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22:57:58

성복 전투

파일:성복 전투.jpg

1. 개요2. 배경
2.1. 초나라의 성장2.2. 진문공과 초성왕의 만남2.3. 임박한 대결
3. 양측의 전력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城濮戰鬪
파일:성복전투.jpg
춘추시대인 기원전 632년 북방의 신흥 강국 진(晉)나라와 남방의 신흥 강국 초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맞붙은 첫 번째 전투이다. 진나라의 군주 진문공 희중이가 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둠으로써 제환공 강소백을 이은 두 번째 패자가 되었다.

2. 배경

2.1. 초나라의 성장

황하 문명이 탄생한 이래, '중국'의 범위는 황하 유역에 한정되었다. 서주견융의 침략으로 수도 호경이 함락되고 낙읍으로 천도하면서 춘추시대가 개막된 뒤에도 이러한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여러 제후국들이 힘이 약해진 천자국인 동주를 대신하여 중원을 이끌 지도세력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나, 중원에 속하지 않은 타지인들은 중화와는 아무 상관없는 오랑캐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양상은 장강 유역에서 초나라가 등장하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초나라는 중원의 제후국들로부터 '형만'(荊蠻)[1]이라고 무시당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국왕을 칭한 뒤 주변 나라를 복속시키며 세력이 강성해지더니 서서히 북상하여 황하 유역의 제후국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제후국들은 날로 강성해지는 초나라를 더 이상 무시하지 못했고 제환공이 나서서 초나라를 견제하게 되었다.

기원전 671년 형인 장오 웅간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초성왕 웅군은 국력을 착실히 쌓아나갔고, 기원전 659~657년 연달아 동주와 동성인 정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기원전 656년, 제환공이 제후를 모아 한수 변에 이르러 동주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꾸짖고 과거 서주의 소왕이 남방을 순시하다가 한수에서 죽은 일에 대해 묻자 초나라는 한수의 신령에게 물어보라면서 도발했다. 제후 연합군은 더 깊숙이 진군하여 소릉에 이르렀고 초나라는 굴완을 보내 초나라의 특산품을 동주에 조공하는 것으로 타협하여 양측의 대치는 전투없이 끝나게 되었다.[2] 이후 제환공이 죽고 그의 다섯 명의 아들들이 군위를 두고 다투면서 패업을 이어나가는데 실패하자 초성왕은 중원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환공이 죽고 제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과거에 환공으로부터 은밀히 태자 소(제효공)을 후계로 세워달라는 요청을 받은 송양공은 제후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태자 소를 군주로 세웠다. 이런 활약으로 인해 송양공은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업을 이루려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기원전 639년 가을, 송양공이 회맹을 주관하고 초나라를 불렀다. 이에 초성왕은 분노하여 회맹에 참여한 후 송양공을 사로잡아 모욕을 주고, 감금한 뒤 몇달 후에 풀어주었다.

기원전 638년 여름, 치욕을 당했음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송양공은 끝까지 패업을 이루겠다고 결심하며 초나라를 섬기는 정나라를 정벌했다. 이에 초성왕은 송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를 구원했다. 양군은 11월 기사일에 홍수(泓水)에서 전투를 벌였다. 초나라군은 강을 건너지 못했고, 송나라군은 이미 전열을 갖춘 상태였으나 양공은 인(仁)을 행하겠다면서(?) 초나라군이 도강을 완료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전에 증(鄫)나라의 군주를 희생으로 바친 것과는 대조되는 행동으로 인을 행해야 할 때는 행하지 않고, 행하지 않아야 할 때는 행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초군이 전열을 갖춘 후 송군이 공격했지만 대패하고 양공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뒤이어 11월 9일, 초성왕이 친히 정나라에 찾아오자 정문공은 성곽 바깥까지 나가서 영접하고 태묘에서 잔치를 크게 벌였으며, 초성왕에게 구헌례[3]를 드렸다. 여기에 수백 가지의 음식과 변두를 제공했으니, 이는 주나라 천자를 대하는 예법이었다.[4] 홍수 전투의 승리로 초나라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중원의 제후국들은 남방의 초나라가 북진할까봐 두려워했다.

2.2. 진문공과 초성왕의 만남

그러던 기원전 637년 겨울, 진(晉)나라의 공자 희중이가 오랜 세월 방랑하다가 초나라를 찾아왔다. 초성왕은 중이를 한 나라의 임금을 대하는 예의로써 대접했고, 중이의 언사도 매우 겸손했다. 두 사람은 금세 친해져 며칠간 정겨운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마친 후 열린 연회에서 초성왕이 중이에게 술을 권하며 물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돌아가서 군위에 오르면 그때 무엇으로써 과인에게 보답하겠소?"

중이가 반문했다.
"여자와 구슬과 비단은 넉넉히 가지고 계실 것이며, 새털과 뿔과 가죽은 원래 초나라 소산이니, 군왕은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초성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과인에게 보답하고 싶은 것이 없지 않을 테니 한 번 말해보시오."

