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9:02:55

쁘아까오

파일:buakaw.jpg
본명 솜바트 반차멕
Sombat Banchamek
สมบัติ บัญชาเมฆ
출생 1982년 8월 8일 ([age(1982-08-08)]세)/ 태국 수린
국적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신장 174 cm / 71.5 kg
종교 상좌부 불교
입식 전적 275전 239승 24패 12무(73KO)
1. 개요2. 커리어3. 파이팅 스타일4. 마사토5. K-1 max 이후6. 근황7. 여담

1. 개요

풀네임은 부아카우 뻐 쁘라묵(บัวขาว ป.ประมุข, Buakaw Por Pramuk)[1] K-1 당시 일본의 영향으로 한국에는 '쁘아까오'라고 알려졌지만 실제 발음은 '부아카우'에 가깝다. 태국의 수린에서 태어난 부아카우는 8살부터 무에타이를 시작했고 15살에 뻐 쁘라묵 Gym에 픽업되어 무에타이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이름의 뻐 쁘라묵은 소속 체육관 명인데[2] 한때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던 남삭노이가 소속되기도 했다. 2012년 당시 프로모터 허락 없이 시합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은퇴선언까지 했지만 다행히 협의 후 다시 선수로 복귀. 이후에는 본명(솜밧 반차멕 Sombat Banchamek)과 링네임을 합쳐 부아카우 반차멕으로 활동 중. 현재 소속 짐은 본인의 이름을 내건 반차멕짐.

2. 커리어

태국 출신으로, 무에타이 톱 레벨을 오가는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을 받다가 마침내 일본의 K-1 MAX에 나가며 주목받았다. 사실 그 이전에 우리나라의 KOMA라는 시합에 등장하여 실력을 과시한 적이 있다.[3]

본토 무에타이 선수들이 그렇듯, 8세부터 무에타이로 돈을 벌기 시작해 룸피니 스타디움 2위 랭커, 20대도 되기 전에 이미 150전에 130승이라는 괴물 같은 스코어를 자랑했다. 놀라운 사실은 저것이 챔피언 급에서는 그다지 많은 전적이 아니라는 것 정도.

태국에서는 무에타이 선수들이 그 활약이나 기술 수준에 비해 돈을 많이 못 버는 편인데[4], 부아카우가 일본에서 활약하면서 일본에서 많은 돈을 받고 사랑받으면서 시합하게 되는 길을 열었다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실제로 태국 TV쇼에 출연을 한다든가, 태국내에서 외국인들과 시합을 펼친다든가 하는 활동도 하고 있는 등, 다른 무에타이 선수들에 비하면 상당한 관심을 받는다.

파워면 파워, 기술이면 기술까지 부족하지 않는데다가 스피드와 경험마저 살인적이다. 펀치보다 킥을 위주로 경기를 풀어가는데 킥의 스피드가 펀치만큼 빠르다. 로우킥, 미들킥, 하이킥, 연속 미들킥 등 다양한 종류의 킥을 왼발 오른발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빰 클린치 후 니킥은 접근전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한다. 킥에 비해 복싱 스킬이 약하긴 하지만[5] 이를 덮고도 남을 만큼 부아카우의 킥은 완벽에 가깝다.

막강한 공격력뿐만 아니라 부아카우는 방어기술 역시 뛰어나다.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부아카우의 회피능력이 대단하다. 300전에 가까운 대전 경험을 통해 격투의 센스가 온 몸에 새겨진 것처럼 부아카우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봉쇄해 버린다. 2006년 IBF 복싱 챔프 출신의 버질칼라코다 와의 경기에서 펀치를 모조리 피하는가 하면 2007년 Tsogto Amara 선수와의 경기에서 로프에 기댄 채로 노가드 위빙과 더킹으로 상대의 펀치를 모조리 흘려버리는 서커스 같은 장면#도 연출했으나 고의로 연출한 장면은 아닌 듯하다. 부아카우 입장에서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고, 부아카우는 레이 세포 같은 노가드 도발이나 쇼맨쉽을 보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부아카우는 승부에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을 아예 하지 않는다.

한편 부아카우의 경기를 보다 보면 가끔씩 페이스가 갑자기 급격하게 떨어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부아카우가 어떤 대미지를 입었거나 체력이 소진된 것을 숨긴 채로 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숨기고 있던 대미지의 임계점에 다다랐을때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대미지를 숨긴 채로 싸운다는 것은 300전의 베테랑 파이터이기에 가능한 퍼포먼스일 것이다

2008년 K-1 MAX 일본 토너먼트 사토 요시히로 선수와 2차전 경기에서[6] 2라운드까지 우세한 경기를 펼치던 부아카우가 3라운드 중반 들어 페이스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계속해서 클린치를 시도 하고 딥으로 사토를 밀어내는 방어적인 플레이를 반복하던 부아카우는 3라운드 종료직전에는 다리가 굳고 가드도 잘 올리지 못했다. 사토에게 거의 끌려다니다 시피 수세에 몰리던 부아카우는 3라운드 종료 후 연장전에서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되어 라운드 시작부터 사토에게 맹공을 퍼부었고 판정으로 승리했다.

또한 2008년 K-1 WORLD MAX 8강전, 역시 사토 요시히로 선수와 3차전 경기에서 팽팽한 경기를 펼치던 3라운드 중반부터 부아카우는 페이스가 다운되더니 다리가 굳어서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해로 우두커니 서서 사토의 라이트훅에 KO패를 당했다. 3라운드에 사토의 니킥이 몇 차례 부아카우의 복부에 꽂혔고, 다운 직전 결정적으로 사토의 니킥이 부아카우의 복부에 명중했는데 보통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야 정상이겠지만 부아카우는 아마도 사토에게 자신이 대미지를 입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버티고 서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다리가 굳고 가드도 올릴 수 없을 만큼 대미지를 입었기에 사토에게 통한의 라이트 훅을 내주고 말았다.[7] Tsogoto Amara와 경기에서도 아마 그런 이유로 인해 로프에 기댄 채 가드 없이 회피 동작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맷집도 강하다. 턱이 돌아갈 정도로 강한 펀치를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2004년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2회전 마사토에게 라이트 훅을 제대로 맞았는데[8] 흐트러짐 없이 경기를 이어갔다. 체급에 비해 파워도 있다. 어린시절부터 무에타이로 강하게 단련된 몸이라 그런지 가볍게 던지는 펀치 한방에도 상대가 KO 당하는 장면이 종종 있었다.[9] 전성기 부아카우의 기량은 경이로운 수준으로 K-1 WORLD MAX 세계왕자의 자리에 오른 2004년 당시에는 부아카우를 이길 수 있는 파이터가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10]

2004년 K-1 MAX 데뷔와 동시에 K-1 MAX를 초토화시키며 세계왕자의 자리에 올랐다.[11] 당시 부아카우의 기량은 K-1 WORLD MAX 출전자들보다 몇 수 위 실력이었다. 4강전에서 코히루 이마키는 1회전 초반 부아카우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열 받은 부아카우에게 복날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부아카우의 무한 니킥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은 코히루이마키는 2회전 KO패를 당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았다.

