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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아퀼라니/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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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토 아퀼라니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1.1. AS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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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퀼라니는 1999년 15살의 나이에 AS 로마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줬고 이에 주목한 첼시와 아스날이 2001년에 그를 영입하려 했지만 로마가 이를 거부했다. 그후 아퀼라니는 2002년 10월 10일 18살의 나이에 토리노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날 로마는 3:1로 승리를 거뒀다. 아퀼라니는 2002-03 시즌에서 리그 1경기, 컵대회 1경기만 뛰고 이듬해에 세리에B 소속인 트리에스티나로 임대가서 리그 41경기에 출장하여 4골을 기록했다.

2004년 로마로 돌아온 아퀼라니는 2004-05 시즌에 주전으로서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는 리그 29경기, 컵대회 4경기, 유럽 대회 5경기에 출장하여 총 38경기에 나왔는데, 나올 때마다 자신의 공격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팀의 공격 전개에 발판이 되어줬다. 로마는 그를 오랫동안 잡기 위해 2005년 3월 31일 5년 재계약에 합의했다.

2005-06 시즌, 아퀼라니는 지난 시즌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더비 델라 카피텔라를 상대로 두번째 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이 시즌에 리그 24경기 3골, 컵대회 4경기 2골, 유럽대회 8경기 1골을 기록하며 총합 36경기에 6골을 기록했다. 이렇듯 매년 쑥쑥 성장하는 그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그가 팀의 최고 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팀 또한 그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2006-07 시즌엔 마테오 페라리의 것이었던 8번을 그의 등번호로 줬다.

그런데 그는 이 시즌부터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퀼라니는 2006년 11월 25일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던 도중에 상대 선수인 로드리고 타데이와 경합을 벌이다가 오른쪽 무릎의 내부측부인대가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바람에 장기간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 그는 부상을 당한지 6개월 가까이 지난 2007년 5월에야 그라운드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커리어 내내 부상이라는 악령에 시달리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성공적인 복귀를 한 그가 충분히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고 본 이들이 많았다.


팔레르모전 때 기록한 중거리골


시에나전 때 기록한 중거리골

2007-08 시즌, 아퀼라니는 팔레이모와 시에나를 상대로 두 번의 장거리 슛을 날려 득점을 기록하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 시즌에도 부상을 자주당하긴 했지만 복귀 후에도 변함없는 경기력을 보여줘 주전 자리를 잃지 않았다. 그는 이 시즌에 리그 21경기 3골, 컵대회 4경기 1골, 유럽대회 5경기 0골을 기록하며 총 31경기 4골을 기록하며 부상으로 장기간 이탈했던 지난 시즌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2008년 10월 22일, 그는 또다시 부상을 당했고 2009년 1월 11일 AC밀란과의 경기에 복귀했다. 그러나 그는 2월에 또다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후 2009년 3월 11일에 아스날과의 챔피언스경기 때 교체로 출장한 걸 제외하면 2008-09 시즌의 후반기를 대부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로마는 2009년 5월 26일 아퀼라니와 계약을 3년 연장하는 재계약에 합의했다. 이로서 아퀼라니는 2013년까지 로마에서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느닷없이 리버풀로 이적했다.

