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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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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록

1. 개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어록 및 읽을 만한 글귀를 정리한 문서.

2. 어록

인류는 내게서 몇 가지를 배웠고 그걸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철학에서는 행간의 눈물과 울부짖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와 다들 죽고 죽이느라 아우성치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철학이 아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1]
인간의 가혹하고 불쌍한 많은 운명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점이다.[2]
불행과 고뇌를 겪을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위안은 우리보다 더 불행한 자를 바라보는 것이다.[3]
인생이란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힘든 과제와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인생을 견뎌 냈다"라는 말은 멋진 표현이다.[4]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만족이 부족할수록 남들에게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란다.[5]
독서는 스스로 사고하기의 단순한 대용품에 불과하다. 독서를 하면 남의 생각에 자신의 사고가 끌려다닌다.[6]
행복을 구체적으로 누릴 능력이 더 이상 없는 사람은 마음을 온통 돈에 바친다.[7]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들의 진정한 연관성을, 종종 그것들이 일어나는 동안이나 그 직후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한다.[8]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이 단 한 번뿐이고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임을 항시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9]
인간은 헛되이 신들을 만들지만, 신들에게 구걸하고 아부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의지력이 초래할 수 있는 것만에 불과하다.[10]
인간은 자신의 결점이나 악덕은 깨닫지 못하고 타인의 결점이나 악덕만 알아챈다.[11]
세상이란 실은 지옥이다. 인간은 한편으론 들볶이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영혼 속의 악마이기도 하다.[12]
==# 읽을 만한 글귀 #==
고뇌를 추방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고뇌의 형태를 바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고뇌의 형태는 원래 부족과 곤궁, 삶의 유지를 위한 근심이다. 극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이 형태를 지닌 고통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고통은 연령이나 사정에 따라 교대로 수많은 다른 모습을 취하며 성 욕동, 열정적인 사랑, 질투, 부러움, 증오, 불안, 명예욕, 금전욕, 질병 등으로 나타난다. 고통이 결국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없게 되면 싫증과 무료함이라는 슬픈 회색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것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가지를 시도한다. 마침내 이 싫증과 무료함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 이전의 여러 고통 중 하나에 다시 빠져 고통스런 춤을 처음부터 다시 추게 될 것이다. 모든 인생은 고통과 무료함 사이에 이리저리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430
건강은 외적인 어떤 재화보다 월등히 중요하므로 정말이지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한 건강과 조화로운 신체에서 비롯되는 차분하고 명랑한 기질, 분명하고 생기 있으며 통찰력 있고 올바르게 파악할 줄 아는 분별력, 온건하고 부드러운 의지, 그에 따른 한 점 부끄럼 없는 양심, 이런 것은 지위나 부로 대신할 수 없는 장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인간 자신을 이루는 것, 홀로 있을 때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것, 아무도 그에게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그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이나 남의 시선에 비친 그의 모습보다 분명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2~23
운명은 변할 수 있어도 자신의 성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상한 성격과 뛰어난 두뇌, 낙천적 기질과 명랑한 마음, 튼튼하고 아주 건강한 신체와 같은 주관적인 자산, 즉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이 우리의 행복에서 으뜸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외적인 자산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앞에서 든 자산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자산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이러한 좋은 특성은 즉각 보답을 주기 때문이다. 즐거워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그가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 이유다. 이러한 특성만큼 다른 모든 자산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반면 이런 특성 자체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젊고 잘생긴 데다 부자며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행복한지 판단하려면 그가 명랑한지 알아보아야 한다. 반면에 그가 명랑하다면 젊든 늙었든, 몸이 반듯하든 굽었든, 가난하든 부자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행복한 것이다. 유년 시절 나는 어느 고서를 뒤적이다가 "많이 웃는 자는 행복하고, 많이 우는 자는 불행하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매우 단순한 말이다. 비록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소박한 진리를 담고 있어서 나는 그 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명랑함이 우리를 찾아오면 언제라도 문을 활짝 열어줘야 한다. 명랑함이 잘못된 때 찾아오는 법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8
얼핏 살펴보아도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는 고통과 무료함임을 알 수 있다.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사실상 진폭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 두 가지 적수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양자가 이중의 적대 관계, 즉 외적 혹은 객관적 적대 관계와 내적 혹은 주관적 적대 관계에 있는 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외적으로는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따라서 하층 계급 사람들은 궁핍, 즉 고통과 끊임없이 때로는 정말이지 절망적인 싸움을 벌인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3