그 뒤 부아카우는 일본의 킥복싱 영웅 마사토와 결승전을 벌였는데, 당시 마사토는 일본 K-1 MAX의 최고 스타 중 한 명이었다. 부아카우와 마사토의 결승전에서 부아카우는 일방적인 경기를 이어갔다. 아니, 일방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완벽한 원사이드 경기였다. 마사토는 부아카우의 연속 프론트킥으로 인해 접근조차도 못하고, 다가왔다 싶으면 펀치를 피하고 무에타이 클린치 후 니킥 퍼붓기, 펀치를 내면 미들킥 3연타가 쏟아지는 등 마사토는 어떤 해법도 찾을수 없이 그냥 부아카우가 때리는 대로 얻어터졌다. 경기 초반부터 마사토는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으며 툭툭 지르는 프론트킥에 밀려나고 정신차리고 달려들면 요것 봐라 하는 부아카우에게 스트레이트 연타에 로우킥 콤보를 당하는 굴욕을 당한다. 당시 3라운드 이후 당연히 부아카우의 판정승일 줄 알았으나 연장이 선언되었고[12] 부아카우는 묵묵히 자신의 코너로 돌아가 연장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연장전에서도 역시 부아카우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마사토를 두들기며 승리했고 그렇게 부아카우는 K-1 MAX 챔피언이 되었다.

부아카우는 말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함과 동시에 K-1 MAX 챔피언에 등극하며 강렬한 임펙트를 남겼다. K-1 MAX 를 비롯한 세계 입식 타격계는 일본산 킥복싱이 주류였고 정통 무에타이를 구사하는 파이터는 태국인이 아니라면 흔치 않은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부아카우가 K-1 MAX 에 진출하기 이전, 태국 룸피니 스타디움 챔피언 출신의 낙무아이 2명이 K-1 MAX 무대에서 킥복서들에게 처참히 무너진 전례가 있기에[13] 부아카우의 2004 K-1 WORLD MAX 우승은 그 의미가 더 컸다. 빰클린치와 딥 같은 킥복싱에서는 부각되지 않는 정통 무에타이의 기술들을 앞세워서 챔피언에 등극하며 K-1 MAX 무대에서 낙무아이의 자존심을 세웠기 때문이다.

K-1 MAX 극강의 챔피언의 탄생과 디펜딩 챔피언 마사토의 참패에 충격에 빠진 일본격투계와 K-1 운영진은[14] 대대적인 룰 개정을 감행하는데 빰클린치 상태에서 연속니킥 금지라든지[15], 연속 프론트킥 금지 등 쁘아까오같은 정통 낙무아이들에게 불리한 룰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2005년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부아카우는 앤디 사워에게 두 번째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정패했다. 이후 부아카우는 변경된 룰에서 복싱 스킬을 보강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복싱 훈련에 매진했고[16] 이전 무에타이 스타일과 다른 복싱을 강화한 새로운 K-1 스타일 무에타이로 2006년 K-1 WORLD MAX에 도전한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8강전에서 사토요시히로를 펀치로 TKO 시키고 결승전에서 앤디 사워 또한 펀치로 TKO시켜 2005년의 패배를 설욕하며 다시 세계왕자의 자리에 오르며 최초의 K-1 WORLD MAX 2회 챔피언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K-1 주최 측 룰 개정 이후 부아카우가 고전하는 경우가 많아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4년 K-1 WORLD MAX 의 세계왕자 자리에 올랐던 절대 강자 부아카우의 모습은 룰 개정 이후 보기 힘들어졌다. 2006년 챔프의 자리에 올랐지만 2004년 마사토를 누르고 챔프에 올랐을 때와 비교한다면 그 둘의 양상은 좀 다르다. 2004년 극강의 모습과는 달리 2006년 앤디 사워와 한 경기에서는 불안한 장면들이 몇 번 있었다. 대부분이 접근전에서 상대의 짧고 빠른 펀치의 콤비네이션 공격시인데 이것은 룰 개정이 원인이다.

2004년 룰 개정 이전 2004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가지고 놀다시피 했던 마사토에게 2007년 K-1 WORLD MAX 8강 전에서 1라운드 다운을 내주고 판정으로 진 것도 마찬가지다. 룰 개정 이전에는 상대가 접근시 빰클린치를 활용한 니킥공격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사토가 감히 접근을 할 수 없었고 부아카우는 쉽게 경기를 풀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룰개정 이후 빰클린치와 니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부아카우는 접근전에서 엄청난 핸디캡을 안게되었다 상대를 잡지를 못하니 물론 부아카우도 복싱스킬을 보강했지만 마사토나 앤디 사워 같은 복싱 위주 킥복서 스타일 경기를 할 순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부아카우는 지금까지 해온 무에타이 스타일을 버려야 한다. 부아카우는 이미 무에타이의 정점에 오른 완성형 낙무아이였기 때문에 격투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은 부아카우에게는 득보다 실이 훨씬 많은것이다. 부아카우의 무에타이 스탠스 또한 복싱을 구사하기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2006년을 정점으로 K-1 MAX 극강의 황제라 불리운 부아카우는 2007 K-1 WORLD MAX 마사토와 2차전 패배 이후로 조금씩 하향세를 그리게 된다. 2008 K-1 WORLD MAX 8강전에서는 사토 요시히로에게 생애 첫 KO패를 당하는 굴욕의 순간마저 맛보게된다.[17] 게다가 개정된 룰이 복싱에 유리하고 점수 채점 방식도 복싱 기술에 더 많은 배점을 주기 때문에 킥의 비중이 높은 무에타이 선수인 부아카우에겐 불리할 수밖에 없다. K-1 MAX 룰 변경은 부아카우에게 비유하자면 마치 독수리의 한쪽 날개를 꺾어 버림과 마찬가지일 것이다.[18]