1.2. 리버풀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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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5일, 리버풀은 아퀼라니 영입을 공식 선언했다. 리버풀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로마에게 1700만 파운드에 추가 분담금 300만 파운드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아퀼라니는 리버풀에 입단한 뒤 새미 하피야가 가지고 있었던 등번호 4번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아퀼라니는 리버풀 에코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고향 로마를 떠나게 되어 물론 유감스럽다. 그러나 리버풀 이적은 마무리되었고, 제라드나 토레스를 비롯한 훌륭한 선수들과 뛰는 것은 환상적인 일일 것"이라며 리버풀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치고 싶다고 밝혔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리버풀이 비록 재능은 뛰어났지만 유리몸임이 이미 드러난 그를 거액의 돈을 들여가며 영입한 것은 의아스럽기 짝이 없다. 리버풀 보드진과 당시 리버풀의 감독인 라파 베니테스는 왜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했을까? 이야기는 2008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베니테스는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사비 알론소를 팔아치우고 그 자리를 가레스 배리로 대신하려 했다. 그러나 배리의 소속 구단인 아스톤 빌라는 배리를 절대로 보낼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고 결국 딜은 무위로 그쳤다. 자신을 내보내려 했다는 걸 알게 된 알론소는 깊은 충격에 빠졌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2008-09 시즌 리그는 물론이고 유럽 제일의 중미로 거듭났다. 2009년 여름, 베니테스는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리버풀에 마음이 떠난 알론소는 레알 마드리드로 홀가분하게 떠났다. 그래도 30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남긴 점은 리버풀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베니테스는 토레스와 함께 공격진을 이끌 인물로 로비 킨을 선택했고 사비 알론소의 대체자로는 가레스 배리를 점찍었다. 보드진은 일단 로비 킨을 2008년 여름 1900만 파운드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배리였다. 당초 2008년 여름에 영입하려고 했지만 보드진이 배리를 1000만 파운드 이상 주고 데려올 이유가 없다며 계속 거부했고 이에 격노한 베니테스는 노골적으로 로비 킨을 벤치에 박아버리고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결국 불쌍한 로비 킨은 어린 시절부터 응원했던 팀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가 2009년 1월에 친정팀으로 도로 복귀했다. (...)

이후 베니테스는 사비 알론소를 판 돈으로 배리를 영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베니테스가 너무 공공연하게 배리를 영입하겠다고 언론에 밝히자, 아스톤 빌라 측은 리버풀이 그를 영입하려고 혈안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가격을 계속 올렸다. 게다가 질레트-힉스 리버풀 구단주들은 사비 알론소를 이적시키고 받아낸 3000만 파운드의 상당수를 사적인 이유로 빼돌렸다.(...) 이 바람에 리버풀이 배리 영입에 들일 수 있는 이적료는 한정되었고 어떻게든 가격을 깎기 위해 아스톤 빌라측과 끝없는 협상을 벌여야 했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맨체스터 시티는 얼마 후 1200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배리를 영입했다. 이 정도 금액이면 리버풀도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망할 질레트, 힉스 놈들... 그러니 어쩌겠나? 꿩 대신 닭이라고 다른 선수를 찾아보는 수밖에. 그래서 아퀼라니는 배리 대신 리버풀에 입단한 것이다. 그래도 로마에서 보여준 실력을 리버풀에도 해준다면 충분히 알론소를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퀼라니는 리버풀에 입단할 때 경기에 뛸 수 없는 몸이었다. (...)

아퀼라니는 2008-09 시즌 때 오른쪽 발목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 때문에 회복까지는 최소 4주에서 8주까지 경기에 뛸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아퀼라니는 데일리 메일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에서야 이탈리아의 의료진들이 나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 못 했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어 지난 시즌 당한 내 무릎 부상에 대해서 로마의 의료진은 아주 작은 부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간과했다. 그래서 나는 경기에 뛰었고 그 결과 부상이 악화돼 수술을 받게 되었다"며 로마 의료진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아무튼 그는 부상을 입은 채로 리버풀에 입단했고 리버풀에서의 데뷔는 시즌이 시작하고 2개월이 지난 10월 29일에야 이뤄졌다. 그는 그날 선더랜드와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출장하여 15분을 소화했다.

이후 아퀼라니는 아스날과의 리그컵 4차전에서도 77분경에 교체 투입되었고 2009년 11월 9일에 다시 한번 리그 경기에서 경기 후반에 투입되었다. 그의 첫 선발 출전은 2009년 12월 9일 피오렌티나와의 챔피언스리그 6차전이었다. 당시 리버풀은 2:1로 패배했고 아퀼라니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2009년 12월 26일 울버햄튼 울브스와의 경기에서 비로소 리그 처음으로 선발로 출전했고 84분경에 교체되었다. 그 후 볼튼과의 경기에서도 역시 선발 출전하여 카윗에게 절묘한 패스를 찔러줘서 골을 만들어내며 콥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절정은 2010년 3월 15일 포츠머스와의 경기였다. 이 날 아퀼라니는 로마에서 보여줬던 경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경기 내내 중원을 씹어먹고 토레스에게 절묘한 패스를 줘서 골을 기록하게 만들었고 본인 또한 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는 이 경기에서 MOM(man of the match)에 선정되었다. 아퀼라니는 또한 풀럼과의 홈경기에도 출장하였는데, 비록 팀은 0:0 무승부로 끝났지만 아퀼라니는 이 날에도 대활약하며 역시 MOM에 선정되었다. 며칠 후 번리와의 경기에선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4:0 완승을 견인했다. 2010년 4월 29일에는 유로파 대회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리버풀은 원정 다득점에서 밀리는 바람에 유로파 4강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아퀼라니는 이 경기에서도 MOM에 선정되었다.

