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7-05 23:18:55

세나(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세나(리그 오브 레전드)

1. 장문 배경2. 죽은 자들의 목소리3. 구원

1. 장문 배경

세나가 빛의 감시자가 되기까지, 그 여정의 맨 처음은 어둠에서 시작되었다. 검은 안개에서부터…

세나가 검은 안개를 처음 마주한 것은 어릴 때였다. 먼 곳에서 일어난 해로윙 때문에 난파한 배가 세나의 고향 섬 해안가로 밀려온 것이었다. 잔해 속에 있던 검은 안개가 생명체와 접촉하자 꿈틀꿈틀 일어났고, 뒤이어 망령들이 쏟아져나왔다. 세나와 섬 주민들은 근처에 있던 어느 빛의 감시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공격 이후 검은 안개는 기이하게도 세나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세나는 검은 안개라는 저주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검은 안개의 공포는 끊임없이 세나를 뒤쫓았고, 어둠은 마치 살아 있는 불꽃에 이끌리는 죽어가는 나방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어둠이 언제 자신을 습격할지, 세나는 결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둠이 자신을 습격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더 끔찍했다. 그림자가 눈에 보일 때마다 그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세나를 구해준 빛의 감시자는 유리아스라는 이름의, 오랫동안 파수꾼 일을 해온 무뚝뚝한 남자였다. 유리아스 역시 왜 검은 안개가 혼자 지내던 소녀를 따라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세나가 살아남을 것이며, 그러려면 안개와 싸우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나는 유리아스를 따라 빛의 감시자가 되었다. 빛의 감시단은 검은 안개의 근원지인 축복의 빛 군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유서 깊고 성스러운 결사단이었다. 세나는 유리아스에게 받은 유물석 총의 사용법을 익혔고, 자신의 영혼을 빛으로 쏘아내는 법을 터득하여 어둠을 물리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세나는 유리아스의 다소 퉁명스러운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고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점점 더 편해졌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늘 거리를 두었다. 사람들과 가까워졌다가 검은 안개가 다시 나타나면 그 사람들만 상처를 입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세나는 한 군데에 너무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다. 세나와 유리아스는 자신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결국은 검은 안개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결국 유리아스마저 죽자, 세나는 이제 어느 누구와도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세나는 유리아스의 마지막을 그의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데마시아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데마시아에서 그녀는 유리아스의 아들 루시안을 만났다. 루시안은 유리아스를 위한 철야 추모제에 같이 가게 해달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사실 세나는 루시안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껏 쌓아올렸던 마음의 벽이 이렇게 완강하고도 유머 감각과 애정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소용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루시안이 있을 자리는 빛의 감시자이자 세나의 곁이고, 세나가 있을 자리는 루시안의 곁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란히 빛의 감시자 일을 할수록 두 사람의 연대감은 깊어만 갔고, 세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쌓은 마음의 벽은 무엇을 들여놓지 않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들이느냐에 그 가치가 있음을. 하지만 루시안은 세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를 저주에서 풀어주고 싶다는 욕망도 커져만 갔다. 결국에는 그것만이 루시안이 집중하는 일이 되었고, 그 욕망만이 그의 눈에서 총으로 뿜어져나오는 빛이 되었다. 세나는 이전에는 세상을 사랑으로 보던 루시안이 이제는 세상을 슬픔으로 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걱정과 경계가 앞섰다.

어느 날, 치료법을 찾고 있던 세나와 루시안은 끔찍한 악령 쓰레쉬를 마주하게 되었다. 대몰락과 세나의 저주에 얽힌 수수께끼의 해답에 너무나 가까워져 있던 터라, 루시안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세나가 쓰레쉬와 남편 루시안의 사이로 뛰어드는 순간, 쓰레쉬의 사슬이 허공을 가르며 세나에게 날아왔다. 그 끝에 달린 낫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루시안의 얼굴에 떠오른 비통한 표정을 목격하는 것이었다. 세나는 마지막 숨을 짜내어 루시안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고 자신이 목숨을 잃었음을 안 순간, 세나는 오히려 아주 희미하나마 희망을 느꼈다. 지금껏 평생 동안 검은 안개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검은 안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세나는 검은 안개를 타고 쓰레쉬의 랜턴 속 어둠으로 들어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세나에게 걸린 저주가 세나가 구원을 받을 유일한 기회가 된 셈이었다.

루시안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안식을 주려고 몇 년을 방황하는 동안, 세나는 망령의 감옥을 탐색했고 자신에게 걸린 저주의 근원이 바로 생명임을 알게 되었다. 세나의 몸 속에서 반짝이는 생명의 불꽃은 그 누구보다도 밝았다. 그래서 해로윙으로 인한 잔해와 처음 조우했을 때 검은 안개가 세나를 파고든 것이었다. 바로 그때 세나는 강력하면서도 절대 스러지지 않는 어느 영혼과 접촉하여 비정상적인 생명력을 받았다…

검은 안개가 절대로 놓지 못하는 것은 바로 생명이었기에.

세나는 이 힘을 이용하여 검은 안개를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고, 랜턴 속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있던 검은 안개의 힘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세나가 해방시킨 영혼들 중에는 대몰락의 원인과 세나에게 걸린 저주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사랑에 대해 오래 전 소멸된 지식을 알고 있는 빛의 감시자들도 있었다.

루시안이 부서진 권총을 랜턴에 박아넣어 랜턴 속 영혼들이 겪는 고통을 끝내려 했을 때, 세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세나는 다른 영혼들에게서 끌어낸 검은 안개로 감싸인 채 탈출했다. 세나는 저주 때문에 죽었지만, 또한 저주 때문에 살아 있기도 했다. 이제 세나가 휘두르는 유물석 총은 죽어간 빛의 감시자들의 무기를 모아 벼려서 만든 것으로, 빛과 어둠을 같이 내뿜을 수 있게 되었다.