인간처럼 물질을 필요로 하고 여러 욕구로 이루어진 종족에게는 부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노골적으로 존경과 숭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 심지어 권력조차 오로지 부를 얻는 수단으로만 여겨져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아울러 다른 모든 것이 돈을 벌려는 목적 때문에 무시되고 망가지는 것, 예컨대 철학이 철학 교수에 의해 망가지는 것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의 소망이 주로 돈에 향해 있고, 인간이 무엇보다 돈을 사랑한다고 종종 비난받기도 한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고 변신에 능한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한 우리의 소망과 다양한 욕구의 대상을 언제라도 충족시켜 주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다른 재화는 단 한 가지 소망, 한 가지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음식은 배고픈 사람에게, 와인은 건강한 사람에게, 약은 환자에게, 모피는 겨울에, 여자는 젊은이에게 좋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재화일 뿐이다. 즉 상대적으로 좋은 것에 불과하다. 돈만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다. 돈은 구체적으로 단 하나의 욕구에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욕구 전반에 소용되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51~52
타인의 의식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에게는 상관없다. 우리 역시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얕은지, 개념이 협소하고 신조가 천박한지, 견해가 왜곡되고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알면 타인의 견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또한 그런 자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그런 자가 하는 말이 자신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되자마자, 모두가 하는 말이 때로 얼마나 하찮게 들리는지 경험으로 알면 타인의 견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형편없는 인간들이 위대한 인물을 깎아내리는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의 견해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그들에게 지나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58
세상에서 가장 값싼 종류의 자긍심은 민족적 자긍심이다. 민족적 자긍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사실로 자랑할 만한 개인적 특성이 부족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수백만의 사람과 공유하는 것을 굳이 손에 넣으려고 할 턱이 없다. 의미 있는 개인적 장점을 지닌 사람은 언제나 자국민의 결점을 보고 있으므로 오히려 자신의 민족이 지닌 결점을 가장 또렷하게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무엇 하나 자랑할 만한 게 없는 가련한 멍청이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가 속한 민족을 자랑하는 것을 붙든다. 그럼으로써 그는 힘을 회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국민 특유의 온갖 결점과 어리석음을 필사적으로 옹호하려고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65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대충 알아보려면 그가 어떤 일에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에 슬퍼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 자체로 볼 때 사소한 일에 슬퍼할수록 더욱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라야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말로 불행한 상태에 빠지면 그런 사소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22~123
미래의 재앙 중 우리를 정말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올 것이 확실하고, 오는 시기 역시 확실한 재앙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재앙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재앙이란 일어날 가능성이 있거나, 어쨌든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하거나, 일어날 것이 확실하지만 일어날 시기는 완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종류를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한시도 마음 편한 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올 것이 불확실하거나 오는 시기가 불확실한 재앙 때문에 생활의 안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올 것이 불확실한 재앙은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오는 시기가 불확실한 재앙은 그렇게 금방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28
우리는 즐거운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보내다가, 막상 좋지 않은 시기가 닥쳐야 비로소 옛날과 같은 시절이 돌아왔으면 하고 바란다. 명랑하고 즐거운 순간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언짢은 얼굴을 하고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보내 놓고, 나중에 우울한 시간이 찾아오면 좋았던 옛날을 헛되이 그리워하며 탄식을 내뱉는 것이다. 그러는 대신 지금은 냉담하게 그냥 흘려보내는 심정으로, 어쩌면 조급한 심정으로 떠밀어 보내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견딜 만한 현재, 다시 말해 일상적인 현재를 존중하는 것이 좋다. 이때 명심할 점은 현재가 바로 지금 신격화된 과거 속으로 흘러들어 가 그 후부터는 바로 그곳에서 불멸의 빛에 에워싸인 채 기억으로 간직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특히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이 기억은 베일을 걷으며 우리의 진실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29
