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55A4> 샹티이 프랑스어: Chantilly | |||||
국가 | |||||
주 | 오드프랑스 | ||||
데파르트망 | 우아즈(Oise) | ||||
면적 | 16.19km² | ||||
인구 | 10,740명[1] | ||||
인구밀도 | 660명/km²[2] | ||||
시간대 | UTC+01: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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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파리 대도시권에 속한다. 파리 중심부에서 북북동쪽으로 38.4km에 있다.2. 지형
샹티이는 파리 분지와 우아즈강의 지류인 노네트강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로 원래 이 곳은 개간지와 초원이었다. 현재 이 초원에 경마장이 위치해 있다. 또한 퇴적 석회암 고원에 위치해 있어서 채석장이 위치해 있었다. 이 곳에서 나온 돌로 샹티이의 건물이 만들어졌고, 2차대전 당시 공습 대피소로 사용되기도 했다.3. 역사
샹티이는 원래 늪지대였다. 하지만 왕의 포도밭을 책임지던 가이 4세가 이 일대에 영지를 받으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샤토를 중심으로 몇 개의 작은 마을이 흩어져 있었지만 프랑스의 명문가인 몽모랑시 가문이 샹티이를 다스리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73년 부르봉 왕실의 일원이었던 콩데 공 루이 2세가 도로를 건설하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이어서 샹티이를 다스렸다. 콩데 공 루이 2세의 손자인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는 그랑 에퀴리(Grandes Écuries)라는 왕실 마구간을 만들었다. 이걸 계기로 샹티이는 유명한 말 생산지로 유명해졌고 이는 나중에 이 일대에 경마장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후반 왕자들은 샹티 레이스[3]와 도자기를 만드는 등 경제 활동을 더욱 발전시켰다.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콩데 공작은 도망갔고 주인이 없자 혁명 정부는 이들의 땅을 매각하였다. 이 때 영국의 사업가 크리스토프 포터의 매각되었는 데, 그는 새로운 영국식 기법을 이용해 만든 캘리코 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다시 부르봉 왕실이 복위되자 샹티이의 주인이었던 루이 조제프 콩데 공작이 다시 인수하였다. 19세기 샹티이는 귀족과 예술가의 놀이터였고 경마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1859년 샹티이에 기차역이 세워지면서 경마가 시작되면 20,000명의 손님들이 샹티이 경마장을 방문하였다. 경마장 주변에는 많은 마구간이 순종 말을 훈련시키는 데 전념하는 경마 경제가 활성화 되었고 로스차일드 가문을 위시한 유럽의 유력 가문들이 샹티이 일대에 빌라와 샤토를 지었다.
1차 대전 당시 국경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이 후퇴해서 샹티이를 독일군이 점령하였다. 하지만 6일 뒤에 다시 프랑스군이 탈환하였다. 제1차 마른 전투 당시 조제프 조프르장군이 샹티이에 있는 그랑드 콩데 호텔을 인수해 프랑스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915년 12월 6일 부터 8일까지 협상군의 군사 계획을 세우는 샹티이 회의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916년 12월 총사령부는 샹티이 근처에 위치한 보베로 이동하였고 샹티이는 전선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들어섰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독일에서 가져온 말들을 위한 수의학 병원으로 썼으며, 400마리에 달하는 독일 말들의 서식지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연합군의 폭격 대상이 되었으며, 폭격으로 고가교가 파괴되기도 했다.
4. 경마
샹티이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말훈련장으로 약 100개의 훈련용 마구간에서 2,620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이는 파리 경주마의 70%를 차지할 정도이다. 또한 프랑스 경마를 총괄하는 프랑스 갤럽이 소유하는 마구간도 위치해 있으며, 이 마구간에는 60명의 정규직 직원과 30명의 파트 타임 직원이 근무하며, 1,900헥타르에 달한다.롱샹 경마장과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샹티이 경마장은 샹티이가 프랑스 경마의 본고장이라고 명성을 안겨 준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래 된 역사를 지녔다. 1834년 문을 연 샹티이 경마장은 1879년 유명 건축가 오노레 도메가 증개축을 하였으며 1886년 경마장의 소유주였던 오말레 공작 앙리가 샹티이 성과 함께 프랑스 학술원에 기증함으로서 국가 소유가 되었다.
