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00:41

신현철(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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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신현철(申鉉喆)
생몰 1892년 5월 14일 ~ 1943년 9월 20일
출생지 강원도 원주군 소초면 평장리
사망지 강원도 원주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생애

신현철은 1892년 5월 14일 강원도 원주군 소초면 평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심했다. 4월 3일, 그는 신현세(辛賢世) 등 수 명과 함께 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의병 출신으로 인근의 둔둔리에서 서당 훈도를 하는 박영하(朴英夏)와도 만세시위 계획을 협의하였다.

4월 4일 동생 신현성(申鉉成)과 마을 청년 유재경(柳在景)·김흥렬(金興烈)을 시켜 면내 의관리·장양리·평장리·교항리 등지에 연락을 하여 이튿날 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수암리는 헌병주재소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 유지를 위해 연락에서 제외하였다.

4월 5일, 사전 연락으로 수백 명의 군중이 부채고개에 모였다. 이들은 일단 이곳에서 만세를 부르고 소초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면장 남상철(南相喆)[1]을 끌어내어 함께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 박영하가 독립만세를 부르자 시위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따라 불렀다.

시위군중은 평화시위를 마친 뒤 각각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뒤늦게 안 수암리 헌병주재소에서 원주분견소의 지원을 받아 각 마을을 수색하며 만세시위 참가자를 무차별 체포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군경에 체포된 신현철은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원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9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신현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 남상철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