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09 20:44:35

서굿 마셜

서굿 마샬에서 넘어옴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영웅들 & 아이콘들 부문 #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990614_400.jpg
에멀린 팽크허스트 헬렌 켈러 로자 파크스 서굿 마셜 에드먼드 힐러리
텐징 노르가이
무하마드 알리 마릴린 먼로 마더 테레사 빌리 그레이엄 이소룡
찰스 린드버그 재키 로빈슨 미군 펠레 안네 프랑크
빌 윌슨[1] 안드레이 사하로프 체 게바라 다이애나 스펜서 하비 밀크
같이 보기: 지도자 & 혁명가 부문, 과학자 & 사상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건설자 & 거인 부문
{{{#!folding [각주 보기] }}}}}}}}}

[1]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의 설립자

미합중국 연방대법관
서굿 마셜
Thurgood Marshall
파일:thurgood marshall 2.jpg
<colbgcolor=#00001b><colcolor=#f2ba37> 출생 1908년 7월 2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사망 1993년 1월 24일 (향년 84세)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다
학력 링컨 대학교 (철학 , 미국문학 / B.A)
하워드 대학교 (법학 / LL.B.[1]) (-1933년)
경력 제 2 연방 순회 항소법원 판사
(1961년 10월 5일1965년 8월 23일)
법무부 송무차관
(1965년 8월 23일 - 1967년 8월 30일)
미국 연방대법관
(1967년 10월 2일1991년 10월 1일)
1. 개요2. 생애
2.1. 변호사 시절2.2. 인종분리 교육과의 계속된 싸움2.3. 연방 항소법원 판사 시절2.4. 법무부 송무차관 시절2.5. 이후
3. 대중 매체

1. 개요

미국변호사, 연방 대법관. 1967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 연방 대법관을 지냈으며,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관이었다.

볼티모어/워싱턴 서굿 마셜 국제공항에 이름이 붙었다.

2. 생애

1908년 7월 2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볼티모어는 오늘날에도 흑인 인구 비중이 매우 높은 도시로, 지역구 연방 하원의원 두 명 중 한 명이 흑인일 정도다. 부모는 양쪽 모두 흑백 혼혈인 물라토였으며,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는 모두 해방된 흑인 노예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본래 이름은 증조할아버지가 지어준 ‘서러굿(Thoroughgood)’이었지만, 이름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나중에 ‘서굿’으로 줄여 사용하게 되었다.

192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펜실베이니아주의 흑인 대학인 링컨 대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철학과 미국 문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에는 메릴랜드 대학교 볼티모어 캠퍼스의 로스쿨에 지원했지만, 당시 흑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교 차원의 인종분리 정책으로 인해 입학을 거부당했다. 결국 마셜은 워싱턴 D.C.에 있는 명문 흑인 대학 하워드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해 법학을 공부했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하워드 대학교 로스쿨 재학 시절 당시 부학장이었던 찰스 해밀턴 휴스턴을 만나 법으로 인종차별에 맞서 싸워야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하워드 대학교는 흑인들의 하버드 대학교라고 불리는 곳으로 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가 학부를 졸업한 학교이기도 하다.

2.1. 변호사 시절

이후 볼티모어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지만, 수익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무료 법률 활동에 바쳤기 때문이다. NAACP 볼티모어 지부를 통해 본격적인 민권운동에 참여했고, 1935년에는 과거 자신처럼 메릴랜드 대학교 볼티모어 캠퍼스 로스쿨 입학을 거부당한 도널드 머레이(Donald Murray)의 소송을 맡으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건은 메릴랜드주 순회법원에서 시작되었고, 재판부는 머레이의 손을 들어주며 “인종을 이유로 한 입학 거부는 위헌”이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이후 메릴랜드 대학교 측은 항소했지만, 주 최고법원인 항소법원에서 기각되며 판결은 확정되었고, 메릴랜드 대학교의 인종분리 정책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마셜은 훗날 이 사건이 연방 대법원까지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만약 대법원이 이 사건을 심리하고 동일한 판단을 내렸다면, 인종분리 정책 폐지는 훨씬 더 앞당겨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2] 또 한 인터뷰에서는 이 소송을 맡은 이유에 대해 회고하며 “나를 떨어뜨린 놈들에게 앙갚음하려고 그랬지”라며 웃기도 했다.

