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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安思順, 695?~756년소그드인 출신으로, 당현종 시기 저명한 당나라의 번장. 안록산의 일족이다. 당의 국경 방어에 주력하는 등 당의 충신이었으나, 안사지란이 일어나자 호부상서로 불려갔고 동관을 지키던 가서한의 무고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2. 생애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초년(712)을 전후해 돌궐 부락에서 몰락한 안사순은 백부 안연언과 형제사촌을 따라 탈출하여 친족 안정절에게로 귀순하였는데, 이때 당나라 하동도 람주에서 별가하였다. 그 이후 안정절은 안연언이 형을 구해준 것에 감격해 두 집안의 아들뻘을 형제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1]이후 군에 입대해 당나라와 토번이 오랫동안 대치하던 농우 전선에 이르러 곧 두각을 나타냈다. 개원 2년(714년) 7월, 토번군은 10만의 무리로 임조군을 침범하여 난주, 위주를 침공해 당나라의 목감 마필을 약탈하였고 이에 맞서 설눌의 지휘 아래 토번군을 대파하였다.[2]
개원 9년(721년) 10월 안사순은 우감문위장군(右監門衛將軍), 임조군사(臨军軍使)로 조주 자사가 되어 막문군사를 겸하고 은 200단, 3백 냥을 하사받았고, 막문군은 조주성에서 군사 5500명, 말 200필을 거느렸다.[3]
천보 오재(746년), 대장 왕충사(王忠嗣)가 하서와 농우의 양군을 절제한 이래 안사순은 대투군사(大鬪軍使)로 승진했고, 가서한[4]은 부사(副使)가 됐다.
747년 왕충사가 이임보의 모함으로 하옥되자 안사순은 하서절도사가 되었고, 가서한은 농우절도사가 되었다.
천보 9재(750년) 8월 삭방절도사 장제구는 군량미 지급이 여의치 않자 군사들이 판관들을 집단으로 때려 제음태수로 좌천되고 하서절수로 있었던 안사순이 삭방절도사를 지냈다. 10년(751년) 정월, 이임보가 안북부대도호·삭방절도사를 거느리고 호부시랑(戶部侍郞) 장균(張均)으로 절도유후 이사를 맡게 했다.
그 해 4월 안서절도사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대패해, 하서절도사로 유임되었고[5], 안사순은 삭방절도사의 관직을 그대로 맡았다.
752년에는 아포사[6]가 모반하여 막북으로 돌아가자, 이임보의 추천으로 모반 진압을 맡았다. 아포사는 남하하였으나, 그해 9월 중, 서수항성 사이의 영청책 수비장 장원궤(張元軌)에게 저지당했다. 이듬해 5월, 아포사가 회흘에 의해 격파당하자, 안록산은 그 틈을 타 부락을 격파한 뒤, 아포사는 잔당들을 이끌고 서돌궐의 카를룩 부로 도망쳤다. 이에 안사순이 북정도호 정천리와 함께 아포사를 격파한다. 이후 아포사가 북정도호부에서 생포되자, 754년 3월, 정천리에 의해 장안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하고 만다.[7]
755년에는 그의 아버지 안파주가 태자태사로 추증되나 동년 11월 9일 안록산이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당시 삭방절도사로 있었던 안사순은 장안으로 소환되어 호부상서로 임명된다.[8] 이후 가서한이 처형당한 고선지, 봉상청을 대신하여 동관을 지키고 있었다. 그 와중 가서한이 그의 적수였던 안사순을 무고함으로써 결국 그 동생 안원정과 함께 처형당하고 말았다.
가서한은 고선지와 봉상청을 대신하여 동관을 지키던 중 살적평반을 위해 안록산의 필적을 모방해 안사순을 모함하여 체포한다. 이후 가서한은 안사순의 죄 7가지를 나열해 당 현종에게 안사순의 주살을 청하였고, 결국 756년 3월 안사순은 그 동생 안원정과 함께 죽은 뒤 그 일족들은 영외로 이주당하였으며, 천하가 그 죽음을 억울해하였다.
안사순의 죽음으로 인해 양국충은 가서한에 대한 원한이 생겨 그를 견제하게 된다.
3. 사후
그러나 안사지란이 평정된 764년[9] 안사순의 밑에 있었던 곽자의가 안사순 형제의 누명을 벗길 것을 청하자 안사순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4. 기타
[1] 당시 안록산은 10세 안팎의 소년으로 사촌 안사순과 혈연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정이 좋았다.[2] 당시 설눌의 통제 하에 있었던 당군 장수는 안사순 이외에도 왕준, 두빈객, 곽지운, 왕해빈(왕충사의 아버지)이 있었다고 한다.[3] 안사순은 752년까지 하서, 농우 전선에서 지내게 된다.[4] 사촌인 안록산과 마찬가지로, 가서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5] 고선지의 후임 안서절도사는 봉상청이 담당하였고, 봉상청은 대발률국을 공격하는 등 안서도호부의 강역을 넓혔다.[6] 하사받은 이름은 이헌충.[7] 안사순은 그로 인해 삭방절도사를 연임할 수 있었다.[8] 그러나 연좌제로 죽지는 않았다.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기 전, 안록산이 반란의 낌새가 있다고 매번 고하였기 때문이다. 사촌인 안록산에 비해 충군의 개념이 있었던 사람이었다.[9] 당 덕종 광덕 2년 정월이다.[10] 현종 시기 명재상 중 하나였던 장구령이 안록산의 야심을 간파했고, 왕충사도 현종에게 안록산을 죽여야 한다고 간했으며, 비록 모함이었지만 당대의 간신이었던 양국충조차도 안록산이 모반할 것이라고 했으며 사촌이었던 안사순 본인도 안록산이 난을 일으킬 낌새가 보인다고 여러 차례 고하였다.[11] 설눌의 휘하에서 토번을 방어한 데 이어 왕충사 실각 뒤 하서절도사에 있었고, 고선지가 하서절도사로 임명된 후에는 삭방절도사로서 국경 수비에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