3. 파이팅 스타일

K-1 MAX의 룰 변경 이전의 부아카우는 전형적인 무에타이 스타일이었다. 주 공격 루트는 킥 그리고 뺨 클린치를 이용한 니킥이다. 대부분의 킥복서들이 킥 보다 펀치를 많이 사용하는데 부아카우는 펀치보다 킥의 비중이 더 높다. 그래서인지 K-1 MAX시절 라운드 후반 체력이 소비된 듯 갑자기 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19] 펀치의 경우 무에타이 특성상 부아카우의 펀치는 단발의 성향이 많다. 짧게 끊는 펀치가 아닌 강하게 휘둘러 치는 펀치이며 거의 원투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콤비네이션이나 연속된 펀치는 잘 쓰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성향과는 달리, 훅으로 KO 시키는 경기가 꽤 나올 정도로 펀치를 이용한 한 방이 있는 선수다.

킥의 달인이다 보니 자유자재로 킥을 사용하는데 빠르고 강력한 로우킥과 미들킥으로 상대의 펀치가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펀치처럼 빠르게 상대를 타격한다. 킥의 속도가 빠르고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방에서 가드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한 번의 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킥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서 로우킥과 미들킥이 연속으로 들어간다든지 왼발 미들킥 후 스탭을 바꿔서 오른발 미들킥 2연타를 날린다든지 그런 연속된 킥이 빠른 속도로 들어오기 때문에 상당히 방어하기가 어렵다. 킥을 막더라도 가드한 팔에 대미지가 쌓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부아카우의 킥은 위협적이다. 또한 상대의 펀치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상대의 펀치에 카운터로 킥을 날리는데 타이밍이 좋기 때문에 상대가 펀치로 밀고 들어오기도 쉽지 않다. 또한 부아카우의 킥은 스피드와 파워뿐만 아니라 선이 굉장히 아름답다. 골반을 완전히 비틀어 채찍처럼 후려치는 부아카우의 킥은 무에타이 킥의 교과서라고도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다.

상대가 접근하면 뺨 클린치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니킥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부아카우의 탄탄한 뺨 클린치는 단순히 잡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가 빠져나오려 하면 포지션을 이동하며 이리저리 상대를 휘두르며 상대를 무력화하는데, 부아카우의 뺨 클린치 기량이 워낙 높다 보니 한번 잡히면 빠져나오기가 힘들다.[20] 또한 빰클린치 상태에서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기술이 탁월한데, 스탠딩 MMA 라고도 일컬어 지는 슛복싱 챔피언 출신의 강자 앤디사워 조차도 쁘아까오와 클린치 상황에선 맥없이 넘어지며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할정도로 태국 본토 낙무아이 쁘아까오의 빰클린치 기량은 다른 K-1 MAX 킥복서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독보적인 수준이다 뺨 클린치 후 이어지는 니킥은 접근전에서 엄청난 무기이다. 특히 복싱을 앞세우는 킥복서들을 접근전에서 제압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사토. 비단 마사토 같은 킥복서뿐만 아니라 뺨 클린치와 니킥을 잘 쓰는 무에타이 선수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현격한 기량차에서 오는 것인데 코히루이마키와 한 경기가 좋은 예시이다. 무엇보다 전성기 부아카우의 무에타이 기량은 가히 최고의 경지에 오른 수준이었기 때문에 부아카우의 경기를 보면 상대의 수를 미리 읽고, 또한 경기 초반의 탐색전으로 상대를 파악한 뒤 상대에게 맞춤형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21] 이렇듯 무에타이의 엘리트 전사 부아카우의 기량을 기존의 K-1 MAX 룰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K-1 MAX에서는 딥 공격을 1회로 제한, 뺨 클린치 금지, 니킥 1회 제한[22] 이라는 룰개정으로 부아카우의 공격력을 제한했다.

K-1 MAX 룰개정 이후의 공격 패턴은 레프트 잽과 딥(프런트 킥)을 이용한 견제, 무에타이 스탠스 상 경쾌한 스탭이 아닌 성큼성큼 상대를 향해 걸어가며 레프트 쨉과 딥을 활용해 간격을 조절하며 적절히 사용하다가 적정한 타이밍에 로우킥, 미들킥을 주로 날린다. 부아카우의 딥 활용도는 다른 K-1 MAX 파이터들과 비교했을 때, 월등히 높은 편이며 부아카우에게 딥 공격은 상대와의 거리를 재고 공격을 리드하는 역할을 하는데 마치 복서의 잽과 같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미들킥의 경우 니킥과 더불어 부아카우의 주 무기이며 오른발보다 왼발 스위치킥의 사용 빈도가 높다.
부아카우의 파이팅 스타일의 시그니처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왼발 미들킥 (왼발 스위치킥) 이다. 구 K-1 MAX 파이터는 물론 현 ONE FC , Glory 등 의 모든 파이터들 가운데 부아카우처럼 왼발 (앞발) 을 주 무기로 활용하는 파이터는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태국의 낙무아이도 마찬가지다. 본토에서는 부아카우보다 한수 위로 평가받는 남삭노이[23] , 왼발의 달인 쌈코도 주력은 뒷발이다 시티차이, 좀통, 욧센클라이, 슈퍼본 그리고 떠오르는 신성 타완차이까지 모두 주력은 뒷발이다. 입식의 GOAT라 불리는 조르지오 페트로시안 역시 마찬가지다. 2023년 1월 14일 ONE FC 챔피언 슈퍼본을 KO 시킨 알라조프 선수가 왼발(앞발)을 많이 쓰긴 하지만, 그것은 스탠스를 스위치 해서 왼발을 뒷발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앞발을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왼발(앞발)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파이터는 쁘아까오 외에는 찾기가 힘들고, 그런 쁘아까오의 왼발은 쁘아까오가 극강의 파이터가 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일 터이다.

