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08:31:52

야생의 땅: 듀랑고/메모/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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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조급한 회고록3. 이런 저런 풍문 모음4. 연락을 바랍니다5. 불안정한 생애6. 듀랑고에서 성장하기7. 추론 모음8. 탐험일지 삭제분9. 비전문가의 기록10. 학위 없는 법학자11. 턱막이의 회고12. 타이포그라피와 전쟁13. 마지막 택배14. 타조의 일기15. 내가 하는 일16. 횡령범의 충고17. 요리사가 된 이유18. 부족장 평판 회람장19. 보험증명20. 조난 직후 비망록21. 다른 구조대원의 기록22. 저주받은 섬23. 징병대장의 기록24. 개인 연구자의 메모25. 무명 징병관의 메모26.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27. 탈주 기록28. 중간상의 회고 메모

1. 개요

야생의 땅: 듀랑고에 등장하는 메모들 중 기타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메모를 적어놓은 문서.

2. 조급한 회고록

#1
어떤 일을 한지 2주만에 회고록을 남기는 게 웃긴 일이란 건 압니다. 나처럼 언변도 없는 사람이 뭔가 남겨 봤자 재미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안 될 것도 없잖아요? 나는 2주 전까지 트럭 운전사였습니다. 고단하고 라디오 방송과 친숙한 직업이죠.
#2
그날도 새벽에 고속도로를 달렸어요. 해가 뜰 시간이 아니었는데 환해지더니 시야에 모든 게 사라졌어요. 놀랐지만 차가 그대로 달려서 핸들을 붙잡았죠. 머리에 산소가 부족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력에 뇌졸중이 있거든요. 곧 주변이 분간 가능해지더니 들이 받았죠.
#3
뭘 들이 받았나 해서 내렸어요. 공룡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달아났어요. XX. 바로 차로 돌아와서 달렸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속도가 안 났어요. 멈추고 심호흡을 했어요. 좁은 시야가 서서히 넓어졌어요. 비행기 타면 그거 있잖아요. 귀환 불능 지점. 거길 통과했다는 느낌이 확 오더군요.
#4
전화가 안 됐어요. 인터넷도 안 됐어요. 핸들을 때리고 글로브박스 열어 뭔가 있나 확인하고, 울먹이며 혼잣말을 했어요. 시동을 다시 켜고 차를 물가로 옮겼어요. 보드카를 마시고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엉덩이를 창 밖으로 내밀고 공룡이 물까 봐 걱정하며 똥을 쌌어요. 밤새도록 울부짖더군요. 지독한 것들!
#5
밤새 밖에 못 나갔어요. 해가 뜨자 차를 타고 주변을 둘러봤어요. 모든 게 한 순간에 바뀌었어요. 배우를 실제로 볼 때랑 비슷했죠. 누가 "방금 지나간 그 사람, 거기 나온 배우잖아." 말해서 돌아보면 이미 가고 없는 그런 느낌이요. 여러 번 결론을 내렸지만 인정하진 않았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지 못 할 것 같단 결론을요.
#6
아버지가 세상 떠났을 때가 생각났어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죽으니 허전했죠. 제가 살던 곳도 그렇게 된 것 같았어요. 나름대로 추모의 시간을 보내고 근처 나무에 가서 과일을 땄어요. 차를 나무 가까이에 대고 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죠. 배가 고팠거든요. 공룡들이 쳐다봤어요. "적응하기 힘들다고? 어쩌라고!" 이런 표전이었어요.
#7
이틀이 지나고 사람을 봤어요. 그 사람은 가죽옷을 입었어요. 내 쪽으로 와서는 "왜 문에 똥이 묻어 있어요? 기름 좀 삽시다." 말을 걸더군요. 사람을 만난 건 기뻤지만 기껏 만난 인간이 2분만 대화해도 짜증이 치미는 그런 부류였어요. 어쨌건 이곳이 듀랑고란 것 정도는 알게 됐습니다. 기름은 안 팔았어요.
#8
그날 몇 사람을 더 만났어요. 이곳에 온지 1년이 넘은 모험가의 무리였죠. 다들 기름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친구들은 트럭을 동물처럼 해체하길 원했어요. 나도 고민을 했죠. 다음 주유소가 있을 것 같지 않으니 트럭을 처분해야 했거든요. 모험가들은 몇 번 흥정하다가 일이 있다며 가버렸어요.
#9
세상에 정의가 있다면 "몇 월 며칠에 귀하를 워프로 낯선 야생의 땅에 처박아 둘 계획입니다." 통보 정도는 해줬겠죠. 어떤 사람은 말끔하게 정장을 입고 돌아다녔어요. 나한테 와서는 "본사에서 온 거 아닙니까?" 묻고는 다시 숲으로 갔죠. 미쳐야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미치는 게 비용이 싸니까요.
#10
내가 온 곳은 모험가들이 뭔가 얻으러 올 때 들르는 그런 섬이었어요. 습하고 덥고 사람 살 곳이 못 됐죠. 모험가들은 언덕 쪽에 불을 피우고 천막을 쳤어요. 그 양반들은 하루 종일 함정을 깔려고 돌아다녔어요. 멀리서 구경했는데 먹고 사는 건 여기서도 참 피곤하구나 싶었어요. 이제 여기서 삶의 방식을 고민하게 된 거죠. 적응해버린 거예요.
#11
모험가들을 다시 찾아가 트럭을 거래했어요. 다른 사람을 불러서 트럭에서 쓸 만한 걸 죄다 뜯어내더라고요. 이런 일에 익숙한 것 같았어요. 물에 뜨는지 의심스로운 뗏목에다가 짐을 싣고는 능숙한 솜씨로 떠나더군요. 나도 따라서 "불안정섬"을 떠났죠. 여러 이야기를 들었어요. 빠르게 인정하는 게 좋다, 정착보다는 모험이 더 낫다, 등등.
#12
바다 사이로 가끔 섬이 이어졌어요. 어린 시절에 세계지도에서 보던 남태평양이 생각났어요. 가 본 적은 없지만요. 뗏목에선 할 게 없으니 다들 카드를 쳤어요. 다들 멀미 때문에 토하면서 카드를 쳤어요. 토하며 카드 치니 다른 생각이 안 떠올라서 좋더라고요. 트럭이랑 기름 팔아서 얻은 T스톤을 절반을 잃었지만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13
사람들은 틈나는 대로 조언을 하려고 했어요. 처음 몇 마디 정도는 고마웠지만 좀 지나니 입을 다물어주면 소원이 없겠더군요. 주로 자기 몫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 노름판에서 쫓겨난 다음에 조언을 시작했어요. 이긴 사람들은 조언 같은 걸 안 했죠. 이기는 사람들이 이기는 건 이기는 법을 남한테 알려주지 않기 때문인가 봐요.
#14
그렇게 듀랑고에 온 지 2주가 됐습니다.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기 전에 곰팡이 핀 내 침대이길 바라 보지만 아니네요. 뗏목은 엄청 흔들려요. 불안하고 우울하지만 살아 있어서 이렇게 글도 쓸 수 있는 거겠죠. 내일부터는 모험가들을 따라 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입니다. 내가 오늘 죽으면 이게 유언이겠죠.
#15
도착했어요. 살았네요. 쓰고 나니까 누구 보여주기도 그래서. 어디 적당히 버려 두고 갑니다. 이대로 영원히 묻혀도 좋고, 누가 찾아서 읽어도 좋겠네요. 그때도 내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죽었으면 어떻습니까? 행운을 빕니다. 라디오 좀 듣고 싶어 몸살 날 것 같네요.