1936년, 뉴욕으로 건너가 찰스 해밀턴 휴스턴과 재회해 NAACP의 특별고문 보조로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에는 미주리 대학교 로스쿨이 흑인 로이드 게인스를 입학을 거부한 사건인 Missouri ex rel. Gaines v. Canada 소송에 참여하게 됐다. 이때는 1896년 연방 대법원이 인종분리 교육 원칙을 확립한 Plessy v. Ferguson 판례를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게인스가 백인과 동등한 교육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대법원은 “백인에게 주립 로스쿨이 있다면, 흑인에게도 동등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판결하며 게인스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3]

1939년, 휴스턴이 워싱턴으로 복귀하자 그 후임으로 NAACP의 특별고문으로 승진했고, 곧이어 독립 조직인 법률방어 교육기금(LDF)의 운영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때는 법적 소송은 물론 자금 모금, 조직 관리, 대외 홍보까지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며 조직을 이끌었다. 특히 남부의 주요 도시에서 흑인과 백인 교사 간 급여 차별 소송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1945년까지 수많은 소송에서 승소하며 남부 전역의 급여 격차를 철폐했고, 이 과정에서 전설적인 민권 변호사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마셜은 형사사건 피고인을 위한 변호에도 적극 나섰으며, 연방 대법원에서 총 32건의 민권 소송을 맡아 이 중 29건에서 승소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백인 전용 경선 제도를 폐지한 Smith v. Allwright(1944), 주간 버스 내 인종분리를 금지한 Morgan v. Virginia(1946), 인종 제한 부동산 계약을 무효화한 Shelley v. Kraemer(1948) 등이 있다.

또한 1939년부터 1947년까지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이사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을 정당화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밝혔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전시 외교정책에 반대한 극우 인사 32명을 선동죄로 기소한 1944년 재판에 대해서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비판하는 등, 자유권 보호에 있어서도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

2.2. 인종분리 교육과의 계속된 싸움

1945년 이후로는 인종분리 교육과의 싸움을 다시 시작하는데 흑인과 백인 학교의 물리적 교육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런 분리 교육이 불러온 근본적인 교육 격차에 초점을 맞춘 전략을 구상했다. 덕분에 1948년 드디어 연방 대법원까지 사건을 올려(Sipuel v. Board of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Oklahoma 사건) 승소를 얻어냈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은 원고 에이다에게 로스쿨 교육의 기회를 보장해야한다고 판시하면서도 여전히 백인 전용이었던 로스쿨에 입학시키라는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서 반쪽짜리 승리에 그쳤다.

1950년에도 두개 사건을 연방 대법원으로 올려 다시 한번 도전에 나섰고, 흑인 학생에 대한 차별과 열악한 흑인 학교 시설을 이유로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판결 이후 적용되던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 원칙을 여전히 공식적으로 폐기하진 못했다.

이후로는 대학교보다는 초·중등학교의 분리 교육 문제에 집중하면서 델라웨어, 워싱턴 D.C., 캔자스, 사우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에서 각각 공립학교의 인종분리 교육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고, 연방 대법원은 이 다섯 사건을 묶어 심리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전설적인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이다. 처음 소를 제기하던 1952년에는 남부 출신으로 인종분리 제도에 옹호적인 프레드 빈슨이 연방 대법원장이었기 때문에 과연 NAACP가 변호하는 원고 손을 들어줄지 애매했지만, 1953년 대법원장이 얼 워런으로 교체되면서 기회를 맞게 됐다.

당시 송무차관 출신이자 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존 W. 데이비스와 대법원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됐는데 화려헌 언변을 자랑하던 데이비스와 달리 마셜은 담담한 말투로 변론을 하며 화제를 모았고, 1954년 얼 워런이 이끄는 연방 대법원이 8-0으로 공립 교육의 분리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판시하면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 판결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서 최소한 공립학교에서 흑백 인종분리 교육은 철폐됐다.

