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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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吳)나라 19대 국군 초대 왕 오왕 수몽 吳王 壽夢 | |||
성 | 희(姬) | ||
씨 | 고발(姑發) | ||
휘 | 수몽(壽夢) / 숙고(孰姑)[1] / 승(乘)[2] | ||
아버지 | 거제(去齊)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561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61년 (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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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의 제19대 군주이자, 초대 왕. 고발제번, 고발여제, 고발여매, 고발계찰의 아버지다. 사실상 오나라의 전성기를 만든 인물이라 할 수 있다.[3]2. 생애
오후 거제 36년(기원전 586년), 오후 고발거제가 죽자 고발수몽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나라를 잘 다스려 국력이 증대되어 수몽 대에는 대단히 강성해지기 시작한다.오왕 수몽 원년(기원전 585년), 고발수몽은 주나라에 입조해 간왕에게 하사품을 받았다.
오왕 수몽 2년(기원전 584년) 봄, 고발수몽이 담(郯)나라를 치니 담나라는 오나라에 강화를 청했다. 같은 해 가을 초나라의 대부 신공 무신이 초장 자반에게 한을 품고 진(晉)나라로 달아나 진경공(晉景公)을 섬겼는데,[4] 그가 진경공에게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오나라를 키워줘야 한다고 권했고, 진경공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오나라를 키워주고자 무신을 오나라에 출사시켰다. 그리고 오나라에게 전차전을 하는 법과 중원의 선진 문물을 전수했다. 그리하여 오나라의 국력은 날로날로 신장되었다.
오왕 수몽 3년(기원전 583년), 겨울 진 경공은 패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담나라가 오나라와 화친한 것을 알고 진(晉)나라, 노나라, 제나라, 주(邾)나라 4국이 담나라를 쳤다.
오왕 수몽 5년(기원전 581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쳐서 초나라의 장군 자반을 물리쳤다.
오왕 수몽 10년(기원전 576년), 11월 오나라는 노나라, 진(晉)나라, 제(齊)나라, 송(宋)나라, 위(衛)나라, 정나라와 중지에서 회맹했다.
오왕 수몽 12년(기원전 574년), 서나라, 용나라 사람이 초나라에게 포위당해 패하자 오나라가 소나라를 포위했다. 이때 초나라는 서(舒)나라와 용나라를 멸했다.
오왕 수몽 16년(기원전 570년) 봄, 초공왕은 자중을 파견해 오나라를 쳤다. 초군은 구자 땅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형산에서의 격렬한 저항으로 자중은 패배하였다. 이에 자중은 홧병이 나서 죽었다.
오왕 수몽 18년(기원전 568)년, 고발수몽은 진(晉)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다졌다. 같은 해 9월 23일 고발수몽은 사자를 파견해 노나라, 진(晉)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위나라, 정나라, 제나라와 척 땅에서 회맹했다.
오왕 수몽 23년(기원전 563년) 봄, 노양공, 진도공(晉悼公), 조성공, 제나라 태자 광이 사(柤) 땅에서 회맹했다.
오왕 수몽 25년(기원전 561년) 9월, 장남 고발제번, 차남 고발여제, 삼남 고발여매, 사남 고발계찰을 불러 순서대로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문제는 고발계찰이 왕위에 대하여 욕심이 없었던게 문제였다. 생전 고발수몽은 고발계찰의 영민함에 감탄하여 자신 사후 고발계찰에게 왕위를 주고 싶어했고 장남 고발제번 뿐 아니라 다른 두 아들들도 고발계찰이면 왕의 재목이다 싶어 왕위계승권을 주고자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고발계찰은 왕위에 미련이 없어 명목상 장자계승권이 우선이라 했으나 큰형 고발제번은 어떻게든 부왕의 유언을 지키고자 형제계승법을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삼남 고발여매 사후 사람들이 계승자 고발계찰에게 가서 권유함에도 기어이 고발계찰은 계승식 전날, 진나라로 가서 새 장가를 든 뒤 조용히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