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아우구스트 레만 (August Lehmann) |
생년월일 | 1909년 1월 26일 |
사망년월일 | 1973년 9월 13일 (향년 64세) |
국적 | 스위스 |
출신지 | 취리히 |
포지션 | 포워드, 레프트 풀백 |
신체조건 | 불명 |
소속팀 | FC 취리히 (1928-1934) FC 로잔 스포르 (1934-1937)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37-1942) FC 장크트갈렌 (1942-1943) |
국가대표 | 32경기 2골 (1930-1943) |
[clearfix]
1. 개요
스위스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레만은 1928년부터 FC 취리히에서 성인팀 선수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34년에 FC 로잔 스포르로 팀을 옮긴 레만은 바로 더블을 포함, 나티오날리가 2연패를 달성했다.1937년에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에 새로 정착한 레만은 이 무렵 포워드에서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레만은 대표팀 주장이자 수비의 핵인 세베리노 미넬리와 풀백 듀오를 결성했고 그는 그라스호퍼에서 보낸 5시즌간 리그 우승 2회, 스위스 컵 우승 4회를 커리어에 추가했다.
레만은 1943년, FC 장크트갈렌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1.2. 국가대표
1930년 3월 23일, 레만은 프랑스와의 3대3 무승부 경기 때 처음 스위스 대표팀의 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3달간 레만은 3경기를 더 출전했지만 스위스는 1무 2패의 부진에 빠졌고 1937년까지 그는 국가대표팀 커리어에 긴 공백기를 겪게 되었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레만의 소속팀 FC 로잔 스포르가 더블을 포함한 리그 2연패를 달성했음에도 나티에 레만의 자리는 나지 않았다.1937년, 레만의 새 소속팀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의 감독이었던 카를 라판이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고 라판은 그라스호퍼에서 가동되던 레만과 미넬리의 풀백진을 대표팀에서 그대로 가동시켰다. 그리고 나티는 1937년 10월 31일의 이탈리아와 1938년 2월 6일의 독일과의 두 차례 무승부, 1938년 5월 21일 취리히에서 거둔 잉글랜드전의 2대1 승리로 월드컵 본선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잉글랜드전에서 레만은 스탠리 매튜스를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스위스는 월드컵에서 8강의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레만은 이후 1939년, 헝가리와 이탈리아를 상대로 거둔 두 번의 3대1 승리, 1941년과 1942년에 독일을 제물로 한 두 번의 2대1 승리에 공헌했다. 그리고 1943년 5월 16일, 34세의 레만은 제네바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한 32번째 경기로 그의 대표팀 경력을 마감했다.
3. 뒷이야기
- 레만은 축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밤에는 취리히의 한 호텔에서 댄스 밴드 리더로 일하기도 했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 나티오날리가 우승 4회: 1934-35, 1935-36(이상 FC 로잔 스포르), 1938-39, 1941-42(이상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 컵 우승 5회: 1934-35(FC 로잔 스포르), 1937-38, 1939-40, 1940-41, 1941-42(이상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나티오날리가 준우승 1회: 1931-32(FC 취리히)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