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20:42:41

사카리아강 전투


1. 개요2. 배경3. 전개4.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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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리아강 전투(Battle of the Sakarya)는 1921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튀르키예 대국민회의(TBMM) 군대와 그리스 왕국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튀르키예 독립 전쟁의 일부인 그리스-튀르키예 전쟁(1919~1922)의 일부이다. 대국민회의 군대가 그리스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리스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향후 반격의 발판을 바련하였다.

2. 배경

1919년 발발한 튀르키예 독립 전쟁의 주요 전역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에서 그리스와 튀르키예 대국민회의 사이에 전개된 서부 전선이었다. 그리스군은 1921년 아나톨리아 내륙의 깊숙한 곳에서 항전하는 튀르키예 대국민회의 정권을 멸망시키기 위해 공세를 펼쳤다. 그리스군은 압도적인 숫적 우세와 장비에 힘입어 대국민회의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했고 1921년 8월에 이르면 앙카라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진 사카리아 강(Sakarya River)에 면한 폴라틀르(Polatl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7월에 벌어진 퀴타히아-에스키셰히르 전투에서 대국민회의 군대의 주력을 섬멸하는데 실패했고, 그 때문에 적군의 주력 섬멸을 재차 시도하다가 자신의 보급 능력을 넘어서 진격하는 우를 범했다.[1] 소수의 지휘관이 사령부에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기각되었다. 8월 10일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사카리아 강의 전선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대국민회의는 지연전과 게릴라전을 벌여 그리스군의 진격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군대의 주력부대를 최대한 보존하려고 했다. 계속된 진격과 전투로 지친 그리스군이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그는 사카리아 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진격을 기다렸다.

3. 전개

8월 23일 괵 강(Gök River) 남쪽에서 그리스군이 대국민회의 군대 진지와 조우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26일 그리스군은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괵 강을 도하하고 찰 산(Çal Mountain)을 비롯한 주요 고지들을 점령했다. 그리스군은 대국민회의 군대의 좌익에 대한 우회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기관총과 포병의 지원을 받는 보병 간의 지루한 정면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리스군은 중앙에 주력을 투입하여 대국민회의 군대를 그들의 2차 방어선까지 몰아냈으며 일부는 앙카라에서 5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대국민회의 군대는 각지에서 신병을 갹출하여 사카리아 강의 전선에 보내 방어를 보강했으며 그들의 기병대는 가뜩이나 늘어서 위태로워진 그리스군의 후방을 습격하여 보급선을 끊어먹었다. 그리스군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고 9월 8일에는 심지어 무스타파 케말 자신이 직접 반격을 이끌어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터키군의 우회 공격과 다가오는 겨울, 보급난을 우려한 콘스탄티노스 1세는 9월 14일에 공세 중단 명령을 내렸다. 그리스군은 에스키셰히르와 아피온카라히사르(Afyonkarahisar)로 퇴각하면서 그동안 점령한 지역들을 초토화하여 수많은 난민들을 낳았다.

그리스군의 손실은 3,782명 전사(장교 217명 포함), 19,362명 부상(장교 736명 포함), 실종 376명으로 총 23,520명이었다. 대국민회의 군대의 손실은 3,700명 전사, 18,480명 부상, 108명 포로, 5,639명 탈주, 8,089명 실종이었다.[2]

4. 의의

직접적으로는 그리스군의 공세 중단, 궁극적으로는 대국민회의의 주도권 장악이 이 전투의 의의이다. 그 전까지 대국민회의는 게릴라전과 지연전을 벌인다고는 하지만 이렇다 할 이득 없이 그리스군에 연패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있었으며 앙카라를 내주기 직전이었다. 사카리아 강 전투의 사상자도 서로 엇비슷했으며 결코 대국민회의가 우세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사카리아강에 대한 공세를 실행한 것 자체가 전략적 오판이었다.

그리스의 목표는 튀르키예 내의 점령지를 보호하는 것을 넘어 대국민회의를 멸망시키는 것이었는데 사카리아강 전투에 패배하여 대국민회의 격파는 고사하고 막대한 병력과 물자만 날려먹었다. 병사들도 몇년째 계속되는 전쟁으로 심리적으로 지쳤고 군대 내에 염전 분위기가 만연했다. 결국 사카리아강 전투 이후 그리스는 1920년과 1921년에 보여준 적극적인 공세보다 소극적인 방어로 일관하게 되었고 1922년 8월 대국민회의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자 3주만에 5만에서 10만에 달하는 사상자와 포로를 내고 순식간에 무너져버려 튀르키예 내의 점령지를 전부 상실하게 되었다. 즉, 사카리아강 전투는 전쟁의 주도권이 대국민회의에 넘어간 분수령이었다.

[1] 보급난이 매우 심각해서 그리스군은 진격로 일대의 가난한 튀르키예 마을들을 약탈해서 배를 채울 정도였다.[2] 단 탈주자와 실종자 수치는 이전 퀴타히아-에스키셰히르 전투에서 발생한 것도 합산한 것으로 사카리아강 전투의 범위 내에 발생한 탈주자와 실종자는 이것보다 더 적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