인간은 너그럽게 대하면 버릇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그 때문에 타인을 너무 관대하거나 다정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돈을 꿔달라는 부탁을 거절한다고 해서 친구를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정작 돈을 꿔주면 금방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소 거만하게 소홀히 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쉽게 친구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무 친절하고 싹싹하게 대하면 상대가 오만하고 참을 수 없는 태도를 취해 결국 의를 상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66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떤 내적인 원칙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성격이란 절대로 교정할 수 없다. 그런 원칙에 의해 인간은 같은 상황이 되면 언제나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절교한 친구와 다시 화해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친구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절교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행동을 더욱 뻔뻔스럽게, 자신이 상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임을 몰래 의식하면서 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해고했던 하인을 다시 고용할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상황이 변했는데도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 관계가 바뀌게 되면 신속하게 신조와 태도를 바꾸어 버린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70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는 모두 비밀로 간주해야 하고, 친한 사람에게도 그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전혀 모르게 놓아두어야 한다. 아무리 무해한 문제라도 그들이 알면 나중에 뜻하지 않게 불리한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별력을 드러낼 때는 말보다 침묵이 낫다. 침묵은 현명함의 문제고, 말은 허영심의 문제다. 두 가지가 올 기회는 똑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이 가져다주는 지속적인 이익보다는 말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만족을 선호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큰소리로 한마디 하면 사실 가슴이 후련해진다. 하지만 버릇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 자꾸 그러다가는 생각이 말과 친해지고 허물이 없어져 남과 대화할 때 자기도 모르게 생각이 말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우리의 생각과 말 사이에 틈을 크게 벌려 두는 것이 현명하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81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라는 처세가의 오랜 원칙은 자신이 한 말의 해석을 타인의 분별력에 맡기라는 뜻이다. 일반 사람들은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그 자리를 뜬 뒤에야 해석을 내릴 수 있다. 반면에 "격한 어조로 말하라"라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라는 뜻이므로, 모든 일은 원래 의도와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의 바른 태도와 친절한 어조로 말하면 무례한 내용이더라도 직접적인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83
인생의 전반기를 지배하는 성격이 행복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동경이라면 후반기를 지배하는 성격은 불행에 대한 우려다. 인생의 후반기가 되면 온갖 행복이란 환영과 같은 반면, 고뇌는 현실적이라는 인식이 다소나마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때문에 그쯤 되면 적어도 이성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면 향락보다는 고통이 없고 확실한 상태를 추구한다. 나는 청년 시절에 초인종이 울리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기뻐했지만, 훗날 나이가 들어서는 대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리면 오히려 "무슨 귀찮은 일이 있으려나?"하고 두려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99
산 너머 반대편 기슭에 잇는 죽음은 산을 오를 때는 보이지 않는다. 청년기에 명랑하고 삶의 의욕에 차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산의 정상을 넘어서면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던 죽음이 실제로 눈에 보인다. 그러면 곧바로 삶의 활기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삶의 의욕도 감퇴해 청년기의 오만함이 물러가고 음울한 근엄함이 지배해, 얼굴에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가 젊을 때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든 인생이란 무한하다고 생각해, 시간도 그런 식으로 다루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을 경제적으로 이용한다. 노년이 되면 하루를 보낼 때마다 교수대로 한 발짝씩 끌려가는 범죄자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청년기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란 무한히 긴 미래이고, 노년기 입장에서 보면 매우 짧은 과거다. 그래서 인생이란 처음에는 사물이 오페라글라스의 대물렌즈를 눈앞에 댄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접안렌즈를 눈앞에 댄 것처럼 보인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늙어 봐야, 다시 말해 오래 살아 봐야 한다. 시간 자체도 청년기에는 훨씬 더디게 흘러간다. 그 때문에 우리 인생의 첫 4분의 1은 가장 행복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가장 긴 시기이기도 하므로, 어느 시기보다 많은 추억을 남긴다. 그래서 추억 이야기를 할 때는 누구나 그 다음 두 시기를 합친 것보다 이 첫 4분의 1 시기에 대해 할 얘기가 더 많을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01~202
생명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우리가 서른여섯 살에 이르기까지는 그것의 이자로 살아가는 자에 비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 생명력이 다 떨어져도 내일이면 다시 생긴다. 그렇지만 서른여섯 이후부터는 자신의 자본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연금 생활자의 처지와 같다. 처음에는 사태의 변화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지출한 돈 대부분이 여전히 저절로 원상 복구된다. 이때 발생하는 미미한 적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그러다가 이러한 적자가 점차 늘어나 눈에 띄며, 적자 폭 자체가 하루가 다르게 커진다. 적자가 증가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 모든 오늘이 어제보다 더 가난해지는데, 이러한 상황이 멈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리하여 떨어지는 물체처럼 감소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 급기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여기서 비유로 든 생명력과 재산 두 가지가 정말로 함께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하면 참으로 슬픈 경우다. 나이가 들면서 소유욕이 강해지는 것ㄴ 바로 그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05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힘이 자꾸만 떨어지는 것은 물론 슬픈 일이지만 그런 현상은 필연적인 동시에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죽음의 준비 작업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음이 너무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고령에 이르러 얻는 가장 큰 이득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병에 의하지도 않고 경련을 수반하지도 않으며 아무런 느낌도 없는 매우 안락한 죽음 말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14
