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 판결 | |
사건 명칭 | 올리버 브라운 외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외 Oliver Brown, et al.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et al. |
판례번호 | 347 U.S. 483 |
접수일 | 1952년 12월 9일 |
선고일 | 1954년 5월 17일 |
재판관 |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 및 8인 |
판결 | 수정헌법 14조에 의거, (인종에 따른) 공립 교육의 분리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inherently unequal) |
다수의견 | 워런, 블랙, 리드, 프랑크푸르터, 더글라스, 잭슨, 버튼, 클라크, 민튼 (만장일치) |
We conclude that, in the field of public education, the doctrine of "separate but equal" has no place. Separate educational facilities are inherently unequal. Therefore, we hold that the plaintiffs and others similarly situated for whom the actions have been brought are, by reason of the segregation complained of, deprived of the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guaranteed by the Fourteenth Amendment.
그러므로 공립 교육에서 ‘분리하되 평등’이라는 원칙은 더 이상 존재할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그러므로 원고 및 이러한 차별로 인해 차별을 받아 수정헌법 14조에 의해 보장된 공평한 권리의 의회를 박탈당한 다른 이들의 의견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공립 교육에서 ‘분리하되 평등’이라는 원칙은 더 이상 존재할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그러므로 원고 및 이러한 차별로 인해 차별을 받아 수정헌법 14조에 의해 보장된 공평한 권리의 의회를 박탈당한 다른 이들의 의견을 인용한다.
1. 개요
1954년에 내려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 피부색에 따라 학생들의 교육을 분리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내용이다. 흔히 'Brown v. Board of Education'으로 약칭한다. 인종차별 문제 개선에 큰 공헌을 한 판결로, 당시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분리하되 평등하다(Seperate but equal)' 관념이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에 적용되는 것에 대해 '분리된 교육시설 그 자체가 불평등'하다며 만장일치로 위헌 판결하였다. 이는 종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의 폐기였다.2. 배경
당시 미국에서는 학교조차 흑인 전용과 백인 전용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는 이른바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s Ferguson, 1896) 재판의 판결에 의거한 것이다. 이 재판의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고 할 수 있는데 피부색을 이유로 분리시켜 교육을 하더라도 제공 시설이 동등한 한 수정헌법 14조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지금 시각에서 보면 말 그대로 개소리지만 당시에는 ‘합리적인’ 판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말이 ‘공평한 시설의 제공’이었지 흑인 학교의 시설이나 제공 서비스는 백인 학교보다 열악했으며 흑인 학생들은 이런 조치로 인해 상당한 심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1]
3. 재판의 시작
브라운 가족. 올리버 브라운과 그의 아내 리올라(Leola) 브라운, 린다 브라운과 여동생 테리 브라운
한편 캔자스 주의 토페카 시에 살던 흑인 용접공 올리버 브라운(Oliver L. Brown, 1918 – 1961)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이 중 큰딸인 린다 브라운은 당시 3학년이었는데 학교에 가기 위해서 매일 아침마다 6블록을 걸어 버스 정류장까지 간 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1마일이나 떨어진 먼로 초등학교(Monroe Elementary)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근처에는 걸어서 7블록이면 도달하는 섬너 초등학교(Sumner Elementary)가 있었다. 브라운은 당연히 자신의 아이가 섬너 초등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토페카 교육위원회는 이를 거부했는데 이유는 린다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섬너 초등학교는 백인 전용 초등학교였다. 이에 브라운은 같은 흑인 부모 13명(흑인 자녀 20명)과 함께 교육 위원회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었다.