3. 이런 저런 풍문 모음

#1
전에 어디서 들은 얘기다. "공룡은 고도로 설계된 로봇이다. 뼈나 고기는 전부 입자합성기에서 만들어낸 뒤에 생소를 풀어넣은 것이다." 생소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보니 생명력의 원천인 물질이라고 하더라.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모든 물질은 생소를 갖고 있다고 한다. 개소리다.
#2
생활이 자리를 잡으면 다들 이 질문을 던진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나도 그랬다. 사람들은 각자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검증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가설은 쏟아진다. 우연히 그랬을 거란 가설도 있지만 사람들은 거부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이 가치 있는 이유로 충만하길 원했다.
#3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게 결국 섭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경전에서 이런 상황을 은유할 수 있는 표현을 발굴해냈다. 표현은 몇 가지가 발굴되었고 표현끼리 서로 각축을 벌이다가 한 가지 표현이 진리가 되었다. 살아 남은 견해는 그 뜻이 아름답고 문장이 곧았다. 설득력은? 글쎄다.
#4
이 모든 일이 외계인이나 초월적인 누군가의 계획이란 가설은 지지도가 높았다. 외계인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는 사람이 강연을 하고 다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외계인들의 계획은 스타트업 창업과 비슷했다. "음... 일단 어떤 일을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자. 하다 보면 가치가 생길 거야."
#5
누군가의 여흥이란 말도 많았다. 도대체 뭐에 여흥을 느끼냐고 물으면 "그들"은 고차원적인 존재라 이해할 수가 없단 답이 돌아 왔다. 이런 식의 발언은 정말 안 하느니만 못 하다. 누군가의 남편이 반지를 건네며 언제나 자신의 아내를 사랑할 거라고 하는 말만큼이나 쓸모 없는 말이다. 개인적인 경험은 아니다.
#6
나는 여러 가설에서 확고한 결론을 끌어내지는 못 했다. 그중 지지하는 가설을 꼽자면, 우연이다. 우연히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일정한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들은 허무주의적인 견해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일어난 일은 그저 일어났을 뿐이다. 의미는 머릿속에 존재하는 거면 충분하다.
#7
동물들은 철학을 읊지 않는다. 살아 남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은 충실하다. 적고 나니 내가 지나치게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그들이 듀랑고로 오게 된 자신들의 상황을 어떻게 여기는지는 아직 알 길이 없다. 알 수 없는 부분은 제외하는 게 나을 것 같다.
#8
많은 사람이 듀랑고로 왔다. 저쪽에선 알고 있을까? 답은 무수히 많지만 크게 세 부류로 나눈다. "그렇다," "아니다," "뭐? 네 일이나 신경 쓰지 그래?" 알고 있다면 아는 대로 문제가 있고 모르고 있다면 모르는 대로 문제가 있다.
#9
큰 소문 중 하나가 지구의 주요 정부는 이미 듀랑고의 존재를 알고 있으나 이로 인해 빚어질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어 감추고 있단 것이다. 도덕적으로 문제는 있지만 현실적인 구석이 있는 소문이다. 하지만 비용이나 위험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 비밀 유지가 가능한가 의심이 든다.
#10
비관적인 사람들은 지구에선 실종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정도는 파악해도 원인 규명을 거의 못 할 거라고 보고 있다. 워프가 아웃라이어라 직접 체험하지 않는 이상 관료들의 회의에 안건으로 올리기 힘들 것이란 게 그들의 견해였다. 워프 관련 서류는 여러 책상을 돌다가 보존 서고로 가게 될 것이다.
#11
압권은 지구의 주요 정부가 외계인들과 협약을 맺고 인간을 수출하는 중이란 소문이었다. 소문의 유포자들에 따르면, 자신들은 실무를 담당했으나 정확한 설명을 듣지 못 했고 진실을 알게 되어 양심 고백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외계인과 인류의 배신자와 맞설 자금이 필요하다며 채권을 팔았다.
#12
회의주의자들은 그런 논의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상황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논의를 할 시간에 앞으로 발생할 일들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명한 회의주의자들은 권력을 못 얻었다. 이상한 이야기들이 더 힘을 얻었다. 회의주의는 무권력자를 위로하는 선물 보따리 같았다.
#13
초월적인 존재나 외계인, 정부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전부 그들이 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권력을 얻는 것이다. 회의주의자들 중에도 회의주의를 정치적 세력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없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서로에게 회의적인 태도 때문에 모임은 오래 유지되지 못 했을 뿐이다.
#14
풍문의 의회가 있다면 말이다. 다수당은 같잖은 풍문일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집권해왔다. 풍문을 부정하는 풍문이 제1야당이 될 것이다. 진실은 의석을 얻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하는 거라곤 명패를 내건 풍문을 모으는 것 정도가 전부다. 나는 나의 무기력함을 감추려고 타인의 무지를 비웃는구나.

4. 연락을 바랍니다

#1
처음 여기 왔을 때 난 버려졌어요.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어요. 계속 울어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어요. 다들 지구로 돌아갈 수 없댔어요. 자문했죠.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죠? 내가 좋은 사람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일어나선 안 돼요.
#2
사람들은 나에게 감정적으로 굴지 말랬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합리적이라 결론을 만들어 놓고 그런 말을 했죠. 나는 감정적이 되지 않고선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차분하게 대응할 수가 없었어요. 차분하게 대응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3
어쩔 수 없다고, 분노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다들 그랬어요. 뭘 바꿀 수 있겠냐고? 세상은 이미 이런 상태고 네 자신이 받아 들이는 게 진정한 변화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동의하지 않았어요. 워프로 사람들이 죽었어요.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행동 때문에요. 이걸 어쩔 수 없던 일로 칠 순 없어요.
#4
생각을 다듬었어요. 분노와 슬픔을 정제하면서 흩어진 아이디어를 연결하려고 했어요. 일어났던 일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생각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고를 겪고 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대규모 실종이 일어난다는 걸 모를 리가 없어요. 하지만 지구에서 그런 얘기는 전혀 못 들었죠.
#5
내 생각은 이래요. 여러 집단이 이 현상을 파악했지만 감추고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자기들 자리는 지키고 싶으니까요. 이 세계로 떨어진 사람들을 사고나 테러에 당한 것처럼 감추고 있을 거예요. 그게 가장 편리하니까요. 내 말이 음모론처럼 들려서 신뢰가 가지 않나요?
#6
가능성을 따지란 얘길 많이 들었어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정부 조직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파악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말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일어나는 일이 다 개별적으로 보이겠지만 정보를 종합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선 모를 리가 없어요.
#7
가는 곳마다 꼭 비아냥대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 할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나.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들은 속이 편하겠죠. 평생을 그저 세상은 어쩔 수 없는 거라며 초탈한 척하며 도망치면 되니까요. 그 사람들 표현을 빌리면 난 극성맞아서 그렇게는 못 살겠어요.
#8
그런 문제보다 어떻게 먹고 살 건지부터 먼저 고민하란 말도 많더군요. 나는 지금 부족을 이끌고 있어요. 47명이 어떻게 먹고 살지를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죠. 그 얘기를 하면 다들 예상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이렇게들 얼버무려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유감이군요." 어쩌란 걸까요?
#9
내 생각을 생각으로 존중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교류했어요.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은 내 의견이 사실이라면 다수의 국가 정보기관에 영향력을 미치는 단체를 가정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가능성을 부정했고 나는 가능성을 열어 뒀어요. 그런 단체가 있는 거예요.
#10
단체는 파생상품만큼이나 복잡한 구조일 거예요. 복수의 단체가 다시 단체를 구성하는 형태이고 정확한 모양은 최고 수뇌부 정도만이 알겠죠. 단체장들도 자신들의 목표를 잘못 알고 있을 거예요. 이 단체를 "음모론 상수"라 부르고 싶네요. 음모론 상수를 넣으면 많은 질문을 풀 수 있거든요.
#11
음모론 상수에 관한 의견을 계속 말해 볼게요. 그들은 연출력이 뛰어나요. 왜 사람들이 사라지는가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납득하게 사건을 꾸며요. 노하우가 쌓여서 워프를 겪지 않은 사람들은 의심이 어려울 거예요. 노하우를 쌓는 동안 실질적인 권력도 얻었고 그들 기준의 선순환이 일어났겠죠.
#12
음모론 상수를 외부에서 추론하는 건 어려울 거예요. 내부에서 고발자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보안 공식도 잘 만들어 뒀을 거예요. 하지만 이곳에선 달라요. 이곳에 온 순간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죠. 듀랑고로 많은 사람이 올수록 음모론 상수가 실재한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13
내 의견을 정리해서 설명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리 답해요. "그게 사실이라 가정하자. 근데 그러면 누구한테 책임을 물을 건데?" 글쎄요. 이곳과 그곳은 언젠가 반드시 상시 연결될 거예요. 그때면 음모론 상수를 만든 자들도, 피해를 입은 자들도 모두 죽고 후손만 남았을지도 모르죠.
#14
그래도 남겨야 해요. 우린 모두 사람이잖아요. 사람이 이래야 한다, 이런 식의 말은 좋아하진 않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 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는 건 몇 백, 몇 천, 몇 만년 뒤라도 분명히 밝혀야 해요. 어떤 생각이 남기 위해선 많이 퍼져야 해요. 연락을 바랍니다.

