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13 12:00:55

산도(山道)

<<선조실록 >>의 선조 31년 1598년 2월 11일자에 일본으로 포로 잡혀갔었던 "전풍상"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명량해전 당시의 왜군들의 피해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왜장 산도(山道)가 나온다. 산도가 누구인지 아직도 풀지 못해서 미스테리로 남아 있지만 여러 문서들을 검색을 해보니 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라는 결론이 난다.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저는 지난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 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ㅡ 『선조 실록』 97권. 선조 31년. 명 만력 26년 (1598년) 2월 11일 -
선조 실록 선조 31년 2월 11일의 기사에는 정유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려 있는데 이 증언에 의하면 전풍상은 산도라는 왜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했으며, 산도는 정유년 6월 적선 120여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 해전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다. 산도의 배가 120여척이라고 해도 이것은 전투선만이 아니라 사후선을 포함한 비전투선을 합한 수치일 수도 있다. 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실록의 해당 기사만으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답 풀이는 가능하다.

전풍상의 증언에 따르면 왜장 "산도"는 순천에 들어와서 왜교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순천 왜성인 것이다. 순천 왜성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을 했던 성이다. “고니시”는 명량 해전에 참가를 하지 않았으니 다른 왜장이 먼저 순천왜성을 쌓고 고니시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는 정유년 7월 한산도에서 “칠천량 해전”에 참가를 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정풍상은 임진년 한산도대첩(7월) 이후에 붙잡힌 것으로 볼 수 있고 산도는 해전에 참가를 했으니 수군 장수이므로 육군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아니게 된다. 그러나 순천 왜성을 쌓았던 장수라는 뜻이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유재란(1597年)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선봉장 宇喜多秀家(우끼다히데이)와 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가 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으로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1만 4천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연합군과 두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남해안 26 왜성 중 유일하게 한 곳만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천왜성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순천 왜성을 쌓은 인물이 육군사령관인 “우끼다히데이”와 수군 사령관인 “도도 다카도라”로 나온다. 그러면 “산도”는 수군 장수이므로 “도도 다카도라”가 된다. 그는 칠천량해전,남원성전투,명량해전에 모두 참가를 했다.

그는 명량해전에서 120척의 전선중 60척에 해당하는 왜수병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되며 다른 왜장의 전선까지 합치면 120척은 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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