세나는 더 이상 검은 안개를 피해 도망칠 필요가 없고, 검은 안개 속 영혼들의 괴로움과 번뇌를 잘 알고 있다. 세나는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 영혼들의 검은 안개를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들여 영혼들을 해방시키고, 어둠으로 어둠을 처단한다. 망령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죽음을 감싸안을 때마다 자신이 싸우는 존재와 비슷해지지만, 자신을 감염시킨 생명 덕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세나와 루시안의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어 살아남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세나의 거듭남이 가져온 결과를 직면해야 한다. 세나는 두 사람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랜턴 속에서 알게 된 비밀의 지식이다.

몰락한 왕을 찾아라.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제지하라…

2. 죽은 자들의 목소리

파일:senna_color_splash.jpg

우리 섬에는 이런 말이 있지. '바람은 우리 숨을 빼앗아야만 말할 수 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유물포를 등에 멘 채 아이오니아 마을에 처음 도착한 날, 날 맞이했던 검은 안개에 대해서 듣고 싶나?

안개는 말도 빼앗지. 그 안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도.

나도 그 비명을 지르던 자 중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살아 있어.

루시안과 난 배에서 내려 아이오니아 땅을 밟았어.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지. 그는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안의 벽을 허물었어. 그는 끈질기게 내 안으로 파고들려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지.

내 몸을 감싼 보호구와 그 아래 깔린 온갖 규칙들을 뚫고 들어오는 건 바로 '사랑'이었어.

"당신이 위를 맡고 내가 아래를 맡을까?" 내가 묻자 그가 고민했고, 그의 손에서 느껴졌던 온기는 곧 식기 시작했어. 잠시 그는 앞에 서 있는 나를 보지 않았어. 그의 눈에는 그가 구하고자 했던 여자, 저주받아 항상 도망 다니는 여자가 보였던 거지. 그는 그 여자를 향해 날아오는 낫을 봤어.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그 여자의 눈을 바라봤어.

"내가 아래로 갈게." 그의 대답과 동시에 다른 것들은 침묵 속에 남겨졌어. 그리고 그의 손은 총으로 향했어. "세나..." 기억의 무게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지.

"괜찮아." 난 부드럽게 말했어. 나도 그 여자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지평선에서 어둠이 소용돌이쳤고, 그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들이 돌로 변한 마을에 드리워졌어. 마을은 폭우로 물에 잠겼고, 그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었지. 그 어둠 속 어딘가에 빛이 있었어. 우리를 여기로 부른 또 다른 파수꾼이었지.

그쪽으로 가려면 전투를 치러야 했어.

마을로 향하는 산길은 수 세기 동안 몰아친 폭풍우 때문에 거의 사라져 있었고, 단단한 바위들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 바람에 모자가 휘날렸고, 살갗에 세차게 부딪히는 물보라가 느껴졌지. 마치 세상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위험에 대해 경고하며 막아서는 것처럼 느껴졌어.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소름 끼쳤던 건 마을에 울려 퍼진 포효였어.

내가 받은 저주였지. 안개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 누구보다 나한테 먼저 달려들 게 뻔했지.

"몸을 숨겨야겠군."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사이 죽음의 색깔을 띤 검은 지평선에서 영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 내가 숨을 쉬자 나에게 다가왔지.

난 무기를 꺼냈어.

죽어 간 파수꾼들이 남긴 유물포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움직였어. 이전에도 수많은 이의 손을 거쳤던 무기였지. 남자와 여자, 아버지, 자매들...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진 이들이었어. 난 무기를 쥐며 두 총열에서 빛나는 그들의 빛을 쥐었어.

덩굴 같은 안개가 날 덮치며 그 안의 망령이 모습을 드러냈어. 충격에 휘청거린 난 바위가 있는 아래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가까스로 발을 딛고 일어섰어. 섬을 둘러싼 파도 소리와 빗소리에 영혼들의 비명이 뒤섞이며 천둥이 굉음을 냈지. 하지만 그 뒤에 번쩍인 빛은 번개가 아니었어.

그건 내 유물포가 내는 빛이었어. 총탄에 맞은 망령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지.

유물포를 쏘려면 신중히 집중해야 했어. 안개와 싸우기 위해 내 모든 정신력을 쏟아부어야 했지. 나는 단 한 순간도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어.

망령을 하나 불태울 때마다 또 다른 망령이 나타났어. 마을에 거의 다 와 갈 때쯤에도 망령들은 끊임없이 날 향해 다가왔지.

그리고 난 그 악령들을 신성한 빛으로 인도했어.

"아나발, 거기 있어?" 유리아스가 파수꾼들이 모인 자리에 날 데려갔을 때 그를 만난 적이 딱 한 번 있었어. 파수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유리아스는 무언가 때문에 겁에 질려 그들을 모두 불러 모았지. 그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절대 말해 주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날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

사실 그들이 모를 때가 더 비참했어. 내 보호구 너머를 들여다보려 하지만 결국 보호구가 존재하는 이유만을 알아냈을 때가 말이야.

난 계속해서 망령들과 맞서 싸우며 마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어. 망령들은 섬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석조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며 재빠르게 움직였어. 하지만 이런 혼돈 속에도 질서가 있었지. 망령들이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어. 그들은 원하는 게 있었지. 생명, 영혼, 나... 그 외에 뭔가 다른 것을 말이야.

"아나발!" 내 목소리만 간신히 들리는 폭풍우 속에서 다시 소리쳤어.

"여기예요! 서둘러요!"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어. 여자아이의 목소리였지. 곧 어둠 속에서 그 아이의 빛이 내게로 다가왔어.

아나발의 제자, 다오완.

어둠 속에 있는 다오완 앞에는 누군가 쓰러져 있었어. 유물석으로 만든 아나발의 검이 다오완의 얼굴에 희미한 빛을 드리웠지. 다오완은 죽은 스승을 지키느라 집중한 기색이 역력했어.

아나발이 다오완에게 넘겨주었는지, 다행히 검은 무사했어.

"마을 주민들을 내보내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 아직도 목소리가 들려요. 마을 주민들이 분명해요..." 다오완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고통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으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어. "아직 저분의 목소리가 들려요..."

다오완은 손이 하얘질 정도로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지. 난 유물포를 등에 메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다오완의 어깨 너머로 마을 지하 묘지의 입구가 보였어. 그곳은 망령으로 가득했어. 난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지. "우리 모두 말이야."

안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곳에 있었어.

