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5:46:47

사이토 도산

사이토 토시마사에서 넘어옴
전국 3효웅
호조 소운 사이토 도산 아마고 츠네히사[1]
파일:285px-Saito_Dosan.jpg

斎藤道三 / 利政 (さいとう どうさん)
(1494년 ~ 1556년 5월 28일)

1. 개요2. 나라 훔친 이야기3.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4. 최후5. 평가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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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장인.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훔친 이야기(国盗り物語)'의 전반부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크게 전반부의 주역은 사이토 도산, 후반부의 주역은 도산의 제자이자 정신적인 후계자처럼 묘사되는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츠히데로 나눌 수 있다.

살무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고 이에 걸맞게 '하극상의 효웅',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 겸 스승'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행적이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서 정확한 인물상이나 행보를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며, 살무사라는 별명 역시 전국시대 당시의 사료나 문서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현대 소설의 창작이다.

2. 나라 훔친 이야기

본래 서민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어려서 쿄토 묘카쿠지(妙覚寺)에 들어갔다가 환속, 마츠나미 쇼고로(松波庄五郎)라 칭했다.[2] 기름 상인인 나라야 마타베에(奈良屋又兵衛)의 딸과 결혼하여, 그 자신도 기름 행상을 시작하게 된다. 그 와중에 승려 시절의 동문이 미노지방의 절(常在寺)의 주지로 있는 것을 계기로 이 미노 지방의 슈고였던 도키(土岐)가문 소속의 나가이(長井) 가와 인연을 맺게된다.

이때 미노의 영주였던 도키 요리요시로부터 미노의 명문인 '니시무라' 성을 하사받고 니시무라 간쿠로가 되었다가, '나가이' 성을 받아 나가이 노리히데, 가계가 끊어진 '사이토' 씨를 이어 사이토 도시마사가 되었다. 성씨를 바꿀 때마다 파격적으로 신분이 상승했으며, 이렇게 신분을 차차 올리며 주군 옆에 붙어있는 도산을 간신으로 보고 제거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모두 역관광 크리를 먹고 버로우탔다. 그리고 최후에는 도키 요리요시까지 몰아내고 사이토 도산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영주가 되었다. 덧붙여 도산의 한자 표기는 '道三'으로, '불문에 세 번 출가했다'는 뜻이다.

이 요리요시를 몰아내는 과정 중 도산의 아들인 사이토 요시타츠가 요리요시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대강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단계, 요리요시에게는 미모의 첩인 미요시노가 있었는데, 그 미요시노를 내기를 통해 빼앗아 '첩을 통해 맺어진 사이'임을 강조하며 요리요시를 위하는 척했다.
2단계, 사실 미요시노는 요리요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이토 도산에게 온 지 7개월 만에 애를 낳았는데, 애는 자라면서 호리호리한 도산을 전혀 닮지 않고, 거구인 요리요시를 닮아만 갔다.
3단계, 요리요시는 도산이 자기 아들을 키우는 것을 재미있게 여기며 미요시노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했고, 비밀을 지켜왔다.
4단계, 명실공히 미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도산이 요리요시를 찾아와 '댁 아들도 내가 맡고 있었으니 이제 그만 은퇴하라'고 권하고, 듣지 않자 쫓아내 버렸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이다. 한 마디로 그저 썰일 뿐이다. 도산이 미요시노를 양도받은 것, 그리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자식이 태어난 것을 두고 그런 의혹을 제기한 것이지만 확실한 것은 알 도리가 없다.

오히려 그 냉정한 도산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려는 조짐을 몇 번이고 보인 요시타츠에 대해서는 비정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말싸움을 일으키고 분위기를 최악으로 몰고갔던 요시타츠지만 도산은 선제 공격을 하지 못하고 결국 요시타츠에게 당하고 만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리요시의 아들을 맡아서 기를 이유가 없다. 혹자는 요리요시의 중신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인질로 잡고 있기 위해 그랬다고 하는데 전국시대에 영주 바뀌는 거야 흔한 일이고, 가신들이 떠나가고 새 영주를 찾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영주의 핏줄로 정통성을 내세우며 중신들을 압박하는 것도 의미가 별로 없는 짓이고, 정작 중신들도 전 영주를 위해 그런 의리를 발휘할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고작 중신들을 억누르려는 용도로 쓰기에는 전 영주의 핏줄을 자신의 아이로 둔갑시킨다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크다.[3] 새로운 영주 자신의 핏줄의 정통성에 대해 추문을 남기는 일이다. 그래서 위의 이야기는 학계에서는 에도 시대 이후 지어진 소문으로 보고 있다.[4][5]

3.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

정실 부인 오미노카타는 아케치 집안 출신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고모에 해당한다. 이 정실 부인의 소생이 키쵸, 흔히 노히메라 알려진 여성이다. 그래서 미츠히데는 도산의 조카뻘이 된다.

