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nt State shootings
(May 4 massacre, Kent State massacre)
총을 맞아 쓰러져 있는 학생 |
대치 중인 학생들과 주방위군 |
1. 개요
1970년 5월 4일 미국 오하이오 주 켄트에 위치한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오하이오 주방위군이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하던 비무장 학생 시위대에 집단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2. 배경
켄트 주립대학교의 문장. |
3. 전개
"어떤 젊은이가 '야, 실탄이야!' 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서는 그 젊은이가 '하느님 맙소사! 이 소녀가 맞았어요!'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총에 맞았던 그 소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소녀의 재킷 겉에는 붉은 점이 찍혀 있었고, 입에선 피가 쏟아져 내렸다."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526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 사실을 알게 된 반전운동 측 대학생들은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하버드 대학교, MIT, UC 버클리를 비롯한 미국의 유명한 대학들에서 반전 집회가 일어났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켄트 주립대학교에서도 2천 명 이상이나 되는 대학생들이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을 규탄하는 반전 집회를 열었다.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발생한 반전 항의 집회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졌고 학생들이 교수들의 집무실을 점거하는 집회 양상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또 교내 ROTC 건물이 방화로 전소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건 하루 전인 1970년 5월 3일에는 현직 공화당 보수파 오하이오 주지사 짐 로즈는 학생운동권이 나치 돌격대, 공산주의자, 자경단보다 더 악랄하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526
1970년 5월 4일 오하이오 주의 미국 주방위군 병력은 실탄을 장전한 개인 화기로 무장하고 켄트 주립대학교의 교정을 포위했다.[1] 방위군은 후퇴하는 것 같았지만 학생들을 포위하고 있던 G 분대가 돌아서서 주차장 주변에 있던 학생들을 향해 13초 동안 발포해 4명이 죽고 9명이 부상당했다. 총에 맞아 죽은 한 여학생의 아버지는 "내 딸은 불량배가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4. 영향
이 사건 이후 백악관에는 많은 항의 방문이 이어졌고 시민 및 학생운동 단체 대표들 또한 이를 규탄했다. 일주일 후 워싱턴에선 15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결국 닉슨 대통령은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게 되었지만 계속되는 학생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급급했고 학생들의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분노를 유발시켜 전국적으로 400만 명의 대학생 및 고등학생이 동맹 휴학에 들어가면서 나라가 뒤집어졌다.하지만 이것은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만의 일이었고 반공주의에 젖어 있던 기성세대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 듯하다. 당장 사건 다음 날 갤럽 여론조사에서 58%가 학생들의 잘못이라고 대답했고 주방위군의 잘못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1%에 지나지 않았다. 켄트 주립대생들이 시위를 더이상 못하게 총에 맞아 더 죽었어야 한다는 폭언이 쏟아지는가 하면 일부 학생들은 자기 가족에게 절연당했다.[2]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서 상당수 학생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탈하고 끝까지 운동을 이어간 사람들은 그렇게 고립당한 끝에 과격화되거나 지하화되어[3] FBI 지명수배자가 되는 등 인생이 망했다. 일본의 전공투가 무너진 과정과 거의 같다.
다만 닉슨 행정부도 경찰의 발포와 캠퍼스의 소요사태에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캠퍼스 불안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스크랜턴 위원회)를 만들어 대학 소요사태의 해결책을 모색했다. 위원회는 발포가 정당하지 않았고 전쟁의 지속이 폭력적 학생운동을 야기한다는 결론을 내었다.
2006년 조선일보는 명백한 국가 폭력인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의 반전운동이 철퇴를 맞은 것을 두고 "폭력 시위가 줄어든 계기"라고 높이 평가했다. #
5. 참고 문헌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