지하 묘지는 수차례 범람한 홍수 때문에 깎여 만들어진 곳이었어. 마을을 뒤로하고 지하로 향하는 도중에도 폭풍우가 몰아쳐 사방의 벽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지. 하지만 우리가 지하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에 빠져 죽는다고 해도 차오르는 바닷물이나 폭풍우 때문이 아닐 거란 걸 난 알고 있었어.

우리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검은 안개였지. 마치 파도처럼 몰려와 우리를 맞이하려는 안개. 일렁이는 포효로 우리의 빛을 삼키는 존재.

우리 마을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이 들려왔어. 내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죽음을 목격했을 때 떠나보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리고 메아리치는 내 목소리가 들렸어. 죽음이 처음으로 날 찾아왔을 때 루시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도 보였지. 위에서 아직도 죽어 가는 사람들이 토하는 분노와 공포가 내 가슴을 아프게 때렸어. 알 수 없는 언어로 고통스레 울부짖는 그 소리는 나도 너무나 잘 아는 것이었지.

그때 망령들이 지하 묘지에서 튀어나왔어. 그들은 자신들이 가하고자 하는 고통 속에 갇혀 괴로워했어. 살아 있는 자들이 아무리 크게 비명을 질러도 망령들의 비명을 잠재울 순 없었지. 그리고 내가 가진 빛이 아무리 밝게 빛나도 어둠이 돌아왔을 때만큼 그들에게 해를 입힐 순 없었어.

그래서 난 죽음보다 앞서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했지.

내 부름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어. 난 다른 이들에게 있는 안개를 내 쪽으로 끌어올 수 있었지. 죽음의 기운이 내 몸의 생명력을 앗아가기 위해 달려드는 게 느껴졌어. 안개가 날 붙잡으면서 원래 붙잡고 있던 영혼들을 하나씩 놓아주기 시작했어. 모두 이곳에 끌려온 자들이었지. 위에서 죽은 자들이었어. 순간 아나발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어.

결국 하나의 흐릿한 형체만이 남았어. 그 존재는 천천히 깨어나는 중이었지. 그 형체는 잠시 공중을 맴돌더니 날 바라봤어.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 대신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지.

난 날 망령으로 바꾼 죽음의 장막을 통해 속삭였어. "아니. 넌 말할 자격이 없어. '듣기만' 해."

난 안개를 총구에 밀어 넣고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그 근원지 쪽으로 발사했어. 어둠과 어둠이 충돌하는 순간 내 안의 빛이 반짝였지. 생명은 날 포기할 줄 몰랐어. 안개의 마지막 흔적이 날 떠나자 몸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어. 난 크게 숨을 들이쉬며 털썩 주저앉았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터널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어.

"뭐, 항상 일어나는 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난 여전히 숨을 고르고 있었어.

"몰락한 왕이 누군갈 찾으려고 지하 묘지에 들이닥치기라도 한 거야?" 루시안이 물었어.

"그런 셈이지." 난 다오완 쪽을 쳐다봤어. 그녀는 여전히 내게 검을 겨눈 채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

우리 섬에는 이런 말이 있어. '바람은 우리 숨을 빼앗아야만 말할 수 있다.'

검은 안개의 포효 속에서 망령들의 목소리가 들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그들의 목소리를 찾아 주기 위해서야.

3. 구원

파일:176db384aadf4a3f.jpg

세나는 헉하며 깨어났다. 차가운 밤공기에 입김이 보였다. 땀에 젖은 팔다리와 목과 등에 온통 모래가 덮여 있었다. 문득 마음속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빌지워터로 가야 해.

세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외딴 강둑을 지나 흐르는 홀넥강의 검은 물결을 지켜보았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직감이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세나는 자신의 육감과 느낌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배웠다. 직감을 따라 떠나야 할 때였다.

잠든 루시안이 몸을 뒤척였다. 그가 몸을 돌리면서 세나가 덮고 있던 휴대용 이불을 끌어당겼다. 살갗이 드러나자 미풍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세나는 온기를 찾아 발가락을 모래에 파묻었다.

이상하게도 해로윙이 잠잠해서, 세나와 루시안은 발로란 남동부를 향해 북쪽으로 길을 떠나 녹서스 국경 근처까지 상류로 항해했다. 그들은 항상 겪는 폭풍에서 벗어나 둘만의 짧은 휴식을 누리며 수년만의 재결합을 만끽할 기회를 가졌다. 곱게 닳은 망토를 걸친 듯 안락한 휴식이었다. 재결합 이후 처음으로 찾은 둘의 피난처에서, 세나의 직감이 그녀를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한 느낌을 삼키며, 세나는 눈을 감고 마음속을 살폈다. 그녀의 생각이 틀렸기를, 그토록 잔인한 직감을 따르지 않을 방법이 있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여전했다.

세나는 밤하늘에 넓게 펼쳐진 어둠을 바라보며 무수한 별의 시선을 느꼈다. 별 하나하나가 구원을 기다리는 비참한 영혼처럼 보였다. 그들을 구해주지 않는 세나를 묵묵히 지켜보는 양 느껴졌다. 그녀는 루시안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망칠 권리가 없었다.

루시안은 이해해줄 거야.

가죽으로 장정된 장서를 베고 자던 루시안이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휴대용 이불 속에서 몸을 뒹굴더니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신음이 커졌다. 세나가 그의 어깨를 흔들자 루시안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팔꿈치를 짚고 일어섰다.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한 루시안이 세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꾸던 악몽에 나오던 여인, 쓰레쉬의 랜턴에서 구하지 못한 연인, 수년간 랜턴에 갇혀 고문당한 영혼이 그녀와 겹쳐 보였다. 루시안은 다시 한번 깊은숨을 들이쉬었고, 이내 안도감이 눈빛에 찾아들었다.

"미안해." 루시안이 세나에게 이불을 건네며 말했다.

두 사람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남빛과 자줏빛으로 빛나는 경계가 새벽이 다가옴을 알렸다.

루시안에게 말해야 해.

마지못해 세나가 루시안을 돌아보았다. "떠날 시간이야."

"이제 막 익숙해지려는 참이었는데." 계속 강 저편을 바라보던 루시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빌지워터로."