현재 경마는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주로 열리며 6월 첫째주와 둘째주에 열리는 조케 클럽 경기(Prix du Jockey Club)와 디안 경기(Prix de Diane)에서 우승하면 받을 수 있는 조케 클뤼브상(Prix du Jockey Club), 디안상(Prix de Diane)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서 알아주는 상이기도 하다.
- 조케 클럽 경기 (Prix du Jockey Club) : 1836년에 시작된 전 세계에서 오래된 경마 대회 중 하나로 프랑스 더비라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마 대회로 매년 6월 첫째 주 샹티이 경마장에서 열린다. 3세의 수말만 참가할 수 있는 그룹1(G1) 경기이다.
- 디안 경기 (Prix de Diane) : 1843년에 시작된 프랑스의 대표적인 경마 대회로 프랑스 오클리라고도 불린다. 매년 6월 둘째주에 열리며 3세의 암컷 말만 참가할 수 있는 그룹1(G1) 경기이다.
5. 샹티이 성
▲ 샹티이 성 |
▲ 살아있는 말 박물관 |
샹티이 관광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할 수 있는 성으로 이 곳만 봐도 샹티이를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1560년 이탈리아 전쟁과 프랑스 종교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안 드 몽모랑시가 세온 성으로 1632년 몽모랑시 공작이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였던 콩데 공 루이 2세가 상속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 중 성은 파괴되었지만 부르봉 왕가가 복위하자 다시 원래 소유주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루이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프랑스에는 제3공화국이 들어섰다. 제3공화국 초반 프랑스 정계는 공화파, 정통왕당파, 오를레앙파가 싸웠고 오를레앙파의 수장이던 오말레 공작 앙리는 프랑스에서 쫓겨날 위기에 쳐해졌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조건으로 유언장에 샹티이 영지와 그의 대규모 미술품 컬렉션을 프랑스 학술원에 기증하겠다고 적었고, 강제 망명은 철회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하자 샹티이 성은 국가 소유가 되었다.
- 콩데 미술관 (Musée Condé) : 오말레 공작 앙리의 컬렉션이 주축인 미술관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인 라파엘로 산치오 3점을 비롯한, 외젠 들라크루아, 귀도 레니, 산드로 보티첼리, 니콜라 푸생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콩데 미술관의 부속 건물인 쁘티 샤토 도서관에는 1,500권 이상의 사본과 17,500권의 도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채색사본으로 유명한 베리 공작의 풍요로운 날들이 가장 유명하다. 오말레 공작이 자신의 컬렉션을 기증하면서 성 안의 모든 소장품을 외부로 옮기지 말고 원본 그대로 유지하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콩데 미술관의 소장품들은 다른 곳에 전시될 일이 없다.[4]
- 그랑 에퀴리(Grandes Écuries) : 1719년 콩데 공작이었던 루이 앙리가 지은 마구간으로, 그는 자신이 말로 환생할 거라고 믿었고 자신이 말로 환생할 때 어울리는 거주 공간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래서 매우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현재 이 곳은 살아있는 말 박물관(Musée Vivant du Cheval)이 위치해 있으며 1,200여 점의 그림, 드로잉, 조각품,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물은 승마, 마차 운송, 예술, 역사, 말 건강, 승마 장비와 같은 말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고 실제로 살아있는 말 31마리가 관람객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말에 대한 대중의 교육을 촉진하고 있다. 매일 3~5번 정도 마장마술을 보여주며, 한달에 한번 정도는 대형 승마 쇼가 열리기도 한다.
[1] 2020년 1월 기준.[2] 2020년 1월 기준.[3] 프랑스 샹틸리 지방에서 생산되는 전통적인 수공예 레이스. 보빈 레이스의 일종으로 능형의 망 조직에 꽃바구니나 과일 따위의 무늬를 넣은 형태로 고전적이고 여성스럽다.[4]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도 피렌체에 자신의 유산을 기증하면서 메디치가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 다는 조건을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