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안토니 안제이 위코 Antoni Andrzej Łyko | |
출생 | 1907년 5월 27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틀:국기| ]][[틀:국기| ]] 크라쿠프 | |
사망 | 1941년 7월 3일 (향년 34세)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아우슈비츠 수용소 | |
국적 | 폴란드 지하국 |
포지션 | 포워드 |
신체 | 172cm, 68kg |
소속팀 | 라코비찬카 크라쿠프 (?-1929) 비스와 크라쿠프 (1930-1939) |
국가대표 | 2경기 0골 (1937-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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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크라쿠프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위코는 라코비찬카(Rakovichanka)를 거쳐 1930년에 비스와 크라쿠프로 이적했다.1930년 8월 10일에 LKS 우치(Łódź)를 상대로 비스와 데뷔 경기를 치렀지만 위코의 첫 3년은 후보 선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3년 이후 위코는 팀의 주축 공격수가 되었고 1938년까지 그가 출전한 109경기에서 30골을 넣었다.
1936년 5월 24일, 크라쿠프에서 열린 비스와의 창단 30주년 기념 첼시 FC와의 친선 경기에서 비스와는 위코의 페널티 킥골로 1대0 승리를 거뒀다.
1939년의 위코는 어깨 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뛰지 못했다.
2.1.2. 국가대표
위코는 폴란드 국가대표로 라트비아와의 두 경기에 출전했고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위코는 1938년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경기는 뛰지 못했다.
2.2.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위코는 폴란드의 지하 활동에 참여했다. 무장투쟁연맹[2]에서 활동하던 위코는 1941년 봄에 조직원들이 체포될 때 같이 체포되었다.1941년 4월 5일, 위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진 933명 중 한 명이 되었다. 11780번의 수용 번호를 받고 3개월간 자물쇠 제조공으로 일하는 그 기간에 숱한 모욕을 받았다. 위코는 아우슈비츠에서 7월 2일에 있었던 폴란드와 독일 포로간의 축구 경기에서 2골을 넣기도 했다. 이것이 위코의 마지막 축구 경기였다.
아우슈비츠 수감 당시의 위코 |
다음날, 위코는 도살장에서 총살당했다. 나치 독일의 국가 권력에 저항했다는 이유였다. 아우슈비츠에 같이 수감되었던 체슬라프 소불(Cheslav Sovul)의 회고에 의하면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위코는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슈츠슈타펠 대원 한 명이 위코의 머리에 권총을 쏘았다고 한다.
위코의 시신은 화장장에서 소각되었고 그의 무덤은 크라쿠프의 라코비체(Racowice) 공동 묘지에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가볍고 빨랐으며 기술이 좋고 페널티 킥에 강점을 보인 공격수.4. 뒷이야기
- 위코는 축구 외에 스키를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