루시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빌지워터에 해로윙이 닥쳤다면, 우리가 항구에 다다를 때쯤에는 전부 끝나 있을 거야."

아직 시간이 있어.

"지금 출발하면 며칠 안에 갈 수 있어."

"가봤자 시체만 묻어주게 될 거야."

빛의 감시자로서의 책무를 경시하는 루시안의 직설적인 발언에 세나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보이는 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말이 루시안의 본심이 아니라 한순간의 실수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아직 기회가 있어. 분명히 느껴져." 세나가 단언했다.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세나는 모래 위에 놓인 고문서를 바라보았다. 긴 세월을 증명하듯 청동으로 된 걸쇠는 부러졌고 움푹 팬 자국이 나 있었다. "북쪽으로 이렇게 멀리 오는 게 아니었는데. 우리가 경솔했어."

이 고대 필사본은 루시안이 가장 최근에 얻은 전리품이자, 그들이 처음에 이 지역으로 항해해 온 이유였다. 세나가 어릴 적 불가해한 힘을 건드린 날, 비정상적인 생명력의 불꽃이 그녀를 물들였다. 검은 안개는 그 불꽃에 이끌려 지금껏 끈질기게 세나를 쫓아왔다. 루시안은 세나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검은 안개의 마수에서 그녀를 풀어줄 방법을 찾길 기대하며 크렉소르에서 이 책을 구했다. 배에는 이미 그런 책이 수십 권 있었다.

세나는 루시안이 없는 이부자리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루시안이 촛불에 의지해 책을 살피며 그녀 자신도 오래전 포기한 문제의 해답을 필사적으로 찾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루시안이 세나를 돌아보았다. 온기가 돌아온 얼굴에는 후회의 기색이 엿보였다. "몇 달간 해로윙이 없었잖아. 우리 둘 다 잠시라도 쉬었으면 했어."

세나도 한편으로는 현재에 만족했다. 검은 안개가 가져온 참상을 모두 잊고, 밤하늘에서 별만을 볼 수 있길 바랐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었어."

루시안이 무거운 고문서를 들고 일어섰다. 그녀를 한편에 홀로 두고, 둘 사이를 가르는 간극이 벌어지는 듯했다. 세나는 루시안의 손을 꽉 잡았다. "동이 트면 준비하자."

루시안은 다시 모래 위에 앉아 세나와 일출을 바라보았다.
동이 트자 둘은 야영지를 정리했다. 세나는 남은 물자를 좁은 건널 판자에 올렸고, 루시안은 마룻줄을 풀어서 돛을 올릴 준비를 했다. 잔잔한 홀넥강 물결 위에서 배가 흔들리는 동안,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생각에 빠져 말없이 일했다.

세나가 나무 상자를 가져다 비바람의 흔적이 역력한 갑판에 쌓인 다른 물자들 곁에 놓았다. 이곳에 머무르면서 물자 비축량이 많이 줄었다. "빌지워터로 가기 전에 물자를 보충해야겠어."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안을 따라 아래쪽으로 가서 홀드룸에서 식량을 보충하자. 하지만 머드타운에도 정박해야 해."

세나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부흐루 구역에 은제 수류탄을 다루는 대장장이가 있어."

"항구에서 최소 한나절은 보내야 할 거야."

"그곳에 해로윙이 터졌다면 쓰레쉬도 있을 테니까." 루시안의 눈빛이 차갑고 냉정했다.

세나는 바다로 천천히 흘러가는 깊은 강류를 쳐다보았다. 육감이 그녀를 빌지워터로 이끌고 있었지만,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폭풍이 찾아올 때마다 검은 안개는 더욱 먼 곳에 나타났어.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이. 그런데 빌지워터로 돌아올 이유가 뭐지?"

"쓰레쉬가 집처럼 드나드는 곳이니까."

"쓰레쉬가 전부는 아냐." 세나가 의도한 바보다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루시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물통을 열어 한참 물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마개를 천천히 끼워 넣었다.

마침내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 음모를 꾸미는 놈이야. 수많은 영혼이 그놈 랜턴 안에 갇혀서 괴로워하고 있지. 그 영혼들의 조각난 정신이 어떤 집착으로 물들었을지 누가 알겠어?" 루시안은 턱을 악물고는 시선을 돌렸다. 꽉 눌린 입술이 일자를 그렸다.

세나는 난잡하게 끼워 맞춘 지도들과 기다란 실 여러 가닥으로 장식된 선실 벽을 떠올렸다. 그녀가 랜턴 안에 갇혀있던 동안 루시안이 몇 년이고 검은 안개를 쫓았던 흔적이었다.

증오가 루시안의 눈을 가렸어.

세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단 분노만이 아니었다. 루시안은 검은 안개를 세상에 내려앉은 재해, 정화해야 할 망령을 불러오는 끔찍한 재앙으로 여겼다. 하지만 세나는 랜턴 안에서 다른 길을 보았다. 그녀에게는 비참한 영혼들을 구원해 고통에서 풀어줄 힘이 있었다.

"해로윙을 일으키는 건 몰락한 왕이야. 그자한테는 갈망... 지성이 있어. 분명히 느껴져. 그는—"

뭔가 잘못됐어!

동쪽에서 빛이 번쩍였다.

루시안이 입을 열었지만, 그의 말은 세나에게 닿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육중한 무게가 세나의 가슴을 짓누르는 탓에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는 배의 난간으로 몸을 던졌지만, 그곳에는 난간 대신 루시안의 손이 있었다.

검은 번개가 세나 위로 세차게 내리꽂혔다. 그 충격에 세나는 갑판 위로 떨어졌고, 타는 듯한 통증에 팔다리가 뒤틀렸으며, 뼈가 부러질 듯이 몸통이 경직되고 비틀렸다. 무수한 비명이 합쳐져 세나의 마음을 뚫고 들어왔다.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더욱더 크게 메아리치다, 끝내 온 세상이 눈부시게 빛나는 파편들로 쪼개졌다. 루시안과 배와 해안, 그녀를 제자리에 붙들어줄 닻은 이곳에 없었다.