중이가 답했다.
"만일 군왕의 도움을 받아 이 몸이 진나라의 군위에 오른다면 초나라와 함께 우호를 두터이하고, 백성이 태평을 누리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병거를 거느리고 대왕의 군사와 서로 대하게 된다면, 우리는 3사(三舍: 90리)를 물러서겠습니다."

연회가 끝난 뒤 초나라의 방계 왕족인 성득신(자는 자옥)이 분노하여 초성왕에게 간했다.
"오늘 중이의 대답은 너무 무례했습니다. 그가 군위에 오르면 틀림없이 우리의 은공을 저버릴 것입니다. 왕께서는 일찌감치 중이를 죽여 버리십시오."

초성왕은 단칼에 거절했다.
"중이는 천성이 어진 사람이며, 또 그를 시종하는 사람들도 다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이다. 이는 하늘이 그를 돕는 것인데, 어찌 우리 초가 하늘의 뜻을 어길 수 있겠느냐."

성득신이 재차 간했다.
"왕께서 꼭 중이를 죽일 수 없으시다면 호언, 조쇠 등 그의 신하 몇 사람만이라도 우리 나라에 감금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호랑이에게 날개를 붙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초성왕은 이번에도 거부했다.
"그 신하들은 잡아 둘지라도 내가 그들을 부릴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공연히 원망만 살 따름이다. 중이에게 덕을 베풀고 원망 대신 어진 것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 계책이다."

그후 중이는 초나라에서 서방의 강국인 진(秦)나라로 이동했고, 매형인 진목공 영임호의 도움에 힘입어 진(晉)나라의 군주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진문공이다.

2.3. 임박한 대결

기원전 633년,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송나라가 진문공에게 구원을 청했다. 진문공은 초나라에게 귀부한 위나라조나라를 먼저 치기로 했다. 기원전 632년, 진문공은 극곡을 원수로 삼고 3군의 병사를 조련하도록 했다. 이후 위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조나라를 치려고 하니 길을 열어달라고 하자, 위성공은 단칼에 거부했다. 진나라군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위나라를 공격하여 오록을 점령했다. 이후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성을 포위해 4일만에 공략했다.

한편, 송나라의 도읍인 수양을 포위하고 맹공격을 퍼붓고 있었던 초성왕은 위나라의 오록 땅이 진(晉)나라군에게 공략당했다는 급보를 접했다. 이에 초성왕은 본대에서 부대 한 개를 빼어서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위나라를 구원하러 떠났고, 성득신에게는 남은 병력으로 송나라를 계속 공격하게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진문공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초성왕은 진문공의 신속한 움직임에 크게 놀라며, 일단 군대를 중성 땅으로 이동시켰다.

그후, 초성왕은 진나라와의 대결에 힘을 집중하기로 하고, 대치 상태에 있었던 제나라와 강화를 맺으며, 송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던 성득신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그러나 성득신은 승전하지 못하면 어떠한 처벌도 받겠다는 각오를 전하며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성득신이 성을 맹렬히 공격하자, 송성공은 나라의 보물 장부를 문윤반과 화수록에게 줘서 진문공에게 가도록 했다. 두 대신은 그날 밤 줄을 붙들고 성밖으로 내려가 초나라군의 포위망을 뚫은 뒤, 진문공을 찾아가 울부짖으며 구원을 간절하게 호소했다.

진문공은 문윤반과 화수록이 가지고 온 송나라의 예물을 진(秦)나라제나라에 바쳤다. 두 나라는 진(晉)나라와 초나라의 남북 간 싸움에 관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진문공은 패전한 위나라와 조나라의 군주들에게 초나라와 관계를 끊고 진(晉)나라를 섬긴다면 두 나라를 복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성득신이 장수 완춘을 사자로 보내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키면 송나라의 포위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하자, 진문공은 완춘을 구금했다.

그후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사신이 초나라 군영을 찾아와서 성득신에게 화평을 설득했다. 그러나 성득신은 부하 완춘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화평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초나라가 구원하려고 했었던 위나라와 조나라의 사신이 찾아와서 초나라와 절교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전하자, 배신감을 느낀 성득신은 격노했다. 그는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사신을 돌려보낸 뒤, 초성왕에게 증원군을 요청했다. 초성왕은 동•서 이광군 중에서 약병(弱兵)인 서광군 1,000명을 보냈다. 이에 성씨 종족이 자진해서 성득신을 돕고자 합세했다.