아무튼 아퀼라니는 2009-10 시즌 때 전반기는 버렸고(...) 후반기에는 맹활약하며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전반기에 워낙 까먹은 승점이 많았던지라, 리버풀은 7위에 그치고 말았고 시즌이 끝난 뒤 베니테스는 경질되었다. 그 후 아퀼라니는 희대의 먹튀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나올 때마다 준수한 활약을 한 건 사실이지만 문제는 나온 게 고작 9경기였던지라....(...) 결국 부상과 저조한 활약으로 자신의 등번호였던 4번도 하울 메이렐레스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15번으로 변경되면서 비난에 몸과 마음에 모두 상처를 입은 그는 임대 형식으로 이탈리아에 복귀하기로 결심했다. 베니테스 경질 이후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한 로이 호지슨은 "우리는 현재 아퀼라니를 이탈리아 클럽으로 임대 이적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며 이 사실을 인정했다. 결국 2010년 8월 21일, 아퀼라니는 유벤투스와 1년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1.3. 유벤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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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퀼라니는 2010년 9월 12일 삼프도리아와의 경기에서 시모네 페페의 교체 멤버로 출전했다. 이날 유벤투스는 삼프도리아와 3:3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의 첫번째 선발 출전은 9월 26일 칼리아니와의 경기였다. 이날 아퀼라니는 4:2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아퀼라니는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를 왼쪽으로 밀어내고, 절정의 폼을 선보이던 펠리피 멜루와 함께 최고의 2미들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하지만 전반기 막판 경기였던 파르마 전에서 멜루가 팀에 고춧가루를 뿌리면서 유벤투스가 대패했고, 이후로 폼이 좋던 선수들도 하나둘씩 내려오기 시작하며 2위까지 올라갔던 성적이 7위로 내려앉게 되었다. 많은 선수들이 전반기에 비해 떡락했던 후반기였지만 아퀼라니는 나름 준수했던 편. 리그 전체로 33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하며 준수한 경기력을 선보였다는 평이다.

그의 활약상을 지켜본 케니 달글리시는 그가 여전히 리버풀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퀼라니는 이탈리아에서 뛰는 게 행복하며 계속 세리에A에서 뛰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이 당시 팬들에게도 꽤 좋은 인상을 남겼던지라 유벤투스 팬들 역시도 남아주길 바랬다. 시즌이 끝나고 유벤투스는 피를로의 영입이 유력했는데 투토메르카토웹에서 피를로 VS 아퀼라니 설문을 했고 이 당시에 과반의 유벤투스 팬들은 아퀼라니를 지지했다.[1] 하지만, 유벤투스는 아퀼라니를 임대했을 때 완전 이적료로 1400만 파운드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던 것과 달리, 아퀼라니가 시즌 막판에 부진했던 동시에 피를로의 프리영입을 확정지었던 유벤투스는 생각을 바꿔 완전 이적료를 깎지 않으면 영입은 없다고 선언했다. 결국 아퀼라니는 완전 이적에 실패하고 리버풀로 돌아갔으나 곧바로 AC 밀란으로 임대되었다.[2]

1.4. AC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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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4일, 아퀼라니는 리버풀의 프리 시즌 훈련에 참가했고 아시아 투어에도 로스터에 포함되어 7월 13일 광동과 선레이 케이브와의 친선경기에서 선발 출전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리버풀에서 2011-12 시즌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1년 8월 25일, 아퀼라니는 한 시즌 동안 밀란에 임대되기로 합의했다. 아시아 투어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줘서 팬들이 선정한 베스트 11에도 뽑혔던 그가 느닷없이 AC 밀란으로 임대된 것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케니 달글리시 리버풀 감독은 "아퀼라니는 팀의 준비된 포메이션에 적합한 선수가 아니어서 임대보냈다"라고 밝혔다. 하긴 그가 이 시즌에 뻥축 위주의 전술을 사용한 걸 보면 아퀼라니같은 선수는 어울리지 않겠지