가학적인 웃음이 정적을 뒤따랐다.
세나의 얼굴에 재가 가볍게 떨어졌다.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번개의 따끔한 감각에 움찔하며, 세나는 번쩍 눈을 떴다. 아직도 마음속에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천천히 생각이 정리되고 전류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메아리치는 웃음소리만이 남았다.

안 돼, 안 돼... 뭔가 잘못됐어... 일어나야 해.

겨우 한쪽 무릎을 짚고 팔로 다리를 받치며 일어났더니 온통 재가 흩날리고 있었다. 용광로에서 터져 나오는 열기처럼 텁텁하고 무더운 공기가 얼굴에 부딪혔다. 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구운 점토 위에서 홀로 비틀댔다. 태양 빛에 금이 간 점토 평원은 아지랑이 뒤편의 황량한 황무지까지 뻗어있었다. 저 멀리 산 셋이 왕관처럼 우뚝 솟아 봉우리에서 연기를 불그스름한 하늘로 내뿜었다.

랜턴 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두려움이 가슴을 옥죄어, 심장이 미친 듯 뛰고 숨이 막혔다. 세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모아 흔들리지 않게 꽉 쥐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냐. 이곳은 랜턴 안이 아니야.

하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을린 황무지, 얼어붙은 동토, 혼란스러운 도시 안 북적이는 거리. 영혼의 감옥 속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고문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아니, 여긴 다른 곳이야.

세나는 의심을 털어내고 눈을 꾹 감았다. "또다시 진실을 부정하지 마." 그녀가 혼잣말로 속삭였다.

랜턴에 갇히고 몇 달인지 몇 년일지 모를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었다.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슬픔과 고독의 순환만을 반복했었다. 세나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한 번 탈출했으니, 두 번도 가능할 터였다. 그녀는 눈을 뜨고 밖으로 통하는 길을 찾았다.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세나가 검은 안개를 불렀지만 대신 연기와 잉걸불이 몰려왔다. 아쉬운 대로 밀려온 대체물이 그녀를 죽음에 싸인 망령으로 바꾸었다. 그녀가 움직이자 주변의 색이 뭉개지며 세상이 흐려졌고, 바뀌는 풍경만큼이나 그 빛깔도 급속히 변하였다.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자 눈앞에 빌지워터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가 알던 빌지워터가 아니었다. 거대한 해로윙에 휩쓸려 파괴된 항구가 보였다. 썩어가는 목재, 점액으로 뒤덮인 석조물, 부패하는 레비아탄의 뼈가 한데 섞여 비틀린 첨탑을 이루었다. 부서진 배들의 갈라진 선체와 수장되었던 관 수백 개가 공중의 괴기스런 혼합체 주변을 둘러쌌다. 잔해 사이로 사람들이 바친 공물이 부유하며 창백한 별빛을 발했다.

세나가 어둠을 내려놓자 몸의 감각을 돌아왔다. 물이 잔뜩 스며든 판자 길의 널빤지가 아래에서 삐걱거렸다. 둑길을 따라 걸으니 좌초된 사냥용 선박이 나타났다. 끝이 동으로 된 뱃머리가 해안가 선술집의 잔해를 꼬챙이처럼 꿰었다.

파괴 현장의 중심에는 여인의 조각상이 있었다. 간청하듯 팔을 높이 올리고, 얼룩덜룩한 얼굴은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다. 반쯤 잊어버린 꿈처럼 기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거센 슬픔의 파도가 세나를 뒤덮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조각상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석제 조각상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하더니 한순간에 잿더미로 부스러졌다.

그자가 찾아냈어!

낯선 공포가 자라나며 도망치길 종용했지만, 세나는 이를 거부했다. 쓰레쉬는 당연히 누구든 찾을 수 있었다. 누구도 쓰레쉬 눈을 피해 숨을 수 없었다. 이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쓰레쉬의 영역이니까. 그녀는 셀 수 없는 고문을 목격했다. 지옥의 간수는 영혼 하나하나와 그들의 고통에서 무한한 즐거움의 가능성을 보았다. 세나는 잿더미를 살펴보았다.

쓰레쉬답지 않아.

느낌이 이상했다. 랜턴 안에서 보낸 몇 년간 이런 것은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쓰레쉬의 능력이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완벽한 비탄을 추구하는 쓰레쉬의 집념이었다.

세나는 빌지워터 만의 검은 물을 내다보았다. 불을 뿜는 산맥이 저 멀리 수평선을 가득 메웠다. 분명 랜턴이 만든 환상일 터였다. 빌지워터 남쪽에는 산이 없었다. 그랬다면 항해할 때 산을 피해 빙 둘러가야 했을 것이다.

문득 어떤 단상이 뇌리를 스쳤다. 세나는 포착한 단상에 주의를 집중했다. 잠긴 문이 열리고 기억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혼자 빌지워터로 가던 중이었다. 아니, 동료가 있었다. 루시안! 밖에서 그가 싸우고 있을 모습이 선했다. 이전에 몇 년이고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랜턴에서 풀어주고자 필사적으로 싸우며 혼자 고통받고 있을 터였다. 그때 루시안은 완전히 무너질 뻔했다.

세나는 광범위한 영역에 그녀의 의식을 퍼트렸다. 근처에서 느껴지는 루시안의 사랑에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더욱 무겁고 절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공황이었다. 단 한 번, 루시안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쓰레쉬가 그녀를 죽였을 때였다.

커지는 두려움을 뒤로한 채, 세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말했다. "루시안... 나 여기 있어."

정적.

다시, 또다시, 몇 번이고 시도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루시안은 그녀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랜턴 안에서도 루시안과 소통할 수 있었는데, 쓰레쉬가 그녀의 목소리를 차단할 방법을 찾은 모양이었다.

절망과 격분으로 몸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감고 오래전에 배운 만트라를 속삭였다. "원치 않는 것은 깎아 내라. 바위만을 남겨라… 원치 않는 것은 깎아 내라. 바위만을 남겨라…"

세나는 새로운 결심을 품고 눈을 떴다. 아직 쓰레쉬가 이긴 건 아니었다.