5. 불안정한 생애

#1
나는 불안정섬에서 산다. 안정해역의 삶은 삶 같지가 않았다. 예전에 도심에서 일할 때 그랬다. 손과 얼굴이 깨끗하고 셔츠는 말끔했다. 하얀 사무실은 냄새가 없었다. 그런 삶에서 육체는 활기를 잃고 정신은 병든다. 고통이 없으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2
고통은 갈기가 아름다운 사자다. 곁에 둘 수는 있어도 길들일 수는 없다. 아침이면 비에 젖은 천막 지붕을 턴다. 말린 고기를 씹고 배변을 마친다. 살림은 질박하다. 섬을 돌며 함정을 살핀다. 콤프소그나투스 한 마리가 목덜미가 올가미에 묶여 소리를 냈다. 돌날로 놈의 가슴을 찔렀다. 발길질이 심하다가 멎었다.
#3
천막으로 돌아와 잡은 놈을 가죽 벗겼다. 토막을 치고 솥에 물을 올렸다. 지나가던 모험가가 다가와 한 점을 청했다. 답례로 씨앗 몇 알을 받았다. 부질 없다. 키워서 얻은 소산은 쉽게 병들고 약해졌다. 스스로 자란 것을 먹어야 몸이 건강하고 자연스럽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눈에 띄어 일찍 죽는다.
#4
도끼의 날이 무뎌 갈았다. 동쪽 해안으로 가서 절벽을 살폈다. 바위 밑이 무너지는 게 섬이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불안정섬은 벼락부자 같다. 보화가 샘물처럼 고이지만 배고픈 사자가 물가에 있다. 고통을 모르는 이들은 행운을 쉽게 믿어 해변에 배를 세우지만 사자굴에 들어가는 격이다.
#5
씨앗을 모으는 자가 들렀다. 그가 꺼지는 불안정섬을 본 얘기를 들려주었다. "5해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뗏목을 타고 가고 있었지. 작은 빛이 섬 곳곳에 나타났어. 노이즈가 심해서 무전이 불가능했지. 곧 큰 빛이 나타나 사방이 분간이 안 됐어. 진동 때문에 뗏목이 다 뒤집혔지. 몇 달간 채집한 게 다 바다로 빠졌지."
#6
그가 덧붙였다. "빛이 얼마나 큰지 바다 깊은 곳까지 다 훤하게 보였어. 물 밑에 큰 짐승이 있더군. 대륙붕이 말이야. 거인이 삽으로 퍼간 것처럼 파인 자국만 남았지. 워프 말이야. 자네나 나나 겪었던 것도 아마 그랬을 거야. 의도 같은 게 있는 게 아니야. 재해지."
#7
허리가 불편해 오후에는 천막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모험가들을 따라온 의사가 있을 텐데 통증이 심해 움직이기 어려웠다. 줄을 당겨 종을 울리니 누군가 찾아왔다. 그에게 고기를 주고 의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의사가 간단한 진찰을 하더니 며칠 쉬고 자신이 있는 안정해역 섬으로 오라고 했다.
#8
며칠 쉬니 허리가 나았다. 물레를 돌려 질긴 실을 뽑아 활줄로 삼았다. 탄력 있는 나무를 잘라 활대를 휘었다. 해변의 나무를 하나 베어 속을 파고 겉을 깎았다. 카누를 만들 생각이었다. 섬에 가벼운 지진이 몇 번 일었다. 헤엄을 칠 수 있는 동물들이 바다를 건넜다. 멀리서 뗏목들이 다가 오다가 산꼭대기에서 연기가 오르자 돌아갔다.
#9
남은 자들이 거의 없었다. 다들 배를 타고 떠났다. 카누를 만들다가 허리가 아파 누웠다. 숲까지 기어 가서 고통을 달래주는 풀을 찾았다. 풀을 태워 연기를 피우자 통증이 덜했다. 눈꺼풀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사자가 나타났다. 사자는 바늘이 선 혀로 내 얼굴을 핥았다. 일어나니 밤이었다.
#10
지진이 크게 나 땅이 갈라졌다. 화산이 연기와 재를 뱉었다. 헤엄칠 수 없는 동물들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는 풀을 챙기고 나뭇가지를 하나 잘라 지팡이 삼아 해변까지 갔다. 카누를 밀었다.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물에 떴다. 앉을 곳이 없어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을 노 삼아 물을 저었다.
#11
해저에 빛이 났다. 빛은 곳곳에 나타났고 구의 형태였다. 지름은 제각각이었지만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발 아래에서 빛들이 소용돌이쳤다. 우주가 갑자기 바다 밑에 잠긴 것 같았다. 육중한 물짐승들이 화물선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돌아보니 섬 곳곳에도 빛의 구가 나타났다.
#12
땅이 한 번 크게 요동치자 바닷물도 흔들렸다. 파도가 높게 일어 카누를 놓쳤다. 물살이 제각각으로 흘러 부딪쳤다. 물이 물 밑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가 다시 뱉어냈다. 손과 발을 움직여 난바다로 헤엄쳐 갔다. 굉음이 들려 돌아보니 섬의 동쪽이 바다로 꺼졌다. 빈 자리로 근처의 물이 쓸리면서 구멍이 생겼다.
#13
물살이 구멍의 중심으로 쏠렸다. 그 당기는 힘이 매우 무거워 저항할 수가 없었다. 몸이 제멋대로 쓸려 갔다. 눈을 감았다. 물이 주먹으로 때렸다. 성한 곳이 없었다. 깊이 빠져 들자 점차 주먹질이 순해지더니 고요했다. 커다란 심장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눈을 뜨니 남은 섬의 땅뿌리가 흔들리는 소리였다.
#14
섬의 밑바닥은 틈이 갈라졌고 빛이 샜다. 빛은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뿜어낼 기세였다. 남은 섬은 연꽃 뿌리처럼 미약한 육지에 매달렸다. 숨이 막혀 더 보기가 힘들었다. 빛이 폭발하자 진동이 물을 갈랐다.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15
몸이 차가워 깼다. 일어나니 모래톱이었다. 주변은 물뿐이었고 모래톱 약간과 바위 기둥 몇 개가 선 게 전부였다. 바위 기둥은 잘라낸 것처럼 단면이 직선이었다. 인위적으로 보였다. 바위 밑둥에 죽은 생선이 많았다. 뿌리 뽑힌 나무가 물 위로 떠가더니 모래톱에 멈췄다. 가지를 손으로 끊어 말렸다. 배가 고파 생선 껍질을 벗겨 날로 먹었다.
#16
가지가 마르자 접고 휘었다. 바위로 가지에 불을 붙였다. 가지를 더 꺾어 불을 더 피운 다음에 옷을 말렸다. 생선도 꼬치를 꽂아 몇 점 구웠다. 별자리를 보니 전에 있던 섬의 위치가 맞았다. 죽은 물고기와 나무 한 그루 말고는 주변에 쓸 만한 게 없었다.
#17
허리가 다시 쑤셨다. 몸을 가누기 어려워 누웠다. 괜찮아지면 기어서 바위에 고인 빗물을 마시고 불씨를 다시 붙여 고기를 구웠다. 그렇게 2주를 버텼다. 비가 내리지 않아 옷을 벗어 체로 삼아 바닷물을 걸렀다. 다시 2주가 지나니 태울 나무가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18
누운 채로 해가 하늘을 지나 사라지는 걸 보았다. 해가 지자 별이 흩뿌려졌다. 구름이 바람을 따라 흐르고 바다가 울음소리를 냈다. 고통을 받아들이면 모든 감각이 선명해졌다. 살아 있는 것이 번창하는 가운데 나는 무너진 섬에서 죽을 것이었다. 수만 년이 지나도 파도는 모래톱에 부딪칠 것이다.
#19
눈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어둠으로 잠겼다. 소리만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형상을 이루고 서로의 진동을 겨루며 살아 움직였다. 목 아래가 마르고 침도 흐르질 않았다. 짠내가 고와지더니 냄새도 하얀 너머로 사라졌다. 얼마나 눈이 멀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소리는 세계를 세우고 스스로 번창하였다.
#20
소리가 빚어낸 세상은 자연으로 시작하여 문명을 퍼뜨렸다. 영화로운 세월 뒤에 암흑이 지나가고 몇 겁이 흘렀다. 소리는 귀와 귀 사이를 흔들어 커다란 환상을 들려준 뒤에 사라졌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머릿 속의 감각만이 바깥과 끊어진 채 움직였다. 그러다 사자가 울부짖었다.
#21
그들은 항해 중에 나를 발견했고 뗏목으로 옮겨 약과 수프를 먹였다. 귀와 눈이 돌아오지 않은 채 미지근한 덩어리를 삼켰다. 모든 게 사자의 울음 소리 뒤에 일어난 일이란 건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고통을 가까이 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귀한 경험이었다. 그 순간엔 나만이 간직해야 아름다웠다.
#22
기운을 차릴 때까지 그들과 있었다. 그들을 떠날 즈음에 먼 곳에서 굉음이 들렸다. 꺼지는 소리와 달리 무언가가 태어나는 소리였다. 몇 천 마리의 사자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 안정된 곳에선 누릴 수 없는 근원적인 경험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작은 카누를 얻어 노를 저었다. 물결이 투명하게 일었다.