아퀼라니는 2011-12 시즌 개막전 라치오와의 경기에서 선발출전했다. 그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여 안토니오 카사노에게 절묘한 패스를 찔러서 그가 골을 기록하게 했고 코너킥을 올려 헤더 골을 이끌어내 이 경기에서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2011년 9월 13일, 아퀼라니는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에서 교체 투입되었고 밀란은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2011년 9월 18일, 아퀼라니는 나폴리를 상대로 리그 첫번째 골을 기록해 팀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그는 리그 23경기 1골, 챔피언스리그 7경기 출전 0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서 또다시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제대로 출장하지 못했고 결국 밀란은 그를 잡지 않았다.

1.5. ACF 피오렌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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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3 시즌, 아퀼라니는 리버풀로 돌아와 프리시즌 트레이닝 캠프에 합류했다. 그는 리버풀의 북미 투어에 동참했고 토리노 FC와 친선경기에 출전하여 45분 동안 뛰었다. 그의 에인전트는 아퀼라니가 리버풀에 남는다고 밝혔지만, 리버풀은 2012년 8월 3일 아퀼라니를 피오렌티나로 보내는 데 합의했다. 그것도 자유계약으로. (...) 2000만 파운드를 들여 사놓고 달랑 9경기만 쓰고 자유계약으로 보내다니...

아퀼라니는 2012-13 시즌 피오렌티나에서 리그 25경기 7골에 컵대회 2경기 0골을 기록했다. 특히 2014년 1월 26일 제노아를 상대로 커리어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3:3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아퀼라니는 2014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나폴리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아퀼라니는 31경기 출전 6골, 3경기 출전하여 0골, 유로파 10경기 1골을 기록하며 총합 44경기 7골을 기록하며 팀을 4위에 올렸고 유로파도 4강까지 진출했다. 이후 아퀼라니는 2014-15 시즌에서 리그 25경기, 유럽 대회 7경기 등 총 34경기에 출전했지만 지난 2시즌에 비해 기량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고 또다시 부상에 시달리면서 팀내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시즌이 떠난 뒤, 그는 자유계약선수가 되어 팀을 떠났다.

1.6. 스포르팅 CP

2015년 8월, 아퀼라니는 스포르팅 CP와 3년 계약을 체결했다. 주급은 100만 유로.

1.7. 델피노 페스카라 1936

2016년 8월 26일 델피노 페스카라 1936로 이적하며 이탈리아 무대로 복귀하였다.

1.8. US 사수올로 칼초

2016년 12월 29일 세리에 AUS 사수올로 칼초임대 이적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이로써 벌써 4번째 임대다.

1.9. UD 라스팔마스

2017년 8월 26일 UD 라스팔마스 이적이 확정되었다. 계약기간은 2년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클럽이 강등되면서 2018년 7월 계약이 해지되었다. 이후 소속팀 없이 1시즌을 그냥 보낸 후 2019년 6월 28일,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9 - 20 시즌에 전 소속팀 피오렌티나 유스팀 감독(프리마베라 아랫 단계)이 됐으며 1군으로 승격하여 현재는 경질 압박에 시달리는 이아키니를 팀에서 도와주기 위해 1군 코치로 승격시켜 활동 중이며 조만간 피오렌티나 프리마베라 감독이 될 것으로 보인다. 22-23시즌 시점에는 피오렌티나 프리마베라 감독으로 부임 중이다.


[1]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아퀼라니는 10/11시즌 때 유베에서 괜찮은 활약을 했던 반면 이때 당시의 피를로는 AC밀란에서의 혹사의 여파로 폼이 죽어가다 결국 10/11시즌 때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버리고 말았던 바람에 유베 팬들은 피를로의 영입에 부정적이었었다.[2] 여담으로 아퀼라니의 완전 이적을 포기한 계기인 프리로 영입한 피를로는 11/12시즌부터 14/15시즌까지 4년 동안 유벤투스에서 없어서는 안될 핵심 플레이어로 활약한 반면 아퀼라니는 11/12시즌에 AC 밀란으로 임대되었을 때는 유벤투스 때만큼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며 결과적으로는 이것은 유벤투스의 신의 한 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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