도산은 친자식인 키쵸를 끔찍히 사랑하여 '바보'라는 소문이 난 오다 노부나가와 결혼시키는 걸 상당히 꺼렸으며, 딸에게 '놈이 진짜 바보거든 이 칼로 찔러 죽이거라.'라며 단도를 주었는데, 키쵸가 '이 칼로 아버지 목을 찌를지도 모릅니다.'라 대답하여 혀를 내둘렀다 한다.

도산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와 여러번 겨뤘으나 전부 이겼다. 사실 딸을 보냈을 때에도 '바보'라고 소문난 오다 노부나가를 잘 구슬러 오다 가문의 땅을 차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걸로 보인다. 수백 년 전 사람이므로 그 속을 짐작할 순 없지만 과거 행적을 생각해 봤을 때 그저 동맹을 위해 딸을 시집 보낼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쇼토쿠지라는 절에서 직접 만난 후 오다 가문의 땅을 빼앗을 생각이나 의향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도와주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게 많은 소설가들과 사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이 첫 번째 만남에서 효웅 도산을 감복시킨 천재 오다 노부나가의 모습이 일본 역사 소설에는 꽤나 많이 차용되는 소재다. 실제 역사에서 도산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첫 만남 이후 감복해 전폭적으로 도와주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애초에 '도산이 노부나가에게 감복했다.'는 기록 자체가 오다 가 측의 사료다. 다른 일화에서는 반대로 노히메를 통해 '도산의 중신 일부가 자신과 내통 중이다.'란 거짓 정보를 흘려 도산의 손으로 그 중신을 제거하게 만든 것도 있다. 이런 고약한 사위를 두고 오냐오냐했다면 그거야말로 천하의 상등신일 것이다.

자신의 아들의 재능을 두고 '네가 가문을 상속받으면 오다 가의 말지기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혹평해,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아들에게 축출당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위에 쓰인 '첫 만남에 감복해' 운운하는 일화가 언급된다면 이 일화도 같이 언급되고는 한다. 노부나가의 스승 이미지를 강화하는 일화기도 하고.. 물론 믿지 말자. 멀쩡한 후계자를 타 가문의 다이묘와 비교해 깔아뭉갠다는 것은, 더군다나 가신단 앞에서 전국시대의 다이묘가 그런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유명한 일화는 일단 차용하는 코에이 게임 시리즈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 심지어 사이토 도산이 유언으로 '뒷일은 맡기겠다'고 말하기까지.

4. 최후

평소 업보가 많아서 그런지 최후가 비참했는데 자신의 적자 사이토 요시타츠와의 불화로 파멸하게 된다. 부자간의 불화가 커진 나머지 요시타츠가 반란을 일으켰고 도산은 탈출 후 반격했지만 고립무원의 상태로 나가라가와 전투에서 살해되었다. 미노의 무사 대부분이 도산이 아니라 요시타츠 편에 섰기 때문. 신장공기에 의하면 도산은 요시타츠를 '무능한 놈'이라고 해서 싫어했고 다른 두 아들을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이런 식으로 장자를 제쳐두고 그 동생들을 편애하다가 가문상속 과정에서 불화가 생기는 일은 사이토 가문 뿐만이 아니라 전국 다이묘 가문들 전체에서 아주 흔하게 발생하던 일들이었다. 이로 볼때 요시타츠가 도산을 죽인 것은 핏줄에 대한 의문 때문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정작 도산도 나가라가와에서 요시타츠가 부대를 지휘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요시타츠를 오판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비교적 이후에는 다른 설도 나왔는데, 도산이 미노에서 발급한 문서가 적은 것에 착안해서 사실 도산이 요시타츠에게 가문을 맡기고 은거한 것은 국내 정치를 돌보지 않은 도산의 시책을 비판한 미노의 중신들에 의한 강제적 당주 교대이며, 도산이 최후를 맞은 나가라가와의 전투는 사실 아들에 대한 도산의 '역쿠데타'였고 이에 실패해서 죽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도산은 전국시대 영주 치고는 독단적으로 영지를 운영했던 것에 반해 요시타츠는 가신단과 미노 유력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이들과 합의하는 형태로 영지를 운영하여 가신들의 불만을 해소시켰다고 한다.[6]

이후 그렇게 아버지를 죽이고 당주에 오른 사이토 요시타츠는 얼마 안 가 1561년 또는 1563년 급작스럽게 사망해버렸다.[7] 문둥병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뒤를 이은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龍興)는 결국 노부나가에게 패해 미노를 잃고 아시카가, 아사쿠라 가문을 전전하며 노부나가에 항전하다 1573년 도네가사키 전투에서 전사했다.