성득신은 송나라의 도읍인 수양성의 포위를 푼 뒤 진(陳), , , 등 4개국의 군대까지 합쳐 진(晉)나라의 군영을 향해 출진했다. 당시 병사한 극곡을 대신하여 원수에 오른 선진은 초나라군이 접근해오자 적이 오랜 전투로 지쳤으니 속전속결로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호언이 간언했다.
"주공께서는 망명하던 당시 초나라 임금에게 '다음날 중원에서 싸우는 경우엔 3사(三舍: 90리)를 물러서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싸운다면 이는 신의를 잃는 것이 됩니다. 주공께서 중원 사람들에게 한 번도 신의를 잃은 일이 없었는데, 이제 초나라 임금에게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진문공은 이에 동의하여 90리를 후퇴해 성복에 이르러 군영을 세웠다. 이후 성득신으로부터 화평 제의를 거절당한 데 반감을 품은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군대가 도착했고, 초나라군에게 시달렸던 송나라의 군대도 뒤이어 도착했다. 이후 성득신이 이끄는 초나라군이 성복으로 진입하여 싸움을 걸면서, 중원의 패권을 둘러싼 성복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성복 전투에 투입된 양측의 병력은 기록이 미비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진(晉)나라군이 전차 700승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나라군에서는 선진이 원수를 맡아 중군을 이끌었고, 극진이 중군 보좌를 맡았으며, 상군은 호언이 통솔하고, 호모가 보좌했다. 하군은 난지가 통솔했고, 서신이 보좌했다. 한편 초나라군에서는 성득신이 중군을 통솔했고 자서가 좌군을 이끌었으며, 자상이 우군을 이끌었다.

4. 전투 경과

파일:성복전투경과.jpg
초나라군은 성복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 성득신의 명령에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초나라 자상 휘하의 우군은 눈앞에서 호피를 뒤집어 쓴 진나라군의 말들이 뛰쳐나오는 걸 보고 놀란 말들이 뒤로 도망치는 바람에 혼란에 빠져 버렸다. 진나라 하군의 서신과 백을병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하여 채나라 공자 인을 도끼로 쓰러뜨리고, 초나라 장수 투발의 뺨에 화살을 정통으로 꽂았다. 투발은 화살이 꽂힌 채 그대로 달아났고, 초나라 우군은 허물어졌다.

한편, 진나라 상군의 호모는 휘하 부대에게 퇴각 신호를 보냈고, 하군을 통솔하던 난지는 수레에 섶을 실어 거짓으로 달아났다. 초나라 자서 휘하의 좌군은 이를 보고 추격했으나, 언덕 너머에 숨어있었던 진나라군의 급습으로 전열이 허물어졌고, 선진과 극진이 중군을 이끌고 초나라 좌군을 협공해 단숨에 궤멸시켰다. 성득신은 좌• 우군이 모두 패배하자 중군에게 공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지만, 진나라군의 추격이 워낙 거세서 진영마저 내준채 패주했다. 진나라군은 초나라 군영에 들어가 3일 동안 쉬면서 대승을 기뻐했다.

참패한 초나라군은 연곡 땅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군대를 정비할 수 있었다. 이후 성득신의 아들 성대심이 신성으로 가서 초성왕에게 패전을 보고했다. 초성왕은 격노하여 성득신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성대심이 연곡으로 돌아와 부친에게 결과를 보고하자, 성득신이 길이 탄식했다.
"설령 왕께서 나를 용서해 준다 해도, 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이번 싸움에 자식을 잃은 신, 식 두 고을의 늙은 부모를 대하겠느냐."

성득신은 일어나 초성왕이 있는 곳을 향해 두 번 절한 후 검을 빼들어 스스로 목을 쳐 죽었다. 진문공은 성복 전투 후 정문공에게
"성득신이 살아 있는 한 중원은 편치 못할 것이다."
라며 성득신에 대한 경계를 보였다. 그러다가 성득신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진문공은 크게 기뻐했다.
"정나라가 복속한 것은 기쁘지 않으나, 성득신이 죽은 것은 기쁘구나."

초성왕은 뒤늦게 성득신을 죽게 한 걸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후임으로 위여신을 영윤으로 삼고, 병력을 수습하여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성복 전투는 진나라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성복 전투는 중원으로 진출하려던 초나라의 야심을 꺾어버린 결정적인 전투였다. 초나라는 패전의 여파로 흔들렸고, 초성왕은 성복 전투로부터 6년 후인 기원전 626년 아들인 웅상신의 반란으로 자결을 강요당해 죽었다. 반면 진문공은 초나라를 물리치면서 명실상부한 두 번째 패자로 우뚝 섰고, 이후에도 진나라의 군주들은 패자를 대대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중원에 진출하려는 초나라의 야망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두 나라는 35년 뒤 중원의 필(邲) 땅에서 맞붙게 되었다.


[1] '형'은 '초'의 이칭으로 형만은 '형나라 야만인'이라는 뜻이었다.[2] 이에 포숙아는 관중에게 초나라의 죄는 왕을 자칭한 것인데, 어째서 조공을 바치지 않은 죄만 묻냐고 따졌다. 그러자 관중은 이미 초나라가 왕을 칭한지 3대가 되었고, 전면전에 들어갈 경우 양측 모두 피해가 막심할 것이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3] 주객 사이에 아홉 번 술잔을 드리는 예[4] 이때 초성왕은 정문공의 부인이자 자신의 누이동생이었던 문미의 두 딸을 취해 돌아갔다. 즉 근친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