첫째, 스피드와 기동성이다. 오른발킥을 찰 때에는 왼발 디딤발에 체중을 싣게 된다. 그 과정에서 딜레이가 생기고 킥을 날릴 때 묵직한 느낌이며 상대도 킥을 차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은 단독으로 날리기보다는 펀치 등으로 셋업을 하거나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고 킥을 한다. 그러나 왼발 스위치킥은 왼발과 오른발의 가벼운 교차 동작으로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며 지면에 닿는 동시에 체중을 실어버리기 때문에 오른발킥보다 빠르고 가볍게 체중이동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른발보다 스피디한 킥이 가능하고, 또한 쁘아까오의 왼발 스위치 속도가 워낙 빠르고[24] , 쁘아까오의 경우 스위치를 할 때 양발의 교차가 거의 없이도 몸통과 골반을 살짝 틀어서 킥의 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스위치의 딜레이가 거의 없다. 또한 오른발을 차기 위해선 뒷발에 무게를 둔 스탠스를 해야 하는데 왼발 스위치킥은 스위치시 양발이 지면에서 살짝 뜨기 때문에 가벼운 스텝을 밟으면서도 킥을 날릴 수가 있다 즉 이동하면서 킥을 날릴수가 있는것이다. 왼발 스위치 킥은 정적인 낙무아이의 움직임에 스피드와 기동성을 더하고 그것은 쁘아까오가 빠른 템포의 K-1 MAX 무대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며, 이전 K-1 MAX에 진출했다가 실패를 맛보았던 낙무아이들과의 차별화된 쁘아까오의 강점일 것이다.

두번째. 킥의 거리. 왼발(앞발)은 오른발보다 앞에 위치하기 때문에 킥의 타격 범위가 길다. 그리고 왼발 스위치킥 자체가 약간의 전진스탭을 밟기 때문에 오른발과 비교했을때 같은 위치에서 더 먼거리의 상대를 타격할 수 있다 2004년 마사토와 1차전을 예로들면, 마사토는 2라운드 한차례 쁘아까오에게 라이트훅을 적중시킨것 외에는 정타를 맞추지 못했는데, 경기를 보면 마사토의 펀치는 쁘아까오의 왼발을 뚫지 못하고 계속 쁘아까오의 왼발에 걸린다 즉 마사토의 펀치는 쁘아까오의 왼발킥에 막혀 닿지를 않는 것이다 쁘아까오가 왼발 스위치킥으로 마사토를 타격하면 마사토도 펀치로 대응하지만 허공을 가르고 다시 쁘아까오의 역공을 받을뿐이었다 [25]

왼발 스위치킥으로 쁘아까오는 상대를 여유있게 타격할 수 있으면서도 상대의 펀치는 닿지않는 거리를 만들수있는것이다 또한 쁘아까오는 왼발 스위치킥을 카운터로 활용하는데 원거리에서 상대를 타격하기 때문에 펀치로 대쉬하는 상대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낼수 있다 공격뿐만 아니라 디펜스적인 면에서도 왼발 스위치킥은 쁘아까오의 강점이 되는것이다 [26]

왼발은 오른발에 비해 다루기도 어렵고[27] 습득하는데 오른발보다 많은 연습과 시간을 필요로한다 스위치시 발의 간격, 스위치 이후의 발란스 , 정확한 타격 위치를 잡는 것[28] 왼발에 체중을 실어 타격하는 것 모두 쉽지 않다 무에타이나 격투기를 수련하는 이들에게 쁘아까오의 왼발은 그 숙련도나 자세, 테크니컬에서 가히 완벽한 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실제로 유튜브의 해외 격투기 선수들이 왼발 스위치킥 튜토리얼 영상에서 모범적인 표본으로 소개하는 것은 언제나 쁘아까오의 왼발이다

룰 개정 이전 쁘아까오는 연속 미들킥과 양발 스위치 킥 등 화려한 킥들을 자주 사용했는데 룰 개정 후로는 자주 보기가 힘들어졌다.[29] 아무래도 룰 개정 이후로 공격력이 제한되다 보니 상대 선수에게 그러한 고난도의 기술을 시전 할 찬스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접근했을 시 뺨 클린치를 이용하여 상대를 휘두르며 니킥을 날렸지만 룰 개정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니킥은 접근전에서 부아카우의 강력한 무기다. 펀치와 연계된 콤비네이션 공격과 근접거리에서 들어오는 상대에게 카운터로 자주 사용하고, 뺨 클린치가 금지됐지만 여전히 접근전에서는 펀치보다 클린치와[30] 니킥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접근전 상황에서는 니킥 후 대부분 클린치로 이어지는데 접근전에서 복싱 대결은 부아카우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니킥 후 클린치로 공방을 끊어버리거나 스윕을 활용해 상대를 넘어뜨리는 경우가 많다.

룰 개정 이후 뺨 클린치를 활용한 다양한 패턴의 공격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부아카우의 공격패턴은 위에 서술한 대로 딥 , 레프트 쨉 후 왼발 스위치킥이 기본 패턴이 되어 굉장히 공격이 단순해졌다. 니킥은 단발로 사용할 수밖에 없고 클린치를 할 수는 있지만, 목덜미를 잡으면 안 되고 붙잡는 순간 바로 break 선언이 되기 때문에 복싱이 주 무기가 아닌 부아카우는 접근전에서 상당한 핸디캡이 있다. 그래서 접근전 상황에서 상대의 공격을 끊기 위해 클린치를 한 다음 스윕(쓰러뜨리기) 기술을 많이 사용한다. 상대의 킥을 캐치한 다음 사용하기도 하는데[31] 얼핏 보면 상대를 계속 넘어뜨리는 것이 안 좋은 듯하겠지만, 이 역시 전략이자 상당한 고급 기술이다.[32] 그리고 이 기술을 경기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K-1 파이터는 부아카우와 페트로시안 뿐이었다.