랜턴 안에서는 자연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랜턴은 고통을 위해 창조된 고대 유물, 결코 변화를 멈추지 않는 왕국이었다. 왕국은 무한히 넓은 듯 보였으나, 세나는 진실을 알았다. 과거에 그녀는 랜턴의 경계를 발견했으며, 균열을 감지하고 벽에 몸을 부딪쳤다.

하늘을 바라보던 중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여긴 랜턴 안이 아냐.

세나는 멈춰서 그때의 기억을 되짚었다. 끝내 받아들이게 되었던 가혹한 진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고픈 마음을 가라앉히고 탐색을 이어갔다. 불타는 봉우리에서 검은 기둥이 솟아오르고, 촉수를 뻗듯 하늘을 그을음으로 더럽혔다. 저 잿빛 장막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

세나는 다시 한번 연기와 잉걸불을 끌어당기며 변신했다. 그녀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빌지워터가 먼 곳의 흐릿한 풍경으로 변했다. 세나가 더욱 높이 날아오르며 바다를 가로지르자, 산들도 더욱 높이 솟아올라 굉음과 함께 증기를 내뿜어 그녀의 진로를 막았다. 쓰라린 구름을 피해 방향을 틀어도, 타오르는 봉우리들은 결코 목표를 놓치는 법 없이 따라붙었다.

어둠이 수평선에 깔렸다. 거대한 안개가 길을 막는 전부를 집어삼키려 했다. 계속 방향을 바꾸는 물결을 피하지 못하고, 세나는 암흑 속으로 뛰어들었다. 폭풍이 사방에서 울부짖고, 셀 수 없는 영혼의 통곡이 맞바람처럼 부딪혔다.

이쪽이 아냐. 되돌아가야 해.

손을 쭉 뻗고 더욱더 위로 날아올랐다. 손아귀 너머에 빛이 반짝이고 랜턴의 경계가 보이자 세나의 의심이 사라졌다. 그런데 빛이 더 밝게 타오르더니 갑작스레 손가락을 쏘았다. 세나는 서둘러 손을 뗐지만, 빛이 닿은 곳에서부터 타는 듯한 고통이 번지며 유령 형상을 경직시켰다. 어두운 기운이 솟구쳐 그녀를 공중에서 묶었다.

세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세나는 단단히 다져진 흙먼지 위로 떨어졌다.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지만, 통증이 그녀를 재로 덮인 매듭처럼 옭아매었다. 세나가 등을 대고 눕자, 축축한 살갗을 타고 흐르는 전류에 몸이 움츠러들고 신음이 나왔다. 통증은 이내 얼얼한 감각을 남기고 사라졌다.

랜턴 안에서 신체적 고문은 없었다. 쓰레쉬는 그렇게 열등한 형태의 고통을 즐기지 않았다. 괴로움의 씨앗은 몸보다는 마음과 정신에서 더 잘 자라는 법이었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랜턴에서 탈출한 벌일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도, 무언가 이상했다.

일어나야 해!

세나는 비틀대며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지며 다시 땅으로 넘어졌다. 구름이 하늘을 온통 가리고, 모든 빛깔을 남김없이 앗아가자 온 세상이 흐릿해졌다.

싸워야 해... 죽고 말 거야!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죽음보다 더한 운명은 여럿 있었다. 그녀는 이미 그런 운명을 몇 년이나 견뎌냈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세나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번에는 어떤 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워졌다. 잠깐 맛본 자유 탓에, 랜턴에 갇혀서 보낼 시간은 전보다도 더욱 황량하며 외롭고 괴로울 터였다.

그 순간, 더더욱 음울한 생각이 떠올랐다.

안 돼! 생각하지 마!

애초에 랜턴에서 탈출한 적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루시안이 끝없이 패배를 되풀이하며 고통받는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버린 정신이 환상을 꾸며낸 거라면? 루시안이 그녀를 고통의 도가니에서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고 믿고 싶은 거라면? 랜턴에서 탈출했다는 믿음은 그저 망상일 뿐일지도 몰랐다.

번쩍이는 깨달음에, 세나는 격노와 절망에 사로잡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게 아니었다. 이 속임수를 엮어낸 자는 그녀가 아니라 쓰레쉬였다.

아냐, 그렇지 않아!

세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헛된 희망을 붙들었다.

일어나야 해!

"싫어." 세나가 관자놀이를 붙잡고 대꾸했다.

싸워야 해!

"아니, 쓰레쉬가 이겼어. 전부 그놈의 계획이었던 거야."

계속 여기 있으면 죽을 거야!

"난 이미 죽었어! 저주받은 유령일 뿐이라고!" 세나가 절규했다. 갈라지는 목소리와 함께 마음속 무언가도 깨져버렸다. 세나는 웅크리며 몸을 작게 말았다. 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네게 준 건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었어, 세나.

세나는 몸을 번쩍 일으켰다. 묵직하고 예리한 비수 같은 말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었다. 이건 그녀의 생각이 아니었다.

세나는 감각이 없는 다리를 개의치 않고 일어나 휘청거리며 말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가. 내 말 들려, 쓰레쉬?!"

웃음도, 자백도,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산들은 멀리 뒷걸음쳤고, 불을 내뿜던 봉우리에는 잿빛만이 감돌았다. 세나는 떨어지는 잉걸불 사이에 홀로 서 있었다. 어두운 기운이 살갗에서 타닥거렸고, 전류가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세나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이게 다인가, 지옥의 간수? 감을 잃었군그래."

세나, 나는 지옥의 간수가 아냐. 하지만 그자의 고문은 알지.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슬픔에 젖은 목소리였다. 세나는 랜턴 안에서 다른 영혼을 만나 서로의 쓸쓸함과 고난을 나눴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누구지?"

정적이 지나고...

친구. 네가 루시안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세나의 목에 쓴맛이 차올랐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지?"

네 삶 전부를 알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려면 네가 날 믿어줘야 해.

"희망을 주시겠다?"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는 웃음이 세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틀렸군. 감을 잃은 게 아냐.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지." 세나는 몸을 돌려 악령의 모습을 찾았다. "네 연극은 끝났다, 지옥의 간수. 순환은 이 자리에서 깨졌어. 모습을 드러내라!"