6. 듀랑고에서 성장하기

#1
아버지가 그곳을 많이 얘기했어요. 그곳 사람들은 건물을 산보다 높이 지었다고 합니다. 고장난 자동차들도 그곳에선 잘 달렸대요. 사냥을 할 필요 없이 가게에 가면 매번 원하는 고기를 얻을 수 있고, 발전기를 계속 수리하지 않아도 전기를 얻을 수 있었다네요. 하긴, 옛날이 그립긴 하잖아요.
#2
어른들은 그런 기질이 있어요.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꼭 그곳 얘기를 하려고 하죠. 제가 그 얘길 듣고 감명 받길 원하나 봐요. 그래서 저는 끄덕거리며 답했죠. "그랬군요. 좋은 얘기 감사합니다." 이러면 다들 만족했어요.
#3
"여기 보이는 모든 게 다 우리 세대가 일군 게 아니냐? 요새 애들은 상상도 못 할 거야. 정말 들판에 천막 하나 없고 공룡만 가득 했는데. 다들 열심히 일했다. 너희들이 그런 걸 아니?" "그만 하셔. 애들은 그런 말 해도 몰라. 나이 들어야 알지." 어른들은 이런 말도 자주 했어요.
#4
제가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 도와주는 어른은 잘 없었어요. 학업을 떠난지 오래 돼서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부족장이 다른 부족에서 수학 교사를 불렀는데 참여가 저조해서 폐강되고 다들 덫이나 만들러 나갔죠. 그래도 저는 2차함수 정도는 풀 수 있어요.
#5
덫은 잘 못 만들었어요. 혼도 많이 나고 사냥에 실패했을 때 맞은 적도 있어요. 아버지는 저보다 키가 머리통 하나는 큰데 제가 아버지만큼 힘을 쓰기를 원했죠. 부모님 세대는 자식 세대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좋았어요. 그곳에서 잘 먹고 자랐나봐요.
#6
덫을 못 만드니 어머니가 저를 농사 그룹에 보내자고 얘기했어요. 하루 종일 수로를 파고 쓸 만한 씨앗을 주우러 돌아다녔죠. 허리가 굽을 것 같았어요. 부족장은 농사가 경제 성장에 좋을 거라며 경지 개간을 늘렸는데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어요. 아버지도 틈만 나면 부족장을 욕했어요.
#7
부족장은 다른 부족과 전쟁 중에 뒤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었어요. 아버지가 다음 부족장이 되려고 했지만 못 됐어요. 아버지는 그 후로 상심했는지 늘 취해 있었어요. 저와 어머니한테 몽둥이도 휘둘렀어요. 2년을 그러다가 어머니가 칼로 아버지를 벴어요. 아버진 욕을 하더니 울면서 죽었어요.
#8
충격을 받긴 했지만 못 살 정도는 아니었어요. 어머니를 욕하는 사람도 있고, 위로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죠. 재판이 열렸는데 부족장이 사면해서 금방 끝났어요. 그 일 이후로 세상의 평가란 게 참 부질 없단 생각이 들었어요. 도덕적으로 어떤 국경을 지난 기분이었죠.
#9
그곳에선 모든 게 자동차처럼 정교하게 연계됐다고 했어요. 제가 본 자동차는 담쟁이 덩굴이 자라는 커다란 장식이었지만요. 여기선 녹이 슬고 자연이 얽혀서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죠. 그곳 얘기 중에 재미 있는 게 신용카드란 거예요. 한 달 뒤에 누가 돈을 줄 거라고 가정하고 서로 거래를 한다니. 이상적인 세상이었나 봐요.
#10
그곳, 그곳, 그곳. 다들 그곳을 너무 그리워해요. 난 그곳에 가 본 적도 없는데. 가 본 적도 없는 곳을 고향이라며 다들 나한테 가르치려고 해요. 내가 듣기 싫다고 해도 소용이 없죠. 성격들이 그러니까 그곳에서 추방됐나봐요. 어머닌 원래 안 그랬는데 아버지를 벤 다음부터 갑자기 그곳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11
불공평한 것 같단 생각도 들어요. 그곳에서 이곳으로 오는 워프는 있는데, 이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건 없잖아요. 그 워프가 있으면 저한테 그곳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다 그곳으로 보내줘버릴 텐데 말이죠. 아무튼 제가 자식을 낳으면 다행이에요. 제가 그곳 얘기를 하진 않을 거잖아요. 제 자식은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상상도 못 하겠죠.
#12
의사가 뭐라도 써 보래서 써 봤어요. 어머니가 또 누구랑 싸우고 있어서 여기서 줄여야겠네요. 다음 달이면 저도 18살이 됩니다. 어머니 허락을 받지 않고 다른 섬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거죠. 어른이 되면 괜찮은 어른이 될래요.