룰 개정 이후 복서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2004년 복서에 가까운 킥복서인 마사토를 유린하며 승리했던 부아카우가 룰 개정 후 마사토의 복싱에 판정패하고 IBF 복싱 챔프 출신의 버질 칼라코다에게 고전하는 등 짧고 빠른 펀치를 사용하는 복서 타입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는 K-1 MAX 스타일이 굳어진 듯하다. 무에타이 경기에서도 K-1 MAX 스타일로 경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4. 마사토

부아카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으니 다름아닌 마사토이다. 2004년 K-1 WORLD MAX 결승전, 부아카우와 마사토의 경기는 부아카우가 K-1 MAX 의 전설이 된 시발점이며 지금도 회자되는 명경기다. 15세 부터 복싱을 시작한 마사토는 프로 복싱 라이선스 취득에 실패하며 킥복서로 전향한다. 1999년 전일본 킥복싱 연맹 대회에서 우승했고 ISKA 챔피언을 지낸 마사토는 2002년 K-1 MAX 출범과 함께 출중한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파이터로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며 맥스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했다. 2002년 초대 K-1 WORLD MAX 에서는 4강전에서 알버트 크라우스에게 다운을 내주고 판정패 당했으나 2003년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알버트 크라우스와 다시 맞붙게 되었고 3라운드 레프트 카운터로 알버트 크라우스를 KO시키며 리벤지와 동시에 2003 K-1 WORLD MAX 세계왕자의 자리에 오른다.

일본인 최초로 K-1 단체의 세계 챔피언이 된 마사토는 2004 K-1 WORLD MAX를 앞두고 2004년 6월 12일 기자회견에서 돌연 은퇴선언을 한다. 이유는 더이상 자신의 상대가 없다는 것이었다.[33] 그렇게 2004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겠다고 밝힌 오만하다고 볼수도 있는 마사토의 계획은 태국에서 온 하얀 연꽃이라는 이름의 한 낙무아이에 의해 처참하게 부숴진다. 사실 마사토의 기량은 탈아시안급으로 세계무대에서 서양 선수들을 누르고 정상을 차지할 수 있는 일본 격투계의 유일한 대안이자 인물로 평가받았고 실제로 세계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마사토에게는 자신을 이긴 상대에게 반드시 리벤지를 하고마는 근성 또한 지니고 있다. 2004년 K-1 WORLD MAX 결승전. 부아카우와 글러브터치를 할 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감을 드러내던 마사토. 하지만 부아카우에게 처절하리 만큼 철저하게 당했고 오죽하면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K-1 프로듀서가 마사토가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1 MAX 심판진은 마사토에게 기회를 주고자 말도 안 되는 연장전을 선언했고, 연장전에서도 마사토는 부아카우에게 구타를 당하며 자존심에 먹칠을 당하게된다. 어쩌면 심판진의 연장전 선언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마사토일지도 모른다. 이 판정 때문에 마사토는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34] 자존심 강한 마사토 역시 그런 결정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부아카우의 압승이지만 마사토 역시 높이 평가받을 만하였다. 그렇게 수세에 몰리면서도 한치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플레이를 했다는 것이다. 보통 그 정도로 당하면 정신적으로 흐트러질 만도 한데 마사토는 시합종료 순간까지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 증거로 경기 종료 후 마사토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승리의 포즈를 취했다. 이 경기 후 부아카우는 전설이 되었고 마사토는 은퇴를 접고 리벤지를 위해 WMC[35] 무에타이 챔피언 출신의 태국 낙무아이를 스파링 파트너로 섭외하면서까지 리벤지의 결의를 불태웠다.
3년 후 마사토는 2007년 K-1 WORLD MAX 첫 상대로 부아카우를 지명한다. 부아카우를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은 것이다. 이 경기는 부아카우와 마사토 두 선수 모두가 절대 질 수 없는 경기였다. 부아카우는 자신이 가지고 놀았던 상대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자존심도 허락치 않았을 것이고 마사토 역시 지난 패배의 설욕과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던 것이다. 마사토는 1라운드 한차례 부아카우를 다운시키고 심판전원 만장일치로 판정승 한다. 이 경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사토가 부아카우를 압도했다고 말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2라운드는 부아카우의 라운드였고 1라운드 역시 경기 초반 부아카우의 강력한 로우킥에 마사토의 다리가 여러 번 뒤틀렸다. 룰 개정[36]으로 인해 부아카우 역시 1차전보다 어려운 경기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을것이다. 딥과 빰클린치를 활용한 1차전과는 달리 부아카우는 로우킥으로 마사토의 다리를 겨냥한 전략으로 게임을 풀어나갔다. 접근전에서 몇번 마사토에게 숏어퍼를 허용했지만 부아카우의 로우킥과 펀치 한방 한방에 마사토는 휘청거렸다.[37]

1라운드는 전반적으로 부아카우에게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그러나 부아카우가 1라운드 종료를 얼마 안 남기고 다운을 당했고[38] 그때부터 게임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마사토의 일방적인 우세는 아니었다. 오히려 2 라운드에서는 로우킥을 앞세운 부아카우의 강력한 공격과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마사토를 공략했고 마사토를 앞서나갔다. 그런데 2라운드 로우킥으로 앞서가던 부아카우가 3라운드에서 복싱으로 마사토와 대결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판정으로 가면 진다는 압박감이나 어떤 자존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 결과 부아카우는 마사토에게 많은 펀치를 허용했고 실점을 하게 되었다. 완벽한 실패 전략이었다. 3라운드 역시 로우킥을 활용한 전략이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부아카우와 8강전 이후 마사토는 앤디 사워와 결승전에서 로우킥 대미지로 인해 경기를 포기했으니 말이다. 결국 심판 전원 만장일치로 마사토는 승리하며 리벤지에 성공했다.[39]

2007년 2차전 이후로는 두 선수가 경기에서 만난 적은 없다. 2차전 이후로 황제라 불리던 부아카우는 하향세에 접어들고 마사토는 2008년 K-1 WORLD MAX 챔피언에 오르며 은퇴하게 된다. 부아카우에게 마사토는 자신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리게 된 계기였으며 마사토에게 부아카우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두 선수 모두 K-1 MAX의 레전드이며 지금도 많은 팬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40]