4. 재판 과정
이 사건의 판결이 내려지는 데 2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구술 변론이 처음으로 일어난 1952년에는 인종분리에 퍽호의적이었던 남부인 프레드 빈슨이 대법원장으로 재직해 있었다. 첫번째 구술 변론 이후 대법관들은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고 프랭크푸르터 대법관은 대법관들이 합의에서 의견을 모을 시간을 벌기 위해 빈슨 대법원장이 갑자기 사망하고 얼 워렌이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후인 1953년 12월에 구술 변론을 한 번 더 하자고 제안하였다.합의 과정에서 작성된 노트 및 대법관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다수의견이 나오기 힘들 정도로 대법관들 사이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고 한다. 빈슨 대법원장은 의회 측에서 인종차별 철폐 법안이 발의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인종차별 철폐에 소극적인 입장이었고 리드 대법관은 흑인은 우리들의 문화에 충분히 동화되지 않았으며 주의 권리(states' rights)[2]도 있으니 인종차별은 오히려 흑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클라크 대법관은 인종차별은 괜찮다는 메세지를 주에게 (플레시 사건을 통해서) 보낸 것이나 다름없으니 각 주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잭슨과 프랭크푸르터는 인종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사법소극주의자로서 이미 만들어진 판례를 깨는 데 조심스러워하는 입장이었다.[3] 끝으로 블랙, 더글라스, 버튼, 민튼 대법관은 플레시는 잘못된 결정이니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빈슨 대법원장의 갑작스런 사망[4]으로 취임하게 된 얼 워렌 대법원장은 반대의견이 나온다면 남부에서 반대 의견을 무기삼아 연방 대법원의 결정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이 하나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회의를 지속하면서 협상을 이어나갈 것을 주문하였다. 워렌 대법원장은 인종차별을 합헌 판결할 명분은 흑인들은 열등하다는 믿음뿐이며 자유를 수호하는 기관이라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플레시 판례 폐기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남부의 반발을 막기 위해 보충 의견과 반대 의견 없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보충의견은 법정의견의 힘을 약화시킬 수[5] 있기 때문에 보충의견도 나오지 않길 원하였다. 대부분의 대법관들은 워렌 대법원장의 주장에 대체로 동조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워렌 대법원장은 동료 대법관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법정의견에 반영하였다. 워렌 대법원장이 가장 설득하기 힘들었던 대법관은 사법소극주의자 잭슨 대법관과 인종차별 철폐에 반대한 리드 대법관으로, 다섯 달에 거친 치열한 협상 끝에 보충의견을 쓰겠다고 주장하던 잭슨 대법관과 반대 의견을 쓰겠다고 주장했던 리드 대법관까지 설득에 성공해 우여곡절 끝에 대법관 전원 만장일치 의견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5. 영향
이 기념비적인 판결은 다른 사회적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더 자세한 것은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문서 참고.이 재판에 청구인 측 변호인으로 참여한 서굿 마셜은 이후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 대법관이 되었다.
[1] 당시 미국의 정치계 및 사법계 쪽에서 일하던 관료들은 이걸 별로 좋아하진 않았는데 인종차별이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종 분리로 인해 자신들의 세계적 이미지가 추락할 수 있다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당시는 냉전 와중이었고 이는 소련 측에 좋은 꼬투리가 될 수 있었다. 일례로 연방 판사 윌리엄 O. 더글라스(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에도 참여함)가 1950년 인도에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받은 질문이 '왜 미국에서는 흑인들에 대한 사적제재를 묵인하는지(Why does America tolerate the lynching of Negroes)'였다고 한다.[2] 미국은 연방국가이기 때문에 주 정부도 연방 내에서 일종의 독립적인 정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주의 권리라는 표현은 연방 대법원의 인종차별 금지 판결에 반발하는 과정에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표현이기도 하다. 마틴 루터 킹도 그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서 이를 언급한 바 있다.[3] 특히 로버트 잭슨 대법관은 일본계 미국인 수용소 캠프를 승인한 행정명령 9066호를 합헌 판결한 악명 높은 코레마츠 대 미합중국 사건에서 강한 어조의 반대 의견을 썼을 정도로 인종차별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4] 빈슨의 완고한 반대에 짜증이 잔뜩 나 있었던 프랑크푸르터는 그의 죽음을 두고 "내가 최초로 본 신이 실존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The first solid piece of evidence I've ever had that there really is a God.)"라고 말하기도 했다.[5] 보충의견은 대체로 나는 법정의견에 동조는 하지만 말을 좀 더 추가하고 싶다는 취지의 의견이기 때문에 법정의견으로부터 집중을 분산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