7. 추론 모음

#1
앞으로 있을 많은 생각을 위해 공리를 하나 정해 봅시다. 물론 진짜 자명한 공리는 아니고, 그냥 적당히 비유를 하고 싶을 때 빌려오는 그런 말 있잖아요. 아무튼, 그 공리란 게 제가 정한 게 말이죠. "우리는 워프를 겪어서 여기에 왔다." 이겁니다. 동의하나요? 뭐 저 혼자 글 쓰는 건데 동의가 뭐고 일단 계속 말해 보죠.
#2
비행기 날개가 흔들리던 건 생각나요.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난기류라 그래." 그렇게 말했는데 다음에 비행기 날개가 꺾였죠. "난기류가 원래 이래?" 친구가 물었죠. "이런 경우도 있을걸. 내가 사례를 다 아는 건 아니라서." 제가 답했죠. 기장이 모르겠다고 방송을 했어요. 창문을 보니 빛이 그루피들 마냥 비행기 주변에 달라붙었어요.
#3
2차 대전 때 비행기 조종사들이 날개에 달린 그렘린을 봤단 얘기를 했잖아요. 저도 확인하려고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앉으라고 소리를 질러서 확인은 못 하고 대신 촬영을 했어요. 산소 마스크를 써야 했어요.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울고 그래서 집중하기가 힘들었어요. 빛 때문에 날개는 찍히지도 않았고요.
#4
착륙할 때 좀 많이 흔들렸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커다란 강에 비상착륙했죠. 창 밖에 숲이 울창했어요. 서로 쳐다 보며 전화가 되냐고 물었죠. 구조대를 기다렸는데 기장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연락 되는 기기가 있냐며 돌아다녔어요. 없었어요. 무전기만 됐어요. 누가 무전을 보냈어요. 당신들 기장이 솜씨가 훌륭하다고.
#5
무전이 다시 왔어요. 구조대는 없을 거니까 살고 싶으면 맨 몸으로 나와서 물살을 헤엄치라고 하더군요. 저는 카메라를 점검했는데 저장장치가 꽉찼어요. 녹화한 화면을 보니 우주배경복사 같았어요. 6시간이 넘는 분량이었어요. 소름이 돋았죠. 사람들에게 비행기가 시공간 도약을 한 것 같다고 말했어요. 다들 제 말을 무시하고 친구도 안 듣더군요.
#6
중년 남성이 못 참겠다고 문 밖으로 뛰어내렸어요. 살집이 있는데 수영을 잘 하더군요. 남자가 강변에 닿더니 한참을 쓰러져 있더니 셔츠를 흔들더군요. 저도 문 밖으로 뛰었어요. 구조대는 안 올 것 같아서요. 옷이 젖으니까 집에 빨래 쌓아 놓은 거랑 같이 빨면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도 내렸어요.
#7
여기서 제가 세운 공리의 원안이 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어쩌면 지금 나는 워프로 공룡들이 사는 세계로 온 게 아닌가? 왜 그랬냐면 콤프소그나투스 떼가 숲을 빠르게 뛰어갔거든요. 카메라로 찍으려고 했는데 배터리가 다 돼서 꺼졌어요. 영업사원이 24시간 녹화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네요.
#8
생각해봐요. 이런 일이 전에도 일어났다면 여기 사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무전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겠죠. 그 사람들은 조난자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살고 싶으면 나오라는 조언 정도는 했죠. 악당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여기에 경찰이 없다면 그들이 노략질을 해도 막을 수가 없겠죠. 화살이 나무 사이로 날아왔어요.
#9
무전을 많이 날려서 그런가 숲 쪽에 동창회라도 연 것 같았어요. 약탈자들은 단일한 그룹이 아니었어요.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과 날아가는 방향이 매트릭스 조직만큼이나 복잡했거든요. 그들은 해진 옷을 기워 입었고 얼굴에 칠을 했어요. 군화를 신고 동물의 모피를 둘렀어요. DEVGRU에서 불명예 전역한 야만족들 같았죠.
#10
저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숨을 죽였어요. 친구는 강 쪽으로 도망갔어요. 한참 싸움이 벌어지더니 소강 상태가 됐죠. 상류 쪽에서 카누 몇 척이 내려왔죠. 승무원들이 비행기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고장났는지 닫히질 않았어요. 몇 시간 동안 그 광경을 지켜 봤죠. 승객들이 알몸으로 내렸어요. 약탈자들이 옷가지를 빼앗아 카누에 실었죠.
#11
약탈자들이 승객들을 카누에 태우더니 해변에 내렸어요. 뭍에 위치한 약탈자들이 승객들을 감시했죠.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구나 싶었어요. 잠시 후에 해변을 따라 유조탱크가 실린 트럭이 왔어요. 호스를 끌고 와서 비행기에서 기름을 뺐어요. 온갖 걸 다 뜯어 내서 카누에 내리더군요. 해가 져서 더 알아보기가 힘들었어요.
#12
이렇게 깜깜한 밤은 처음이었어요. 전기로 된 빛이 하나도 없었죠. 횃불만 강가에서 오갔어요. 시계가 없어 시간을 몰랐어요. 횃불이 갑자기 움직이더니 한 방향으로 갔어요. 약탈자들이 서로 재촉했어요. 떠나더군요. 곧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어요. 다들 벌거벗은 상태였고 우는 사람도 있었죠. 저처럼 숲으로 피한 사람들이 강가로 돌아왔어요.
#13
죽은 사람들은 일어나지 못 했어요. 고꾸라지거나 쓰러진 대로 그대로 멈췄죠. 친구는 무사했지만 알몸이었어요. 제가 친구에게 인도주의적인 그룹이 있을 거라고 위로했어요. 그럴 리가 있겠냐고 다들 울었어요. 글쎄요. 팃포탯은 가장 성공적인 전략인걸요. 기장이 숨겨둔 무전기에 무전이 왔어요. 모두가 들었죠.
#14
"회사입니다. 지금 무사합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회사라고 불렀어요. 다들 맥락을 이해하지 못 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위치와 강가에 도착할 시간, 목적을 밝혔어요. 어쩌면 다른 약탈자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엔 모두들 근처에서 돌이나 가지라도 집어 들었죠. 불도 하나 지폈어요. 보안관이 없는 강가에 알몸으로 서 있는 게 무척 떨렸죠.
#15
회사는 5백 미터 앞이라며 무전을 보냈어요. 그들이 구호물자를 두고 1킬로미터 밖으로 물러났어요. 구호물자는 비상식량과 걸칠 수 있는 천, 신발이었어요. 조악했지만 벌거벗은 사람들에겐 달랐어요. 회사는 무전으로 인도적인 부족들의 위치를 알려줬어요. 그리고 약탈자가 되면 반드시 보복할 거라고 덧붙였어요.
#16
밤은 짐승들이 사냥을 하는 시간이에요. 비유가 아니에요. 숲으로 들어가 불을 피우고 다들 모여 앉아야 했죠. 짐승이 다가오면 모두 얼어 붙었죠. 막대를 휘두르며 소리를 내자 짐승들이 도망갔어요. 순번을 정해 잠을 잤어요. 힘이 남은 사람들은 계속 토론을 했어요. 다수 의견은 이랬어요. "여긴 지구가 아니다." 토론해서 결정할 일인가 싶었죠.
#17
"회사." 왜 회사일까요? 다른 곳들은 부족이라면서. 세련되고 싶었던 걸까요? 모두가 야생으로 돌아가 무법 천지를 빚고 있지만 자신들은 다르단 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현대적인 단어를 들으면 어딘가 안심이 되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요. 약탈자들은 야생적인 스타일에 너무 몰입했어요. 그런 스타일로 표를 얻기가 힘들죠.
#18
이제 제가 잘 차례네요. 서 있느라고 꽤 피곤했어요. 졸음을 떨치려고 뭐라도 써 봤어요. 확실한 건 "워프를 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공리. 공리란 단어가 참 멋져요. 팃포탯이 이런 야생에서도 잘 통하는 건지 앞으로 검증할 수 있겠네요. 그렘린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만 자렵니다.