5. K-1 max 이후

2010년 이후로는 태국내에서 활동중이며 YOKKAO EXTREME(K-1룰) 및 THAI FIGHT(무에타이룰)에서 출전. 오랜만의 무에타이 시합이라 우려가 되는 가운데 자국내 무에타이룰 시합에서 팔꿈치 봉인해제 이후 마치 물 만난 물고기 처럼 상대 선수를 압도하며 무시무시한 KO를 양산해내고 있다. 2013년 후반부터 되살아난 K-1 MAX에도 참가하여 2014년 2월 준결승에서 대한민국의 이성현에게 판정으로 승리하고 동년 10월 결승에서 엔리코 켈과 붙었으나 연장전을 앞두고 이탈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경기 이후에는 다시 K-1 MAX 를 떠나 중국, 태국 등지의 다른 단체에서 활약중이다. 잠시 주짓수,유도,레슬링 클라스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2012년 당시 포푸라묵 짐과 계약 문제로 인해 경기에 뛸 수가 없었기 때문에 포푸라묵 짐의 계약조건에 없는 MMA 경기에 진출하기 위한 트레이닝이었다

사실 부아카우가 당시 입식격투계의 경량급 최강자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K-1 MAX의 룰 개정으로 인해 살짝 빛이 바래긴 했지만 부아카우의 실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스포츠 채널 다수의 진행자들조차도 부아카우를 소개할 때 'legend' 'master' 'the great fighter' 라는 어휘를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간혹 남삭노이나 쌈코에 비해 부아카우는 한 수 아래라든지 태국 본토에서는 일류선수가 아니라는 등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41] 부아카우가 룸피니 챔피언 경력이 없다는것도 이런 주장에서 한 몫을 더 하는데 2002년 초대 K-1 WORLD MAX 대회에서[42] 3번이나 룸피니 스타디움 챔피언에 오른 태국의 가오란 선수가[43]결승전에서 알버트 크라우스에게 무기력한 경기 끝에 실신 KO패를 당한 것을 보면 부아카우의 실력과 K-1 MAX 에서의 업적을 평가절하할 수 없을 것이다[44] 태국 본토에서는 룸피니 스타디움 2위의 경력이 있고 엄노이 스타디움 2회 챔피언, 도요타 무에타이 마라톤 위너, 그 외에도 다수의 무에타이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부아카우는 태국 내에서도 무에타이의 강호였다.

부아카우는 챔피언이 된 이후에도 동료들과 고향의 강가에서 수영을 하고 흙밭에서 밥을 먹는 등 변함없이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링에서는 매서운 무에타이의 전사지만 링 밖에서 그는 장난기 많은 순박한 태국 남성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챔피언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며 사치스런 생활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실력뿐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도 부아카우는 최강의 무에타이 전사라는 타이틀을 가질 자격이 있다.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 없듯이 40대 초반으로 접어든 부아카우는 예전 전성기 시절 기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2015년 7월 Khayal Dzhaniev와 한 경기에서 부아카우는 상대의 엘보우 공격에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판정패 당해 많은 그의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경기후 부아카우는 자신에게 승리한 Khayal Dzhaniev를 포옹하며 진심으로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을 보여 다시 한 번 그의 인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6. 근황

2017년 10월 라마 9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한때 출가하는 선원(禪院)에서 생활하던 모습이 공개됐다.

2020년 현재는 치앙마이에 부아카우 빌리지라는 대규모 무에타이 캠프를 세워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2020년 태국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때 라마 9세의 사진을 올리며 경의를 표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팬들은 이 행동이 라마 10세를 돌려 까는 것으로 여긴다.

2022년에는 현직 선수로서는 은퇴하고, 자신의 체육관을 운영하며 유튜버&태국 내 방송인으로 활동하였으나, 나중에 선수활동을 재개하였다.

부아카우 유튜브 : https://youtube.com/user/buakawboxing

2022년 7월 14일 맨손 격투 단체 베어너클FC와 계약하면서 선수로 복귀했다. 2022년 8월 19일 라자담넌 스타디움에서 킥복싱 룰로 치러진 미우라 코타[45]와의 경기에서 3라운드 TKO승을 거뒀다.[46]9월 4일 베어너클FC 데뷔전에서는 에르칸 바롤을 상대로 1라운드 1분 50초 만에 바디샷으로 KO승을 따냈다. 10월 28일 열린 사토 요시히로[47]와의 경기에서도 라이트 훅으로 1라운드 초살 KO승을 거뒀다.

2023년 3월 무에타이계의 살아있는 전설 센차이와 베어너클 경기가 확정되었다. 이 경기는 맨손 무에타이 특수 규정이 적용된다고 알려졌다. 절친 사이이기 때문에 매치가 제대로 성사될지 의문시되었는데, 결국 어른의 사정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 때문에 애시당초 베어너클에서 제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2023년 11월 4일에 개최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5라운드의 경기 끝에 현격한 기량 차이를 보이며 승리하였다.

2023년 5월 6일 도쿄 아리아케 스타디움에서 열린 RIZIN.42에서 안포 루키야를 상대로 경기를 가졌다. 상대인 안포 루키야는 어렸을 적 쁘아까오를 만나 수련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성인이 되어 동경하던 존재와 직접 경기를 가지게 되었다.안포 루키야 트위터 결과는 3라운드 연장 없이 무승부. 비록 나이 때문에 예전 같지 않은 쁘아까오였지만 관록 하나만으로 경기를 잘 운영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홈 어드밴티지만 아니었더라면 쁘아까오의 판정승도 충분히 가능했던 경기였다.

2024년 3월 23일 RIZIN LANDMARK 9에서 키무라 '필립' 미노루와 경기를 치렀다. 74kg 계약체중으로 치러진 이 경기에서 쁘아까오는 1라운드에 미노루의 펀치러시에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48], 2라운드부터는 형세를 뒤집으며 오른손 스트레이트로 KO 승리를 거두었다. 키무라 미노루는 금지 약물 검출 등의 행적으로 일본 팬들에게 단단히 찍혀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쁘아까오가 일본에서 선역이 된 광경을 볼 수 있는 경기였다.

7. 여담

후원해 주는 회사(TOP KING과 SINGHA, THAI AIR 등)의 제품을 굉장히 애용한다.