우리 인생의 여러 장면은 거친 모자이크 그림과 같다. 가까이서 보면 아무런 매력이 없고 멀리서 보아야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열망하던 것을 얻으면' 그것이 공허한 것임을 알게 되어,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것을 기대하며, 동시에 때로는 지나간 것을 후회하는 심정으로 그리워하기도 한다. 반면에 현재는 다만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목적에 이르는 길로서 아무것도 아닌 걸로 경시된다. 그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의 끝 무렵에 이르러 한평생 임시로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다지 존중하지도 즐기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보낸 것이 바로 기대에 차서 살아온 그들의 인생임을 깨닫고 놀라워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인생행로는 대체로 희망에 우롱당하며 죽음을 껴안고 춤추게 되어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51~252
더없이 행복하게 꿈꾸는 유년 시절, 즐거운 청년기, 고통스러운 장년기, 노쇠하고 때로는 애처로운 노년기, 죽음에 이르는 병의 고통, 마지막으로 죽음과의 싸움, 이런 사실로 볼 때 인간의 생존이란 그 결과가 점차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하나의 오류처럼 생각되지 않는가? 인생을 환멸로 파악하는 게 가장 옳을 것이다. 만사가 그렇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55
우리는 도살업자가 자기들을 하나하나 고르는 줄도 모르고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양과 같다.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즐기는 중에는 운명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액운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질병, 박해, 빈곤, 불구, 실명, 광기, 죽음 등과 같은 액운을. (중략) 개개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곤궁이나 무료함과의 투쟁일 뿐 아니라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적대자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다가 손에 무기를 든 채 죽음을 맞이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58
인식 자체에는 언제나 고통이 없다. 고통은 의지만 겨냥하는데, 의지가 억제당하고 방해받고 차단될 때 고통이 생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억제에 인식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중략)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는 온갖 고통과 무관한 인식에 의해 의지의 억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64
생식 행위가 어떤 욕구나 성적 쾌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고 합리적인 숙고에 의해 일어난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인류가 과연 존속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히려 태어나는 세대를 가엾이 여겨 생존이라는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하지 않을까? 또는 적어도 냉혹하게 그런 짐을 부과하는 것을 꺼리지 않을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66
인간이란 애당초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 해도 세계가 우리의 마음을 서로에 대한 아량으로 챔우는 데 적합하다는 것은 대체로 확실하다. 우리는 그러한 평가를 받는 인간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 인간끼리 서로를 부를 때 '아무개 씨', '아무개 선생'이라고 하는 대신 '고통의 동지'라고 하는 게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고 상대를 가장 올바로 평가하며 가장 필요한 것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그 말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그 때문에 누구나 빚지고 있는 관용, 이내, 보호, 이웃 사랑을 상기시킨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72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란 어떤 실체를 없애 버리겠다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의욕하지 않는 행위,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의욕해 온 것을 더 이상 의욕하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질, 사물 자체인 의지를 의욕하는 행위 속에서, 의욕하는 행위를 통해 알고 있으므로 이러한 행위를 중단한 뒤 그 의욕이 계속해서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행하는지 말하거나 파악할 능력이 없다. 그 때문에 의욕의 현상인 우리에게는 의지의 부정이 무(無)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82
인간의 탐욕이란 각 개인이 우연히 서로 상대방을 방해해 한쪽에는 재해를, 다른 쪽에는 해악을 끼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죄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탐욕은 이미 원래 본질적으로 죄가 되어 배척받아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삶에의 전체 의지 자체가 배척받아 마땅한 의지이다. 세상에 가득찬 온갖 전율과 비참함은 중생의 전체 성격에서 비롯되는 필연적 결과고, 그러한 성격에 의해 삶에의 의지는 인과율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나타나며 그 성격에 동기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객관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온갖 전율과 비참함은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단순한 주석인 셈이다. 우리의 생존 자체가 죄를 함축하고 있음을 죽음이 증명하고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85
스스로 사고하기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과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사이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큰 차이가 있다. 사람마다 원래 두뇌의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독자적 사고에, 어떤 사람은 독서에 끌리는데, 그 차이 때문에 두 가지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끊임없이 커진다. 다시 말해 독서는 우리가 순간적으로 갖는 정신의 방향이나 기분, 너무나 낯설거나 이질적인 사고를 마치 도장 찍듯 정신에 강요한다. 이때 정신은 전혀 그러고 싶은 충동이 없고 기분이 나지 않는데도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생각하도록 외부로부터 심하게 강요당한다. 반면에 독자적 사고를 하는 경우 정신은 순간적으로는 외부의 환경이나 어떤 기억에 좀 더 좌우된다 해도 자기 자신의 충동을 따른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환경은 독서와 달리 어떤 특정한 사고를 정신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천성과 그때의 기분에 맞는 것을 생각하도록 소재와 계기를 제공해 줄 뿐이다. 따라서 용수철에 무거운 짐을 계속 놓아두면 탄력성을 잃듯, 많은 독서는 정신의 탄력성을 몽땅 빼앗아 간다. 그러니 시간이 날 때마다 아무 책이나 덥석 손에 쥐는 것은 사고를 못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학식을 쌓을수록 사람들 대부분은 원래의 자신보다 더욱 우둔하고 단조로워지며, 그들의 저작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러한 독서 습관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38