8. 탐험일지 삭제분

#1
탐험대장은 쓸모가 없다. 부족장의 당구 친구란 이유로 대장이 됐다. 내가 마흔여섯번이나 탐험에서 돌아온 베테랑이란 점은 무시됐다. 그래. 내 잘못이다. 당구를 쳐야 했다. 부족의 인사정책이 부족장의 당구 사랑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 한 내가 나빴다. 탐험대 서기는 내가 이런 작성분을 올리면 쫄려서 알아서 지울 것이다.
#2
대장이랑 한 잔 걸쳤다. 마셔 보니 성품이 나쁜 자식까진 아니다. 조사팀장이 묻더라. "완전 개자식이라면서." 내가 답했다. "어쩌겠어? 이제 우리 개자식이야."
#3
대장이 지나치게 소심하다. 계획 같은 거 세운 다음에 추진할 때 미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잰다. 원래 농사를 담당하던 양반이라 그런지 기한에 민감한 것 같다. 정착자들은 이래서 갑갑하다. 모험가들의 일엔 모험가들의 전통이 있다. 그 전통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시행착오를 겪어서 얻어낸 직관이다.
#4
대장이 문서화에 목숨을 걸었다. 종이도 별로 없는데 탐험일지면 충분하지, 우리끼리 얘기하는 걸 다 문서로 남기려고 한다. 서기는 좋다고 찬성했다. 이래서 서기를 본부 쪽에서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모험가 중에 최후임 정도한테 시켜야 했다.
#5
육식공룡만 나타나면 작전을 취소했다. 무슨 걔들이 자기만 보면 먹을 줄 아나 보다. 걔들도 기호가 있다. 내가 쫓아낼 수 있다고 해도 누가 다치면 안 된다고 후퇴했다. 그래 놓고 자기가 자빠져서 발목이 나갔다. 성품이 나쁘지 않은 건 인간적으로는 좋은 부분이지만 최고 선임자에겐 있으면 좋은 정도의 경력이다.
#6
새 섬에 상륙할 때마다 짐을 정리하고 푸는 데 시간이 줄어 들었다. 대장이 최적화니 뭐 못 알아 먹을 얘기를 하면서 뭔가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는데 그거 닦달하는 게 싫어서 다들 빨리 움직인 모양이다. 뭐 나도 잘 한 부분에 대해선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다.
#7
다른 모험가들과 시비가 붙었다. 4 년 전에 싸우다가 흉년이 들어서 유야무야된 사이였다. 무기 보니까 그때 보다 더 퇴화했더라. 소식통 얘길 들으니 거기 부족장이 T스톤 원석을 중계하는 사업을 하다가 아주 꼬라 박았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애들이 시비가 는 것 같다. 싸우면 먹을 게 나올 것 같으니까. 나도 소싯적에 그랬다.
#8
적당히 흘려 보내려고 했는데 놈들이 대장의 경력을 비웃으며 시비를 걸었다. 대장이 흥분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그냥 별 충돌 없이 지나갔다. 조사팀장한테 활 쏠 준비하라고 했다가 취소했다. 대장이 개인적인 얘기를 잘 안 하는데 그날은 하더라. "익숙한 얘기고 맞는 부분도 있어요. 웃어 넘겨야죠." 사람이 참 밍숭하다.
#9
대장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다 치고 말이다. 다른 부족의 탐험대장을 우습게 보는 건 외교적 결례다. 조사팀장이랑 믿을 만한 녀석들 몇을 데리고 갔다. 폭약을 아껴둔 게 있었다. 경고의 의미로 놈들 주둔지 근처를 폭발시켰다. 서기야. 이건 탐험일지에 절대 올리지 마라. 부족장에겐 따로 무전을 쳐서 보고 올렸다. 잘 했다고 하더라.
#10
탐험대장이 머리는 좋은 사람이다. 같이 일해 보면 느낀다. 일이 규모 있고 딱딱 진행되게 하는 그런 데 소질이 있다. 탐험대에선 찾아보기 힘든 기질이다. 나도 나이 들어서 많이 준 거지 젊을 적엔 장난이 아니었다. 싸움도 잦았고. 애초에 회의보단 스파링으로 일을 정할 때가 많았으니까.
#11
그래도 이제 내가 탐험대장 달 차례인데 이 친구한테 자리를 준 건 너무 했다. 개인적으로 나중에 부족장한테 꼭 따질 것이다. 일단은 임무에 집중하고. 다들 나보고 부족장이랑 술 친구라서 탐험대 X.O. 달았냐고 물어보는데 나도 프로다. 아 물론 한 잔 걸치다 보면 서로 비전을 교환하고 그러다 보니 통하는 구석이 있다.

9. 비전문가의 기록

#1
나는 인사이트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세상의 불가사의를 나름대로 추론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내가 남긴 추론들을 검증하려면 긴 세월이 흘러야 할 것이다.
#2
이곳의 환경은 신생대 홀로세에 가깝다. 고생물들이 홀로세에 사는 게 가능할까? 현재의 연구역량으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이를 가능케 하는 일이 있었을 거란 게 내 추론이다.
#3
이곳에 오래 생활해 본 결과 워프가 특정시간대에서 공간을 끌어온다는 걸 알았다. 모든 시간이 런던에서 뉴욕까지 이어지는 케이크라면 워프는 전용기를 타고 가다 몇 곳에만 내려 조각 케이크를 떠 온다. 고생물이나 인간은 거기에 얹은 딸기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현재의 연구역량으론 알 수 없지만 우연의 일치거나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게 내 추론이다.
#4
왜 이곳에서 일어나는 워프는 특정한 공간끼리 연결될까? 우주 전체로 볼 때 천체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좌표가 계속 바뀐다. 변화하는 두 천체의 좌표를 계속 연결하는 워프는 도대체 어떤 원리일까? 언젠간 답이 밝혀질 것이란 게 내 추론이다.
#5
T스톤의 입자는 가열하거나 용해했을 때 작은 워프를 일으킨다. 나는 언덕에 올라가 섬을 보았다. 섬이 잠긴 바다로 해가 저물었다. 매일 해 한 덩이가 먼 바닷물에 녹아 없어지고 동쪽에 해의 뿌리가 있어 아침마다 움을 틔어 해를 띄우는 게 아닌가 상상했다. T스톤의 신비로움도 누군가의 연구를 거쳐 교과서의 읽을거리 정도로 격하될 거란 게 내 추론이다.
#6
불안정섬은 왜 금세 사라지는 것일까? 모든 것은 장기적으로 사라진다지만 불안정섬의 삶은 왜 그리 짧을까? 섬을 수놓았던 녹색 수풀과 헐떡대는 짐승들의 숨소리,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 모든 게 돌아서면 사라지고 만다. 망한 나라의 성벽에 이끼가 자라듯이 불안정섬이 있던 자리엔 바닷물만이 넘실댈 뿐이다. 이런 깊은 애수조차 언젠간 논문 주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7
처음 온 사람들은 이곳을 영구적인 거처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투병과 비슷했다. 부정하고, 분노한 뒤, 타협하고, 우울해 하다가, 순응했다. 눈을 감는 이들은 눈을 뜬 이들에게 길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무덤은 가묘였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워프는 있을까? 결국엔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사람들에겐 돌아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8
추론이 한동안 우울했다. 늘 아이디어를 자극해서 활기 있고 건강하게 살려고 했는데 쉽지는 않다. 이름보단 생각을 남기고 싶었지만 남는 건 그리움 뿐이구나. 내 고향에는 올리브 열매가 많았다. 날짜를 세니 농부들이 올리브를 수확할 때다. 갓 짠 올리브 기름으로 요리를 하고 싶다. 여기서 산 날이 이제 1만 일을 넘었다. 창창한 청년이었던 내가 이제 쉰이 넘었다.
#9
마음은 쉽게 떠돈다. 생각은 느리지만 오래 잠긴다. 다시 추론으로 돌아왔다. 인간에겐 경험이 있다. 수천 년간 씨족, 부족, 왕조, 제국, 공화국, 민주주의, 전체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 많은 실험을 거쳤다. 이미 가 본 길은 빠르게 지날 수 있다. 인간이 새로운 지평에 이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추론한다.
#10
누가 이곳을 듀랑고라 불렀을까? 누구였을까?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낱말은 뿌리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과거에서 흘러온다. 지금 이 순간은 뿌리와 멀어져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11
앙코라의 화산은 언제 폭발할 것인가? 언젠간 밝혀질 것이다.
#12
현대인이 사는 시대에서 워프가 발생했다면 현대인이 아닌 현대의 생물도 왔을 것이다. 식물은 흔하다. 현대의 동물은 왜 잘 보이지 않을까? 여러 가설을 낼 수 있다고 추론한다. 내가 너무 많은 추론을 내면 후대에게 돌아갈 기회가 많이 사라질 것이다. 공정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13
궁극적인 질문이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곳에 사는 사람 모두가 생각할 일이다. 이게 내 추론이다. 나는 이 문제에 답할 줄 모르겠다. 답이 많이 나올 거란 것 밖에 모르겠다.
#14
내가 떠올린 추론들이란 결국 아무 답도 되지 않는다. 있는 질문을 다시 되새김질 했을 뿐이다. 이게 내 역할이다. 나는 생각의 과정이다. 훗날 있을 위대한 대답까지의 과정이다.

