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스토차스 (영어: Stotzas 그리스어: Στότζας) |
출생 | 미상 |
사망 | 545년 |
직위 | 아프리카 속주 방면 동로마군 장교 |
반란 대상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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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반란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시기 아프리카 속주의 독립을 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4년만에 진압당했다.2. 행적
동로마 제국군의 장교로, 533년부터 534년까지 반달 왕국을 정복한 벨리사리우스 휘하의 군대에 배속되어 마르티누스 장군의 호위를 맡았다. 벨리사리우스는 반달 왕국을 정복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개선식을 거행한 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동고트 왕국 정복 전쟁을 준비했고, 솔로몬이 카르타고에 남아 막 정복한 아프리카 속주를 통치했다. 그러나 당시 카르타고에 주둔한 로마군 내부에서는 반란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반달 왕국이 멸망한 뒤, 1,000명의 반달 군인들이 로마군에 편입되었는데, 그들은 반 아리우스파 정책을 밀어붙이는 당국에 불만을 품었다. 또한 병사들은 북아프리카의 드넓고 기름진 땅을 '높으신 분들'만 독식하고, 자신들은 쥐꼬리만한 급료만 받는데다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아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현실에 반감을 품었다.스토차스는 병사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지자, 이를 잘 이용하면 북아프리카에서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반달 군인 1,000명과 해방 노예를 포함한 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로 진격했다. 아프리카에 주둔한 동로마 장병 대부분이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카르타고에 남은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솔로몬은 민병대를 소집하여 카르타고를 지키려 애썼지만, 중과부적으로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 당시 시칠리아 섬에서 동고트 세력을 막 몰아냈던 벨리사리우스는 급히 진압군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돌아왔다. 벨리사리우스가 나타나자, 스토차스는 포위를 풀고 멤브레사로 후퇴한 뒤 벨리사리우스와 일전을 벌였으나 참패했다.
스토차스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누미디아로 후퇴한 뒤 그곳의 장교들을 살해한 후 누미디아 주둔 로마군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동고트 왕국과의 전쟁을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536년 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사촌인 게르마누스가 진압을 맡았다. 게르마누스는 반란에 가담한 이들 중 단순 가담자를 사면해주겠다고 선포하였고, 밀렸던 급료를 지급해주고 토지도 분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스토차스는 이에 맞서 537년 봄 스콜라스 베테레스에서 게르마누스와 맞붙었으나 게르마누스에게 회유된 부하들이 대거 배신하는 바람에 패배했다.
그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마우레타니아로 도망쳐 환대를 받았고, 현지 왕자의 딸과 혼인했다. 544년 무어 왕 안탈라스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북아프리카 속주를 공격하였으나, 545년 가을 타키아 전투에서 요한네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에게 패했으며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