2009 K-1 WORLD MAX 16 강 경기에서 1라운드 초반 안드레 디다 선수의 레프트 훅에 다운을 당했는데, 부아카우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말하기를 선수생활 하면서 처음 겪어본 충격의 펀치였고 경기 내내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턱이 부러지지 않아서 경기를 계속할 수가 있었고[49] 대미지에서 회복되어 판정승했지만 경기가 끝나고도 어지러웠다고...
[1] Buakaw 이름의 의미는 하얀 연꽃.[2] 최초의 파이트네임은 'Damtamin Kiat-anan'이다.[3] 당시 국내에는 중소규모 대회가 난립했으며 코마도 그중 하나였으나, 특유의 포스터부터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 남삭노이, 쌈코, 쌍욕 등 정상급 낙무아이들의 차원이 다른 경기력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4] 매 경기당 수입을 말한다. 물론 경기가 잦아 명목상 소득은 비등하지만 결국에는 생각보다 더 돈을 못 버는 편이다. 그럼에도 태국인들은 태국 내 무에타이 무대를 최고로 보기 때문에 국내용>세계용이라는 이상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므로 해외로 진출하는 사례가 적다.[5] 킥에 비해 약하다는 것이지 부아카우의 복싱 스킬이 약한 것은 아니다.[6] 1차전은 2006 K-1 WORLD MAX 8강전. 2라운드 부아카우의 TKO 승[7] 2021년 9월 11일, 부아카우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사토에게 TKO 패배를 당한 이유를 밝혔다. 경기 당일 부아카우는 심한 탈진 상태였다고 한다 만일 에너지를 지나치게 사용한다면 몸이 붕괴되었을 것이고, 다리는 굳어 있었다고 한다. 서 있을 수가 없었고 (사토의 라이트 훅에 다운되기 전) 그래서 경기를 계속 이어갔다면 자신이 틀림없이 위험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아카우는 "So. I just sleep.", 그냥 잤다고 농담 섞인 말을 했는데, 븐아카우는 사토의 라이트 훅에 다운이 되고 나서 일어나지 않고 스스로 경기를 포기한 것이다.[8] 결승전 경기에서 마사토의 유일한 히트[9] 시시도 히로키, 김준[10] 아닌 게 아니라 K-1 Max 의 프로듀서는 부아카우의 상대를 찾기가 힘들다는 푸념을 털어놨다.[11] 일본 K-1 에서는 월드챔피언을 ‘세계왕자(世界王者)’ 라고 한자로 호칭한다. 간혹 세계왕좌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12] 두번째 심판진이 무승부를 선언했을 때 부아카우가 어처구니없이 놀라는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다.[13] 두 선수 모두 실신 TKO 패를 당했다[14] 사실 부아카우의 2004년 K-1 WORLD MAX 우승을 예상한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체급이었다 58 kg 급에서 활동했던 부아카우가 70 kg급 선수들과의 경기를 하는것은 역부족이고,대부분 같은 무에타이 파이터인 존 웨인파와 8강전에서 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부아카우를 픽업한 K-1 스카우터 역시 부아카우를 챔피언감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이벤트의 구색을 맞추고자 본토 낙무아이가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그들도 부아카우가 이 정도까지 강력할 줄은 몰랐던것이다.[15] 다만, 이건 최홍만과 세미 슐트의 탓도 있긴 있다. 이 둘이 워낙 키가 크다보니 무릎을 올리기만 해도 다른 선수 하이킥 포지션에 와 버리는 바람에 KO율이 급등해서 너무 유리해진 때문...[16] 룰 개정 이후 이전보다 두세 배로 복싱 트레이닝을 했고 자신에게 단지 킥과 니킥만 있는 것이 아님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펀치가 강해지길 원했고 트레이닝의 포커스를 복싱에 맞췄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 이전에는 펀치를 적게, 킥을 많이 사용했는데 트레이닝을 통해 그런 상황을 변화시켰으며 , 그로 인해 최고의 컨디션으로 2006 K-1 WORLD MAX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고 K-1 MAX 인터뷰에서 밝혔다[17] 그 이후 KO패를 당한적은 없다. 부아카우 인간 자체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다운을 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K-1 MAX에서 부아카우에게서 다운을 빼앗은 선수는 마사토, 알버트 크라우스, 안드레디다, 사토 요시히로 등 4명뿐이고, K-1 MAX에서 활동한 6년 동안 그렇게 4번 다운한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마사토의 경우는 슬립성이 농후한 다운이었다.[18] 차 포 떼고 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19] 펀치보다는 킥의 에너지 소비가 더 크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룰 개정 이전에는 부아카우의 스테미너가 딸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룰 개정 이전의 마사토와 1차전에서는 연장라운드에서도 날아다녔는데 룰개정 이후에 스테미너가 저하되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뺨 클린치가 금지되면서 오히려 킥의 비중이 더 늘어났거나 뺨 클린치를 활용한 경기 템포의 완급 조절이 힘들어진 탓일 수도 있다.[20] 2004년 K-1 WORLD MAX 16 강전 조단 타이 와의 경기를 보면 부아카우의 예술적인 뺨 클린치를 볼 수 있다.[21] 상대의 격투 스타일에 따라 공격패턴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단, 룰 개정 이후에는 부아카우의 공격패턴이 단조로워졌기 때문에 그 차이가 룰 개정 이전보다는 덜하다. 2004년 K-1 WORLD MAX 16강전부터 결승전까지의 게임들을 하나씩 비교해 본다면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부아카우의 공격패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2] 연속 니킥 금지 및 목덜미를 잡고 타격하는 뺨 클린치 니킥은 반칙[23] 쁘아까오의 사형이자 같은 체육관 소속이었던 남삭노이 역시 앞발을 잘 쓰지만, 양발의 발란스가 좋은 느낌이고 주력으로 보긴 어렵다.