세상이 활짝 펴지며, 백사와 청록빛 바다 위로 펼쳐진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파도가 그녀의 발과 발목과 무릎을 감쌌다. 내륙 쪽을 쳐다본 세나는 숨이 턱 막혔다. 산맥처럼 늘어선 백사 언덕 뒤에, 잎이 넓은 양치식물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세나가 자란 섬의 토착 식물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나무들 아래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선율에, 난롯가에서 노래하던 어머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세나는 숨을 멈추고 어린 소녀가 숲을 빠져나와 그녀가 오래전 잊어버린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가 누구인지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소녀는 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로 모래 언덕을 찔러대며 해안가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차가운 파도가 세나를 덮쳤다.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그 날의 운명적 아침이었다. 저녁이면 저 천진난만한 아이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세나는 소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기억일 뿐이야, 세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그럼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지? 이것도 속임수인가?"

네게 보여줘야 할 게 있어.

아이의 눈이 반짝이더니 몸을 숙여 모래 속에서 조가비를 주워들었다. 소녀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분홍색 껍질을 쓰다듬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의 바지에는 그런 주머니가 수십 개 있었다. 소녀가 찾은 무수한 보물을 담을 수 있도록, 어머니가 서로 다른 직물과 무늬로 꿰매어 붙여준 것들이었다. 아이는 세나 쪽을 돌아보고 웃음을 지었다.

세나는 머뭇거리다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이는 널 보지 못해.

소녀는 세나를 향해 달려오다,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틀어 세나 옆의 물에 첨벙 뛰어들었다. 세나가 몸을 돌리자 두려움이 그녀를 옥죄었다.

난파선의 잔해가 해변에서 물을 맞고 있었다.

소녀는 부서진 갑판에 뚫린 검은 구멍을 지팡이로 찔러대며 '찾는 사람이 임자'라고 외쳤다. 그 말만 하면 배의 보물을 가질 수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은 채 깔깔댔다.

세나의 손이 땀으로 젖었다. 그녀는 소녀를 잡아채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에 저항했다. 아이가 보지 못하는 위험이 세나에게는 보였다. 검은 안개의 촉수가 난파선에 도사리고 있었다.

"저 아이는 소중한 사람들 모두에게 닥칠 어둠을 자신이 곧 풀어놓으리란 걸 몰라."

하지만 세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개가 몸을 펼쳐 아이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물 밑에서 빛나는 구체가 다가왔다. 수수께끼의 구체에서 나온 빛의 실이 수면을 뚫고 나와 무언가를 찾았다. 구체는 휙 날아가서 소녀의 척추로 스며들었다. 일순간 소녀의 몸이 굳고, 공포와 당황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니?

"보, 보기도 전에 위험이 느껴졌어... 마음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라고 외쳤어."

소녀는 나무 지팡이를 검은 촉수에 내던지고 숲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세나는 자신의 생명을 구했던 경고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구나. 네 목소리였어."

세나 발치의 물이 출렁이더니 빛나는 실 세 가닥이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구불대고 비틀리는 실들이 엮어낸, 성스럽고 찬란한 빛의 형상은 서서히 젊은 여인의 형체를 취했다. 다정함과 사랑이 엿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발하는 광채 탓에 생김새는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다. 가로막던 둑이 무너진 양, 비애와 환희의 파도가 세나를 덮쳤다.

"그 사건은 네 탓이 아냐. 넌 살아 있잖아. 모든 생명을 혐오하는 검은 안개가 널 살려두었을 리 없는데도." 영혼이 세나의 마음을 통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영혼의 말이 세나를 일생 괴롭혔던 중압감을 덜어주었다. 마음이 가벼워지자 그녀는 이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해변에서 죽었어야 했어. 네가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안개 속에서 절규하는 망령들 중 하나가 되었겠지." 세나는 말을 멈추고 숙고했다. "왜 그 사람들이 아니라 날 도운 거야?"

영혼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성스러운 빛에 가려 흐릿한 얼굴에 살짝 미소가 보였다. "나도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지." 영혼의 눈이 세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명은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어."

"하지만 그 후에도 떠나지 않았잖아. 지금껏 검은 안개가 쫓아온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비정상적인 생명력. 네가 그 저주의 정체였어."

"네가 고통을 겪지 않도록 떠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야. 몇 년이고 시도했지만, 도저히 방법을 알 수 없었어." 영혼은 몸을 돌려 물을 내려다보았다. "그 후에는... 어둠을 겁내던 소녀가 불 같은 여인으로, 안개에 맞서 싸우는 빛의 감시자로 성장하는 걸 지켜보았지. 정말 대단한 아이였어."

세나는 기억의 파편을 끼워 맞췄다. 첫날 밤. 그녀의 마을, 그녀의 집.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검은 물결에 쓸려갔던 밤. 살아남은 자들과 그녀 사이를 갈라놓았던 간극. 그들 눈에 깃들었던 공포.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쳤던 몇 년. 그녀를 지켜주려던 이들, 스승 유리아스의 죽음. 그녀 자신이 불러온 저주라 믿고, 공포와 죄책감에서 숨으려 쌓아 올린 벽.

"난 조그만 아이였어. 진실을 알았더라면..."

"내가 간섭할 수는 없었어. 어떤 불청객이 너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네가 알았다면 큰 충격을 받았을 거야." 영혼이 희미한 손을 꽉 쥐며 말했다.

"하지만 실은 간섭했잖아. 등골의 가려움도, 배 속의 뒤틀림도, 마음의 속삭임도 전부 네가 한 일이었어!" 세나가 받아쳤다.

영혼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널 도우려던 것뿐이었어."

"도움? 도와주려던 거라고? 몇 년이나 혼자 고통받게 두었으면서!" 냉담해진 세나의 말소리에 가시가 박혔다. "이제 와서 정체를 드러내는 이유가 뭐야?"

영혼은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눈으로 세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넌 혼자였던 적이 없어, 세나. 지금까지는 장막을 뚫고 네게 닿을 수 없었던 것뿐이야."

세상이 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유황의 바람이 백사와 청록빛 바다를 날려 보냈다. 둘은 여전히 섬 위에 남아있었지만, 물결이 더욱 거세졌으며, 산들은 전보다 훨씬 가까이에 우뚝 솟아있었다. 재가 비처럼 쏟아졌다.

