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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앤 보 Anne Vau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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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562년경 |
| 잉글랜드 왕국 베드퍼드셔 해로든 | |
| 사망 | 1637년 또는 그 이후 (향년 74~75세 이상) |
| 잉글랜드 왕국 더비셔 스탠리 그레인지 | |
| 아버지 | 제3대 해로든의 보 남작 윌리엄 보 |
| 어머니 | 엘리자베스 보몬트 |
| 형제 | 헨리, 엘리너, 엘리자베스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여성 귀족.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잉글랜드에 잠입한 예수회 사제들을 후원했고, 화약 음모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2. 생애
제3대 해로든의 보 남작 윌리엄 보(1535~1595)와 레스터의 그레이스 디외 출신 귀족 존 보몬트의 딸인 엘리자베스 보몬트의 셋째 딸이다. 형제로 잉글랜드 시인 헨리(1559~1587), 레스터셔주 숄드비 출신의 에드워드 브로크스비의 부인이 된 엘리너(1560~1625), 캉의 수녀가 된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윌리엄 보는 엘리자베스 보몬트 상후 러쉬턴의 존 트레샴의 딸 메리 트레샴과 재혼해 조지, 윌리엄, 헨리, 캐서린, 에드웓, 앰브로스, 뮤리엘을 낳았다.보 가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 윌리엄 보는 엘리자베스 1세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잉글랜드 국교회 교회 예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고 플리트 감옥에 수감되었고, 처남인 토머스 트레샴[1]과 함께 예수회 신부 에드먼드 캄피언을 숨겨주고 법정 모독죄를 저지른 혐의로 스타 챔버에서 재판받고 1,000파운드에 달하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자식들도 가톨릭 신앙에 충실했으며, 잉글랜드에 잠입한 예수회 사제들을 숨겨주는 데 힘썼다.
앤 보와 그녀의 자매인 엘리자베스는 사제들이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집을 임대했다. 이 집들 중에는 엔필드 체이스에 있는 화이스웹스가 있었는데, 이곳은 화약 음모 사건 가담자 중 몇몇이 방문했던 장소였다. 앤 보는 특히 예수회 사제 헨리 가넷에게 헌신적이었다. 또한 그녀는 음모 가담자 중 한 명인 프랜시스 트레샴과 친척 관계였다. 앤 보와 트레샴은 1605년 11월 5일 화약 음모 가담자들이 의회 개회식이 열릴 예정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떠나라고 경고하는 익명의 편지를 제4대 몬티글 남작 윌리엄 파커에게 보낸 것으로 의심받았다. 이 편지는 음모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작성자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가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그녀의 필체와 편지에 사용된 필체 사이의 "인지된 유사성"을 근거로 들었다.
앤 보는 화약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걸 인지한 듯 하지만, 그 음모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음모가 발각된 직후 체포되었지만 루이스 피커링이 제공한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우스터셔 힌드립에 있는 토머스 애빙턴의 집에 헨리 가넷을 숨겨주려 했지만 실패했다. 헨리 가넷은 1월 25일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앤 보 역시 헨리 가넷을 숨겨준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 탑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간수에게 전달된 서신에 숨겨진 메시지를 통해 가넷과 소통하려고 시도했다. 메시지는 오렌지 주스로 쓰여졌다. 역사가 앤스트러더는 가넷이 알아차린 메시지의 읽기 어려움은 보가 근시였고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자들은 그녀의 구두점 사용이 특이한 것이 아니며, 글씨가 읽기 어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잉크를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앤 보는 심문 과정에서 반역죄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지만, 자신의 집에서 공모자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심문자들은 가톨릭 사제의 부도덕성을 대중에 부각하고자 헨리 가넷과 앤 보가 연인 관계였다는 걸 기정사실화하려고 시도했지만, 가넷이 끝까지 이를 부정하면서 실패했다. 앤 보는 8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언니 엘리너의 가족 소유지가 있는 레스터셔로 이사했고, 1625년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에 참석하길 거부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내야 했다. 언니가 사망한 후에는 더비셔의 스탠리 그레인지로 이사했고, 그곳에 가톨릭 귀족 가문의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1637년 또는 그 이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