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0:52:22

서윤홍

前 대한민국 대법관
서윤홍
徐潤鴻 | Seo Yoon-hong
파일:서윤홍.jpg
<colcolor=#fff><colbgcolor=#005596> 출생 1928년 1월 3일[1]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신당동[2]
사망 2018년 10월 4일 (향년 90세)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영남대학교병원
본관 달성 서씨 (達城 徐氏)[3]
재임기간 대법관 (이영섭 대법원장 제청 / 박정희 대통령 임명)
1979년 4월 16일 ~ 1980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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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596><colcolor=#fff> 배우자 정정숙
자녀 서동우[4], 서명지, 서동환
학력 각남공립보통학교 (졸업 / 1회)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졸업 / 14기)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사회생활과 / 학사)
약력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제2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전주지방법원
대전지방법원
대구지방법원
대법원 판사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3년
최종 계급 대위 (대한민국 육군)
병과 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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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약력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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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대법관.

2. 약력

3. 생애

1928년 1월 8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신당동에서 태어났다.

각남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 경북고등학교와 같은 명문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집안 사정이 넉넉치 않아 학비를 낼 수가 없었고, 1942년 나라에서 지원하는 관립학교인 대구사범학교에 제14기생으로 진학했다. 관립학교라 등록금과 학비를 전액 면제받을 수 있었고, 추가로 월 20원씩을 지원받았는데, 당시 면사무소 서기의 월급이 18원이었다고 한다.

1947년 대구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심상과 정교원(제2종 훈도) 자격증을 받으면서 청도국민학교 훈도로 임용되었다. 이후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갖추고자 1949년 9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사회생활학과(현 일반사회교육과)에 진학했다.[5] 전시 상황에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고,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 부산대구로 이전해있던 상황이었는데, 대구로 피신해있던 고려대학교 법대에서 법률 강의를 경북대학교 강의와 병행해 들으면서 사법고시를 공부했다.

대학 재학 중 1951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와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행정과[6]에 합격했고, 법관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법원 시보를 거쳐[7] 전시에 군법무관 7기 대위로 임관해 6사단에서 근무했고, 이후 휴전이 되자 예편하여 1956년대구지방법원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1975년 전주지방법원장으로 발령받기 이전까지 20여년간 대구에서 근무했다.


[1] #. 족보에는 1927년 12월 11일생으로 나와 있는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928년 1월 3일이다.[2]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신당리[3] 감찰공파 23세. # 족보[4] 제26회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16기를 수석 졸업한 뒤 법무법인 태평양 설립 초기에 합류했다. 당시 연수원을 1등으로 졸업하면 판사로 임관하던 관례를 깬 그의 선택은 법조인 가족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부친 서윤홍의 반대로 집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고 한다.[5] 이후 1953년 3월에 졸업했다.[6] 사법과에서 평균 60점 정도를 득점했고, 행정과에서는 국사를 선택해 98점을 득점해 양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제2회 행정과와 사법과 합격자 수는 각 38명이었다.[7] 사법연수원이 없었던 당시에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사법관시보로 임명하여 1년간 법원과 대한민국 검찰청에서 실무수습을 받게 한 후 법관 또는 검사로 임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