10. 학위 없는 법학자

#1
저는 법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니 법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제가 있던 부족은 단일한 국적의 사람, 그것도 고등학생들이 세웠는데 그 때문에 처음엔 자국의 법률과 상식을 따랐죠. 하지만 자국의 법률을 잘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고, 자국이 더 이상 없다는 더 큰 문제가 있었어요.
#2
한 친구가 제비뽑기로 부족장이 됐습니다. 부족장의 권한은 말로 정했습니다. 친구는 부족장이 된 다음에 권위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몇 번이나 지적했지만 고치질 않았고 새로운 조난자들이 부족원으로 합류하자 더 심해졌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부족의 일을 법으로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친구는 인력 낭비일 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엔 동의했습니다.
#3
밤에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면 모닥불에 둘러 앉아 법의 기초가 될 기본법을 정했습니다. 기본법의 목적을 우선 잡았죠. 자유롭고 평등한 삶, 부족의 공적인 자리를 어떻게 둘 것인가, 정의 추구, 구성원의 복지 증진, 안전을 위한 무장 등등 여러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 외에 들어갈 것을 논의했지만 서로 생각의 차이가 커서 앞서 언급한 것들 정도로 합의를 봤죠.
#4
전문을 썼습니다. 글을 잘 쓰는 친구가 문장을 골랐어요. "우리 인민은 부족을 구성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리고, 정의를 실현하고, 복지를 증진하며, 서로의 안전을 위해 이 기본법을 만든다." 문장이 멋져서 계속 다시 읽었죠. 부족장은 "부족장의 뜻을 받들어", "부족장의 뜻을 존중하여", "부족장을 중심으로" 같은 말을 넣길 원했지만 못 넣었습니다. 사실 전문은 제가 썼습니다.
#5
제1조를 두고 다들 어떻게든 자기 문장을 넣으려고 안달을 냈죠. 제가 전문을 쓴 걸 자랑한 게 다들 거슬렸나 봅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쓴 제1조가 선택됐습니다. "입법권은 부족의회에 속한다." 부족장은 "부족장은 부족 통합의 상징이며, 모든 권력은 부족원의 민주적인 동의로 부족장이 위임 받는다." 같은 거지 같은 문장을 밀었습니다. 하지만 뭐 결국 이렇게 됐죠.
#6
사실 제1조로 몇몇 문장을 더 고민했습니다. 의회 얘기부터 꺼내기보단 인간의 기본권 얘기를 먼저 할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부족장이 나대는 게 고까워서 일단 어떻게 권력을 나눌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권력이 서로 견제하게 하는 게 기본권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 같았거든요.
#7
의원의 숫자를 두고 의견 충돌이 잦았습니다. 구성원이 다 합해서 23명 밖에 안 됐지만 훗날 늘어날지도 모르니까요. 결국 제2조 2항에서 "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15인 이상으로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다들 토론하다 지쳐서 망할 놈의 인원은 적당히 제끼자고 했거든요.
#8
기본법을 정하는 동안에 2명이 죽었습니다. 랩터들이 겨울이 되자 제가 살던 지역에 빈번하게 나타났거든요. 활을 만들고 숲 속을 뛰어 다녔습니다. 우리는 기본법 없이 많은 의사결정을 했고 부족장은 위기 상황이라며 자신의 의견을 밀어 붙였죠. 기본법을 빨리 완성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기본법의 통과 규칙을 정했습니다. 전원 참석에 과반수의 동의.
#9
행정부와 사법부를 두고 진통이 이어졌습니다. 부족장은 부족장의 임기로 7년을 주장했습니다. 구두로는 1년만 하기로 했죠. 새로운 조난자들이 조금씩 나타나면서 부족의 인원이 51명이 됐습니다. 그들에게 생존방법을 교육하느라 시간을 거의 다 썼죠. 기본법회의에 못 가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 즈음에 부족장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각자 초안을 쓴 다음에 표결에 부쳐 다수의 동의를 얻는 기본법을 택하자고 의견을 냈습니다.
#10
친한 친구가 같이 사냥을 나가는 길에 저를 따로 불러 말했습니다. 부족장이 자신에게 유리한 기본법 초안을 쓰고 있다, 기본법에서 제대로 견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독재가 될 거다, 부족장을 좀 때린 다음에 우리 말을 들으라고 하자, 저는 입 다물라고 답했습니다. 부족장은 새로운 조난자들에게 잘 대했습니다. 기본법 초안을 표결에 부칠 때 신입들의 표를 얻어 자신의 초안을 통과시킬 생각이었나 봅니다.
#11
폭력은 직관적인 방법이긴 합니다. 저는 키가 198센티미터에 몸무게 110킬로그램의 근육질 남성이고, 부족장은 저보다 40센티미터는 작은 여성이니까요. 저도 폭력의 유혹을 느끼곤 합니다. "세상은 결국 힘이야. 힘으로 해결하자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안 살려고 법을 만드는 건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유혹은 늘 있지만, 유혹을 견뎌내는 게 인간이지요. 이런 당연한 걸 말하며 자신이 대단한 인간인 양 느끼는 제 자신이 좀 짜증납니다.
#12
저도 조난자들에게 기본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파했습니다. 그런 얘길 할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고 느끼고, 태도가 거만해지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의견을 주기도 하고 저의 지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자신이 나이가 많단 이유로 자기 의견을 강요하려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약간 회의적이 되긴 했습니다. 갈등을 없애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갈등을 줄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13
신입 가운데 변호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법학에 대해 많이 가르쳐 줬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덫과 활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죠. 사법부와 행정부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인구가 늘었을 때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부족과 부족이 합칠 일이 있을 경우 조항도 마련해두자, 등등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초안은 93개 조항으로 썼습니다. 식량 비축에 시간을 쏟아야 했기 때문에 기본법 통과가 절실했죠.
#14
투표소를 만들었습니다. 부족장이 만든 초안과 제가 만든 초안, 2개가 최종적으로 남았습니다. 제 초안이 통과되면 다시 선거를 해 정식 의회와 부족장을 뽑고, 부족장이 지명한 법원장을 의회가 과반수 참석에 과반수 동의로 승인해야 했습니다. 투표 결과 제 초안이 압승했습니다. 18세 생일이 지나지 않아 저와 부족장은 새로운 부족장 선거에 나갈 수가 없어서 부족장은 변호사가 됐습니다. 그는 기본법 책자에다 손을 얹고 법원장이 된 전직 영어교사에게 선서를 했죠.
#15
전임 부족장은 18세가 되자 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제6선거구에서 4표를 얻어 당선됐죠. 저는 부족장의 경제 보좌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이름은 그럴 듯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다른 부족에 가서 소금이나 아스피린 같은 물자를 사 오는 게 일이었습니다. 의원들은 급료가 없었고, 행정부에서 근무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전임 부족장은 주로 감자 농사를 짓고 밀을 재배했습니다.
#16
저는 법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한 부족의 기본법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저 혼자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주무자였죠.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전 XX 멋졌습니다. 부족에 새로 가입자가 생길 때마다 물어보죠. "누가 이 기본법을 만들었죠?" 그럼 저는 소금포대를 정리하다가 손을 흔들어 줍니다. 그럼 이런 말이 따라 붙죠. "훤칠하네요."
#17
전임 부족장은 저한테 인사도 안 합니다. 그럴 만도 하죠. 전임 부족장의 남편은 제 친구인데 한 번은 전임 부족장이 아파서 아스피린을 구하러 왔습니다. 나중에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고마워는 하지만 고마워 하지 않고 있어." 저도 이해합니다. 어떻게 제가 마음에 들겠습니까? 뛰어난 사람은 평생 질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18
부족장을 때리자고 했던 그 친구는 군사 보좌관으로 근무하다가 몇 차례 횡령을 저질러 첫 수감자가 되었습니다. 60일 징역형에 5년간 공직에서 쫓겨났죠. 감옥이 완성이 안 돼서 재판이 늘어졌습니다. 형을 선고받았을 때 이미 58일째 부족 청사에 구속된 상태였죠. 그 친구는 딱 이틀 복역했습니다. 이틀을 못 참고 첫날 밤에 부족을 탈퇴할 것이라며 재판 결과가 무효라고 주장했죠. 법원은 가입자가 재판 중에 부족을 탈퇴해도 재판은 유효하다는 의견서를 보내왔습니다.
#19
20살이 되자 부족장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기본법에 35세로 정해 놨습니다. 제가 정한 거였죠. 변호사 출신 부족장은 임기를 3년 남기고 급여가 적다는 이유로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다른 부족으로 가겠다며 부족을 탈퇴했습니다. 저도 교수들이 세운 부족에서 법학 강좌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경제 보좌관에서 사임했죠. 탈퇴는 안 했어요. 학위 없는 법학자의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제 메모를 찾아주신 분께 감사합니다.