세나는 랜턴 안에서 발견했던 사실과 쓰러진 감시자들에게 배운 비밀, 막 얻은 깨달음에 관해 생각했다. 이 영혼의 존재는 곧 그녀가 죽음과 고통의 길을 걷게 만든 표식이었다. 하지만 랜턴 안에서 목숨을 지켜주고 탈출할 힘을 준 것 역시 '비정상적인 생명력'이었다. 지금도 그 생명력이 그녀를 돕고 있었다. 세나는 그녀의 삶이 이 영혼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마음속 깊이 느꼈다.

세나는 풀리지 않은 의문과 분노 모두 잉걸불이 꺼지듯 소진되도록 두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탈출뿐이었다.

"계속 이곳이 랜턴 안이 아니라고 그랬지. 그럼 여긴 내 마음속이야?"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를 지켜보며 세나가 말했다.

"맞아. 하지만 정말 위험한 건 사실이야. 쓰레쉬의 힘이 널 무너뜨렸어. 그자의 마수는 방방곡곡에 뻗치지만, 당장은 빌지워터가 목표거든."

"그렇담 쓰레쉬가 문제의 핵심이군. 루시안이 맞았어."

"지옥의 간수는 중대한 인물이지. 하지만 그자의 잔인함은... 스스로를 위한 계획에만 쓰임새가 있었어." 영혼이 수평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나는 영혼의 손짓을 따라 산봉우리들로 시선을 옮겼다. 봉우리들이 짙은 어둠 방울을 쏟아내며 우르릉대는 소리가 바다를 메웠다. "지하 묘지에서도, 사원에서도, 먼 해안가에서도 그자를 보았잖니. 네 직감을 믿어." 영혼이 힘없이 웃었다.

"쓰레쉬가 원하는 게 뭐지?"

"더는 자신의 것이 아닌 걸 손에 넣길 원하지. 그자는 쓰라린 마음을 가진 아이야. 혼자 슬픔을 감내하기보다는 세상 모두가 똑같은 괴로움을 겪기 원하는 아이."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어?"

"네가 가장 큰 희망이야. 수년간의 훈련, 네가 가진 힘, 랜턴 안에서 보낸 시간... 이 모두가 널 강력한 무기로 벼려냈어." 영혼은 후회가 가득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매 순간 너와 함께하겠지만... 종국에는 우리가 가진 전부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세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았고, 싸웠고, 죽었어. 하지만 지금도 루시안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이 저주는 내게 선물이야." 루시안은 받아들이지 못했어도, 그녀는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세나는 어깨를 펴고 다시 계획으로 주의를 돌렸다. "빌지워터에 늦지 않게 갈 수 있을까?"

영혼은 대답을 고심하는 듯 보였다. "공격은 이미 시작—"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영혼의 형체가 공포로 굳었다.

검은빛을 발하는 전류가 세나를 꿰뚫었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색이 바랜 하늘이 조여오고, 온 세상이 무너져서 떨어지는 재가 소용돌이치는 동굴로 변모했다. 거센 충격이 한 차례 지나갈 때마다 동굴이 더욱 좁아졌다. 이대로라면 이곳이 그녀의 무덤이 될 터였다.

세나는 비틀리는 몸을 가누려 애쓰며 곁을 살폈다. 영혼도 접힌 몸을 뒤틀고 파르르 떨며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번개가 그 창백한 형상을 꿰뚫고 성스러운 빛을 불태웠다.

"무슨... 일이야?" 세나가 씨근대며 물었다.

"지금도... 쓰레쉬의 공격이 네 몸을 부수고 있어... 그자의 힘을 몰아내야 해."

검은 안개를 만났을 때처럼, 세나는 어두운 기운에 정신를 집중해 그녀의 빛으로 묶은 다음 쏘아내었다. 어두운 기운이 일정한 세기로 흘러나갔다. 하지만 한계점에 이르자 그 힘은 역류하여 세나를 고통 속에 빠트렸다. 그녀가 땅 위로 쓰러졌다.

세나의 힘은 급속히 사라졌지만, 꺼져가는 그녀의 빛 아래에 지금껏 쓰이지 않은 빛의 힘이 느껴졌다. 그 영혼의 힘이었다.

"내가 혼자였던 적이 없다고 했지? 그럼 지금 증명해봐! 네 빛을 집중해서 내 빛에 합치는 거야." 세나가 영혼의 희미한 손을 잡았다.

영혼은 괴로워하면서도 세나를 돌아보았다. "한 번도—"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 테니까." 세나는 고통을 참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둘은 함께 어두운 기운에 맞서 그들의 빛을 방출했다. 한순간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악몽은 눈부신 하얀 빛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세나가 헉하며 일어났다.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도 가슴 속에 여전히 검은 번개가 요동쳤다. 곧 번개는 시원한 아침 공기 속으로 흩어졌고, 그녀는 루시안의 품에 몸을 맡겼다.

"안 돼, 세나... 이번에는 절대..." 루시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를 꽉 붙잡은 루시안의 몸도 덜덜 떨렸다.

"이제... 이제 끝났어... 난 괜찮아." 루시안의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몸의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 후, 세나는 천천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건 뭐야?" 루시안이 당혹감과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물었다.

희미한 빛이 세나의 가슴에서 반짝였다. 그 빛은 꼼짝도 하지 않는 세나를 두고 사라졌다. 아주 작은 기척이라도 찾길 바라며, 그녀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 거기 있지?" 마침내 세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루시안의 목소리가 귀에, 영혼의 목소리가 마음에 울렸다.

세나는 숨을 내쉬고 웃었다.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세나는 루시안을 마주 보고 말했다. "빌지워터로 가야 해.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루시안이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려는 찰나, 세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 "전부 설명해줄게. 하지만 우선은 당장 떠나야 해."

루시안은 내키지 않는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쉰 후, 세나를 일으켜주고 떠날 준비를 했다. 살짝 삐걱대는 배는 이미 출항 준비가 끝나, 강물 위에서 흔들리며 닻을 당기고 있었다. 세나는 새로운 날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동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수면에서 반짝였다.

정말 오랜만에, 세나는 외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