마셜은 이 판결에 환호하면서도 더 급진적인 결정이 나오지 않은걸 아쉬워했다고 전해지는데, 바로 전국에서 인종분리 교육을 철폐하는 기한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 그래도 이후 버지니아주를 비롯해 여러 주에서 이 판결을 뒤집으려는 시도를 여러차례 저지하면서 활약했다.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케냐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하기도 했다.[4]

2.3. 연방 항소법원 판사 시절

그리고 1961년 9월 23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서굿 마셜을 제2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지명했다. 미국 흑인의 권익을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정치적 부담은 최소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당시 제2연방항소법원은 뉴욕, 버몬트, 코네티컷을 관할하며 미국 내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항소법원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었다.

케네디는 약간 편법을 사용해 휴회 중 임명 카드를 사용해 마셜을 항소법원 판사 자리에 앉혔고, 덕분에 10월 23일 곧바로 취임 선서를 할 수 있었다. 대통령이 미국 헌법 제2조 제2항에 따라 휴회 중 임명을 한 경우 정식 인준 절차를 최대 1년까지 미룰 수 있기 때문. 케네디의 이 판단은 정확했는데 실제로 임명 이후에도 남부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반발은 끊이지 않았기 때문.

이로 인해 정식 인준까지 8개월 넘게 지연됐고, 상원 법사위 소속의 소위원회는 인사청문회를 일부러 여러 차례 미뤘다. 오죽 보다 못한 뉴욕 출신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인 케네스 키팅이 소위원회가 마셜에게 편향된 태도를 보이며 부당하게 시간을 끌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을 지경. 당시 소위원회는 남부 분리주의 성향의 민주당 의원 두 명이 포함된 세 명으로 구성돼 있었다.[5]

더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인사청문회가 열리긴 했지만 1962년 5월부터 8월까지 이어진 청문회에서 이 인종주의자 의원들의 거친 공세에 직면했다. 대다수가 그저 정치적 의도가 짙은 질문들이었다. 결국 전체 법사위가 소위원회를 건너뛰기로 결정하고 9월 7일 표결을 강행했으며, 11대 4로 지명안을 통과시키고 본회의로 송부했다. 이어진 본회의에서도 5시간의 격론 끝에 찬성 56표, 반대 14표로 인준이 확정되었고, 1962년 9월 11일, 정식으로 제2연방항소법원 판사가 될 수 있었다.

재판부에 있던 동안 마셜은 총 98건의 판결문을 대표로 작성했는데, 그 중 단 한 건도 대법원에서 뒤집히지 않았다. 이 외에도 보충 의견 8건, 반대 의견 12건을 남기며 활발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1964년 Angelet v. Fay 사건에서는, 과거 대법원이 내린 “불법적으로 수집된 증거는 사용할 수 없다”는 판례가 과거 사건들에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다수 의견에 반대했다. 소수의견을 적시하면서 마셜은 “헌법에서 보장한 권리는 상황에 따라 제한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같은 해 United States v. Wilkins 사건에서는, “같은 범죄로 두 번 처벌받을 수 없다”는 이중처벌 금지 원칙이 연방뿐 아니라 주 법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판단했고, 1965년 People v. Galamison 사건에서는,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시위에 참여한 민권운동가들에게 유죄를 인정한 판결에 반대하면서, “평화시위는 처벌받아선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2.4. 법무부 송무차관 시절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지명으로 마셜이 법무부 송무차관에 지명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제 마셜이 대법관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봤다. 존슨 대통령은 특유의 The Johnson treatment를 활용해 남부 상원의원들에게 압력을 넣어 마셜의 인준을 막지 못하게 했고, 상원 인사청문회는 항소법원판사 지명때와 달리 단 15분 만에 끝났다. 결국 1965년 8월 11일, 상원 본회의에서 초고속으로 인준이 끝났다.

송무차관으로 일하는 동안, 마셜은 대법원에서 총 19건의 사건을 직접 변론했고, 그중 14건에서 이겼다. 훗날 마셜은 이때를 두고 “내가 맡았던 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리였고, 어쩌면 최고의 직업이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어쩌면 가장 활발하게 활약하며 명성을 쌓았던 민권변호사 시절이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1966년 Harper v. Virginia 사건에서는, 돈을 내야만 투표할 수 있도록 만든 법은 잘못됐다고 주장했고, 대법원도 그의 손을 들어줬다. 같은 해 있었던 유명한 미란다 원칙 판결(Miranda v. Arizona)과 관련된 또 다른 사건에서는, 체포된 사람에게 항상 미란다 원칙을 설명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정부 측 입장에서 “꼭 그런 건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외에도 1965년에 제정된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헌법에 맞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마셜은 두 건의 중요한 사건에 정부를 대표해 나서서 적극적으로 변호했고, 모두 승소해 유색인종들의 투표권을 보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2.5. 이후

존 F. 케네디 행정부가 집권하자 1961년, 연방 항소법원의 판사가 되었다.