[24] 느린 동작으로 재생해도 동작이 캐치가 안 될 정도다. 그만큼 준비동작이 빠르기 때문에 부아카우의 왼발 스위치킥은 상대가 예측하기 힘들고, 사용빈도가 높은 만큼 상대의 가드하는 오른팔에 대미지를 실어준다.[25] 다만 2004년 1차전에서는 빰클린치와 연속 니킥 때문에 마사토가 쁘아까오에게 붙을수가 없어서 킥의 거리 확보가 용이했지만, 룰개정으로 빰클린치와 연속 니킥이 금지되면서 2007년 2차전에서 마사토는 쁘아까오에게 접근전을 펼칠수가 있었고 쁘아까오는 킥을 받아내고 좁혀 들어오는 상대에게 거리 확보가 어려워졌다. 그로 인해 이전보다 킥을 시전한 다음 역공을 당할 위험이 커졌다 그래서 연속미들킥이나 양발 스위치킥 같은 고난도의 킥을 룰개정 이후에는 거의 활용하지 못했다.[26] 보통은 왼발(앞발)스위치킥을 차고나서 왼발이 앞에 위치한 바른 스탠스로 자세로 고쳐잡는데, 쁘아까오는 왼발(앞발) 스위치킥을 날리고 왼발을 앞발이 아닌 뒷발의 위치에 놓는다 왼발 스위치킥으로 첫번째 타격 후, 이어서 뒷발에 위치한 왼발로 후속타를 날릴수 있는 것이다 즉 상대를 연속으로 타격하거나 첫발을 받아내고 들어오는 상대를 막아내는 디펜스 역할을 할 수 있다[27] 오른손잡이의 경우[28] 샌드백 연습시 너무 가까워서 정강이 윗부분으로 타격하게되면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너무 멀어서 발등으로 타격하게 되면 그 충격이 고스란히 무릎으로 전달돼 무릎인대 부상을 당할 수 있다[29] 2005년 알버트 크라우스와의 첫 대결에서는 무려 7연속 미들킥을 시전했다.[30] 목덜미를 잡지 않고 몸통을 감싸는 클린치.[31] 킥 캐치 후 펀치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이 기술에 여러 선수들이 당했다. 2006년 K-1 WORLD MAX 8강전에서 사토 요시히로는 이 기술에 TKO 당해 완전 뻗어버렸다.[32] 스윕 기술에 휘둘려 넘어진 상대 선수는 체력이 소진된다. 또한 계속해서 스윕 기술에 무기력하게 당한다면 평정심을 잃을 수도 있다. 2004년 K-1 WORLD MAX 4강전에서 코히루이마키의 반칙성 로우킥 플레이에 대노한 부아카우가 우선 연속된 스윕으로 코히루이마키를 내동댕이치며 정신을 쏙 빼놓고 그다음 니킥으로 요리하는 모습을 부아카우의 팬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그만큼 스윕기술은 능숙하고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아주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33] 정확한 워딩은 ‘No one is on my level’ 나의 레벨은 아무도 없다.[34] 비단 부아카우 1차전 뿐만 아니라 K-1 MAX 주최측의 마사토 밀어주기는 정말 노골적이었다. 사토 요시히로와 키센코는 마사토를 다운시키고도 판정패했다. 더군다나 사토는 같은 일본인임에도 말이다.[35] World Muaythai Council[36] 룰개정이 있었지만 쁘아까오와 한 2차전을 보면 마사토의 파이팅 스타일은 크게 달라졌다. 특히 빰클린치 상황에서 탈출하는 스킬이 그러한데, 쁘아까오와의 2차전을 피땀 흘리며 준비한 마사토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정통 킥복서인 마사토가 낙무아이의 스타일에 맞추어 자신을 개조한 것이다.[37] 2004년 1차전 당시 부아카우의 체중은 60 kg 대 초중반이었다. 그러나 2007년 2차전에서는 계체량 기준 69.0 kg이다. 그래서 1차전과 달리 2차전에선 부아카우의 펀치 한 방에 마사토는 휘청 거리고 로우킥 한방에 상체까지 돌아갈 정도였다.[38]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왼발 로우킥을 날리며 한 발이 떠있는 상태에서 스트레이트가 들어왔다.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며 뒤로 밀리듯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부아카우 입장에선 불운이다.[39] 심판진 세 명 중 두 명은 30대 27, 한명은 29대 27의 점수를 줬다.[40] 2019년 10월 17일, 태국의 부아카우 동상 아래서 마사토가 반차맥 짐의 유니폼을 입고 부아카우와 함께 한 사진이 부아카우의 인스타그램에 올려졌다. 생각도 못했던 두 레전드의 훈훈한 모습에 많은 팬들의 응원의 댓글을 올렸다.[41] K-1 MAX 진출 전까지는 남삭노이나 쌈코에 비해 네임벨류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42] 빰클린치 연속 니킥과 딥이 허용되는 룰 개정 이전의 경기였다.[43] Kaolan Kaovichit (born May 12, 1978 . Songkhla Province, Thailand) : 2000 Lumpinee Stadium super bantamweight champion -55.5 kg , Lumpinee Stadium lightweight champion -61 kg, 2003 Lumpinee Stadium welterweight champion -66.8 kg[44] 2003년 K-1 WORLD MAX에서는 또 다른 룸피니 챔피언, 태국의 sakeddaw kiatputon 선수가 마사토의 어퍼컷에 실신 KO패를 당했다. 이런 낙무아이의 무덤과 같은 곳에서 마사토를 가지고 놀며 챔프에 올랐으니 부아카우의 전성기 기량은 말할 필요도 없다.[45] 일본 축구의 레전드 미우라 카즈요시의 아들. 깔끔한 외모로 여성 팬이 많다.[46] 엄밀히 따지자면 3라운드 TKO승이 아니라 3라운드 놀다가 이긴 수준. 진심은 고사하고 전력의 반 정도, 마사토와 싸웠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살살했는데도 젖먹던 힘까지 쏟은 코타를 갖고놀다 끝냈다. 잔인할 정도로 벽을 실감하게 하였다. 일단 부아카우의 주특기인 딥을 차지 않았고, 초반라운드에서 빈틈을 포착하고도 공격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거의 한방도 정타를 맞지 않은 탄탄한 가드와 회피를 보여주는 동시에 공격할때는 대충 하는것처럼 보이는데도 다 정확하고 날카롭게 박혀버리니... 해당 경기 이후 코타는 부아카우의 지도를 받는 사제관계가 되었다.[47] K-1 MAX 시절 유일한 KO패를 맛보게 했던 선수였다.[48] 경기 직후 쁘아까오는 자신이 치른 경기 가운데 가장 강한 펀치였다고 고백했다. -70kg 무대에서도 증량해서 도전해온 쁘아까오에게 미들급에서 뛰던 미노루의 펀치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49] 다운당할 때 턱이 부러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