이따금 우리는 크게 애써 스스로 사고하고 다방면으로 조합해서 천천히 알아낸 진리나 통찰이 어떤 책에 그대로 쓰인 것을 편리하게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사고해서 알아낸 지식은 책에서 거저 얻은 것에 비해 100배는 더 가치 있다. 그렇게 해야만 그 진리는 불가결의 부분이자 살아 있는 구성 요소로 우리 사고의 전체 체계에 들어와, 완전하고 확고한 관련을 맺으며, 그 근거와 결론이 모두 이해되어 우리의 전체 사고방식의 색깔, 색조, 특징을 띠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진리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바로 때 맞추어 나타나므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해 두 번 다시 사라져 버리는 일이 없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39
제1급의 정신을 지닌 소유자들의 특징적인 자질은 모두 직접 판단을 내린다는 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의견은 모두 그들 자신이 스스로 사고해 얻은 결과이며, 어디서나 말솜씨를 보더라도 그런 사실이 잘 드러난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 제국에 직속된 영주들처럼 정신의 제국에 직속되어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영주에 예속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독자적인 특징이 없는 그들의 문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군주와 같다.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결정하며, 자신을 넘어서는 사람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판단은 군주의 결정처럼 자신의 절대적 권력에서 유래하며,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한다.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 사고하는 자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자신이 재가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효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온갖 종류의 지배적인 견해, 권위, 편견에 사로잡힌 속된 두뇌의 소유자는 법이나 명령에 묵묵히 복종하는 민중과 같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44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은 물론 문학에서도 그릇된 주의나 방식 또는 작풍이 유행하고 경탄을 받는다. 천박한 두뇌의 소유자들은 그런 것을 받아들이고 익히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통찰력 있는 자는 그런 사실을 인식하고 경멸한다. 그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몇 년 후에는 대중도 진상을 파악해 현재의 유행을 바보짓이라 인식하고 그것을 비웃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58
이해되지 않는 글의 가면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오직 독일에서만 통용되는 그 가면은 피히테에 의해 도입되어 셸링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마침내 헤겔에 의해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 그 가면은 항상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글을 쓰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반대로 중요한 사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친근하게 여겨진다. 신비화는 그 속에 심오한 뜻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큰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온갖 기술을 사용하는 데는 지력이 없어도 전혀 상관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줄 때 지력이 필요한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68
진리는 적나라할수록 더없이 아름답고, 그것이 주는 인상은 간단한 표현일수록 더욱 심오하다. 첫째로, 그래야 진리는 부수적인 사상에 의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독자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래야 독자는 수사적 기교에 농락당하거나 기만당하지 않고, 전체 효과가 사실 자체로부터 시작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76
인간의 행복한 상태라는 것은 대체로 일종의 나무숲과 같다. 멀리서 보면 무척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고, 나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437
기억 속에 단단히 새겨 놓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직접적으로든, 또는 실례나 단순한 비유 또는 유사한 것 등으로서, 되도록 구체적인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좋다. 모든 구체적인 것은 단지 추상적으로 생각한 것이나 단순히 말 이상으로 훨씬 더 단단히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읽은 것보다 경험한 것을 훨씬 더 잘 보존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453

[1] Das Leben schwingt, gleich einem Pendel, hin und her, zwischen dem Schmerz und der Langeweile.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426)[2]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98[3]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58[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66[5]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442[6]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339[7]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433[8]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437[9]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28[10]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444[1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173[12]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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