1965년에는 린든 존슨 대통령에 의해 미국 법무부의 송무차관으로 오르고, 법무부장관 직위도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는 성사되지 않았고, 대신 1967년에 톰 C. 클라크의 후임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존슨이 마셜에게 송무차관[6] 취임을 설득하며 내뱉은 발언이 유명하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시오? 송무차관 자리에 깜둥이(Nigger)가 앉아있는 걸 사람들이 보면 뭔 낯짝을 하게 될지 궁금하단 말이오!"라고 마셜 앞에서 질러 버린 것. 마셜은 린든 존슨과 사적으로도 거의 불알친구 수준으로 친한 사이였는데 만날 때마다 평소 자기네들이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 X새끼, X해버릴 새끼." 뭐 이런 식의 뒷담화 수다를 떨었단다.

1991년에 대법관 자리에서 퇴임하고[7], 1993년 1월 24일에 고향 메릴랜드의 베데스다에서 별세하였다. 원래 마셜은 이른 퇴임을 바라진 않았지만 닉슨-레이건 시대를 거치면서 연방 대법원에 보수 성향 판사가 다수가 되었고, 특히 1년전 함께 진보 성향으로 함께 대법원을 이끌어온 윌리엄 J. 브레넌 대법관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고립감을 느낀 영향이 크다고 한다.

1929년 비비언 버리[8]와 결혼하였으나 1955년 사별하였고, 이후 시실리어 수얏[9]와 결혼하였다. 비비언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서굿의 후손은 수얏과의 사이에 얻은 자식들이다.

장남 서굿 마셜 주니어는 1956년생으로 변호사이다. 차남인 존 윌리엄스 마셜은 1958년생으로 관료로 일했다. 서굿 마셜도 나이 쉰이 되어 얻은 자식들인데, 장남인 주니어도 2008년에 결혼하여 아들 둘을 늦게 얻었다.

3. 대중 매체

  •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대체역사 모드인 TNO에서도 린든 존슨이 대통령이 된 경우, 대법관을 임명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가 있는데 이중 진보파 대법관을 임명할 경우 등장한다.

[1] 당시에는 법무박사 학위였으며 1960년대 이후로는 J.D.로 변경되었다. 현재에는 미국에선 쓰이지않는 학위이며 국제적으로 보면 법학학사로 쓰이는 국가들이 존재해서 헷갈릴 수 있다.[2] 실제로는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선고를 통해서야 인종분리 교육이 위헌판결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물론 마셜은 이 사건에도 청구인 올리버 브라운측의 변호인으로 합류해 활약했다.[3] 당시 흑인을 위한 주립 로스쿨이 별도로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종분리 원칙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백인만의 입학을 받는 주립 로스쿨 역시 위법이란 판결이다.[4] 케냐는 1963년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했다.[5] 덕분에 민주당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를 인준하는 것을 공화당이 찬성하고 민주당이 반대하는 이상한 상황이 됐다.[6] Solicitor General. 미국 연방정부의 대표 변호사라고 봐도 되며, 연방대법원 청사에 따로 사무실까지 주어지는 자리이다. 그만큼 당대 최고의 법률가가 보임되며, 당연히 연방대법관 후보 0순위로 거론된다. (엘레나 케이건도 송무차관-대법관 테크를 탔다.)[7] 후임자는 역시 흑인인 클래런스 토머스. 다만 마셜과 성향은 정반대인 강경우파이다.[8] 1911년생으로 민권 운동가로 살았다. 폐암으로 사망하였다.[9] 1928년생으로, 서굿보다 20살이 어리다. 하와이 태생으로 필리핀계 미국인이며 민권 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활동하다 2022년 11월 28일 숙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