 무고한 자는 장 100, 유(流) 3,000리형으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3.2. 쇠퇴

파일:박시백 단종세조실록1.jpg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부민고소금지법이 잠시 폐지되었던 시기는 7대왕 세조 시기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세조는 억울하다며 고소한 백성들에게 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내는 부민고소금지법을 극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즉위 후 부민고소금지법을 바로 폐지하였다.

3.3. 부활

이후 세조 사후 성종 4년인 1473년에 성종이 유학자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시 부활시켰고, 당시 개정되던 경국대전에도 수령고소금지법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왕조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점차 지방수령들의 과도한 권력 행사, 치부, 불법행위 등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법을 고치자는 의견도 일부 있었으나 세종이 직접 만드신 아름다운 법이므로 법 조문은 그대로 두는 대신 암행어사격쟁 제도를 통한 보완이 더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

중종 19년인 1524년에는 전가사변(全家徙邊)으로 부민의 고소를 더욱 중벌하게 되었고, 훗날 숙종년대에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이 폐지됨에 따라 원래의 장 100, 유 3천리형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부민고소금지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무래도 애민의 왕으로 불리던 세종이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조선 당대에도 좀 그랬던지 후대의 왕들은 세종보다는 성종이 만든 법으로 얘기하곤 했다. 사실 완전히 폐지된 법을 성종조에 다시 부활시킨 것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성종조에 부민고소법을 만들었는데, 이로부터 청렴하지 못한 수령들이 기탄 없이 방자한 행동을 하므로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 成宗朝 立部民告訴之法 而自是之後 守令不廉者 恣行無忌 欲矯此弊 而弊已痼也 亦未果焉
명종실록 권제11, 10장 앞쪽, 명종 6년 1월 19일(정미)

4. 옹호

현대인이 보기엔 악법이라 할 수 있으나 세종시대의 전문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소신행정을 도와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세종의 큰 뜻에서 시행한 제도였다고 한다.

당시 세종이 추구한 최대 목표는 지역 수령을 성공적인 군현의 경영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소신껏 일하는 일부 수령을 지켜주는 순기능을 위해서 이 법을 추진했다는 것이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역사 속 행정] 세종의 부민고소금지법. 주민권리 침해인 줄 알면서도 소신행정 도와 국가 안정 도모

물론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긴 하다.[지상 논쟁] 세종 논쟁 2라운드- 박현모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2018년 경에도 학계 내에서 이 제도가 세종의 애민정신과 국가발전을 위한 큰 뜻이 담긴 선법인지, 아니면 조선왕조 500년의 발전을 저해시킨 악법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두 의견을 종합해보면 세종이 이 법을 제정함에 따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잘못을 함부로 지적하거나 고발하는 데서 오는 명분의 파기를 막고 소송의 남발에 따르는 행정상의 공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의 민원과 언로(言路)가 억제되고 나중에는 백성들이 수령의 일방적인 통제와 지시에 따라야만 하는 노예와 같은 상황을 맞이한 부정적인 기능이 나타났다고 보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