5. 평가

툭 까놓고 말해 이래저래 역사적 사료와 소설 속 이야기가 뒤섞여 정확하게 묘사하기 힘든 영주다. 분명한 사실은 오다 노부나가의 스승 기믹은 시바 료타로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 소설 이후 굳어진 기믹일 뿐, 역사상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 노부나가와는 계속 신경전을 벌이며 협력하되 대치하는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8] 요시타츠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은 낭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9] 여타 매체에 등장하는 도산의 모습은 실제 모습보다는 소설 속의 인물상이 바탕이 되어 묘사된 모습이 많다.

그러나 당대 사료에서는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른 묘사가 있다. 1960년대 기후현에서 현사를 편찬하던 도중 1560년 7월 부의 <롯카쿠 쇼테이 서사>라는 고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는 당시 오미의 슈고다이묘였던 롯카쿠 쇼테이가 가신들 앞으로 보낸 서장으로 여기서 도산의 행적이 일부 적혀 있다. 이 문서에서 사이토 요시타츠의 할아버지가 교토 묘가쿠사의 승려였다가 니시무라로 성을 바꾸었고 미노(오늘날의 기후 현)로 와서 나가이 씨를 섬기며 나가이 성을 칭했다고 하며, 요시타츠의 아버지(=사이토 도산) 대에 가독 상속자를 죽이고 모든 직책을 빼앗아 사이토 성을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이토 도산의 '나라 훔친 이야기'는 도산 한 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2대에 걸쳐서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학설이 유력하다.[10] 더욱이 사이토 요시타츠도 이 문서에서는 도산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추가로 노부나가의 시대를 앞서간 안목의 예시처럼 언급 되는 사례들의 상당수가 사이토 도산이 도입했던 일이라는 말도 있다. 예를 들어 조총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한 것이나, 창의 길이를 늘린 것, 상업을 장려하고 상인을 보호한 조치들은 모두 사이토 도산이 먼저 도입했다는 말이 있다. 사이토 도산에 대한 기록도 애매한 면이 많아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누가 도입했던간에 엄밀히 말하자면 전국 다이묘들은 대부분 조총 도입에 적극적이었고, 집단전으로 인해 창의 길이를 늘리는 추세였으며, 상업을 장려했었다. 어쨌든 사이토 도산 역시 이런 흐름을 읽고 있던 다이묘 중 하나였으며, 근처에 있던 노부나가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6. 대중매체

노부나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최후에 죽을 때에도 노부나가에게 사이토 가를 멸망시킬 명분을 제공해주고 죽어서 노부나가의 스승 격으로 2차 매체에서 많이 등장한다. 창작물 속에서는 주로 대머리로 등장하거나 별명답게 뱀과 관련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게 특징.

사이토 도산/기타 창작물 참고.


[1] 경우에 따라서는 아마고 츠네히사 대신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들어가기도 한다.[2] 마츠나미 쇼쿠로(松波庄九郎)라 하였다고도 함.[3] 차라리 요시타츠가 도산에게 개길 명분을 위해 자신이 도키 가의 혈통이었다고 뻥을 쳤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듯. 실제로 요시타츠가 도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도산보다 요시타츠를 더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기도 했고.[4] 다만 증거가 없는 것과 별개로 자기 아들을 전 영주의 아들이라고 속이는 것 자체는 절대로 쓸모없는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 애시당초 새로운 영주의 혈통의 정통성 운운할 것도 없이 도산 자신의 정통성부터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요시타츠가 사실은 도키의 씨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 도키를 섬기던 자들의 반란을 막을 만한 명분은 될 수 있다. 물론 도키의 구신들이 다 바보 등신들일 리는 없을 테니 절대 방패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5] 반대로 요시타츠가 아버지 도산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주장했을 수도 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구 다이묘였던 도키씨 일족이나 신하들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기 때문.[6] 사이토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시대의 영주들은 대부분 지역 유력자들의 연합맹주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하다 못해 다케다 신겐이나 모리 모토나리도 그런 식이었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실력을 인정받아 좀 더 수월하게 호족들의 '합의'를 이끌어 냈을뿐이며, 그나마 중앙집권제에 가까운 체계를 갖췄던 이는 오다 노부나가 정도.[7] 당연히 노부나가와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아서 자주 전쟁을 벌였다.[8] 오다든 사이토든 주변에 적들이 많아서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함부로 마음을 놓았다가는 상대방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었으니 뭐.[9] 다만 그와 별개로 이런 식의 프로파간다를 썼을 가능성은 있다.[10] 이게 무슨 2010년대의 일이 아니라 이미 1970년대 초반에 발표된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