11. 턱막이의 회고

#1
스캐빈저는 자신이 죽이지 않은 동물을 먹는다. 프레데터는 자신이 죽인 동물을 먹는다. 인간은 어디에 속할까? 커다란 우리를 짓고 가축을 키워 도살한다. 자신이 잡은 고기를 직접 먹는 사람은 프레데터이고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사는 사람은 스캐빈저라고 봐야 할까?
#2
나는 턱막이다. 생소한 일이다. 몰이꾼은 짐승을 몰고 덫꾼이 덫을 놓아 짐승의 발을 붙잡고 칼잡이와 활잡이, 창잡이가 짐승의 숨통을 끊는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다. 강한 턱이 달린 짐승이 사람을 물면 큰일난다. 누군간 갑옷을 걸치고 다른 사람을 대신해 턱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턱막이의 일이다.
#3
사냥꾼에겐 흉터와 문신이 많다. 턱막이는 물린 자국이 특히 많다. 갑옷을 단단히 두드리고 여며도 짐승이 물 때의 그 감촉은 여전하다. 미늘이나 판이 부서지고 살과 뼈가 찢길 거란 공포를 견디며 버텨야 한다. 짐승이 턱을 놀리면 그만큼 그 짐승에게 빈 틈이 많이 생긴다. 턱막이는 짐승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4
턱막이 사이엔 미신이 많다. 앙코라의 진흙을 갑옷에다 바르면 유황 냄새 때문에 짐승이 물다가 놀라 입이 비틀린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나도 진흙을 갑옷 위에 바르고 있다. 하지만 미신이 아니라 징크스다. 우연히 내가 진흙을 바른 날에 짐승 입이 비틀렸을 뿐이다.
#5
처음엔 쓸 만한 금속을 구할 수가 없어서 가죽을 모아 여러 겹으로 꿰매 갑옷을 만들었다. 갑옷을 입고 다니면 이동 사우나였다. 문외한이 티타늄으로 만드는 게 어떠냐고 아이디어를 냈다. 티타늄을 만들 기술력이 있다면 총부터 만들었을 거라고 답했다. 문외한은 아이디어를 냈을 뿐이라며 자유로운 의견 제시가 기술 진보를 이끈다고 주장했다.
#6
짐승들은 목덜미를 물려고 한다. 그래서 목덜미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커 보이는 것도 큰 일이다. 투구와 어깨에 큰 깃털을 달고 목도리 도마뱀처럼 뛰어다니면 짐승은 긴장한다. 영리한 놈들은 금방 알아차리지만 몇 초 정도는 헤맨다. 그 몇 초가 비싸다. 사냥꾼이나 슈퍼볼 광고나 다 몇 초 안에 결판이 난다.
#7
턱막이는 겁쟁이가 많다. 흥분한 짐승한테 관심을 끄는 건 겁이 없는 사람은 할 수가 없다. 겁이 없는 자들은 몇 초 못 버티고 자기 성질에 물린다. 겁쟁이는 어떻게 하면 자기 몸을 간수할까 그 생각 밖에 없다. 겁이 없는 자들이 주로 턱막이로 입문하지만 곧 죽거나 겁쟁이가 된다.
#8
싸우다가 다친 놈, 무리에서 떨어져 굶은 놈, 병에 걸린 놈. 놀란 짐승은 다 비슷한 소리를 낸다. 덫을 친다. 몰이꾼이 징을 치며 몬다. 턱막이가 갑옷에 피와 진흙을 바른다. 짐승이 오는 방향으로 연기가 가게 불을 낸다. 불길에 독특한 풀섶을 던지면 짐승이 미쳐 날뛰는 냄새가 난다. 사람은 못 맡는 냄새지만 나는 좀 맡는다.
#9
내 원래 직업은 중학교 수학 교사였다. 주말이면 탁구를 치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요새는 주말이면 이곳 태생인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친다. 주중에는 부서진 갑옷을 수리하고 짐승들의 행동 패턴을 연습한다. 짐승은 제각각 자랐지만 본능이 표준의 역할을 한다. 짐승의 본능을 알면 흘릴 피를 체계적으로 줄일 수 있다.
#10
짐승은 버릴 것이 없다. 뼈, 살, 가죽, 피, 그 외 모든 게 다 쓸 데가 있다. 이렇게 말해야 사냥에 사람들이 참여한다. 광고의 핵심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감추는 데 있다. 다 쓸 데가 있는 건 사실이다. 가격차이도 천차만별이고 초심자에게 중요한 부위를 안 준다는 것도 사실이다.
#11
턱막이로 일하다 보면 갑옷의 두께와 짐승의 턱 힘과 이빨 길이가 서로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 받는지 알게 된다. 감각은 계산기나 연필, 종이 없이도 상호작용을 매끄럽게 정리한다. 감각 덕분에 기술이 놓치는 틈을 메꿀 수 있다. 물론 살아 남았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긴 하다.
#12
신비주의 같은 얘길 하자는 건 아니지만 가끔 짐승이 턱을 벌리는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갈 때가 있다. 이빨에 맺힌 침방울이 선명하게 보인다. 가시를 잔뜩 세운 완갑을 휘둘러 짐승의 턱에 물리면 다시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내 목숨이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고 갖은 수를 다 쓰는 모양이다. 사실 뻥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날 좀 우러러 보고 내 삶에 실존이 있다며 감탄한다.
#13
다른 턱막이가 자기 경험을 얘기하면 머리 속에 질투심이 솟구친다. '어쩌라고? 그래 너 잘났군. 그런 경험을 얘기하면 네가 잘난 줄 아나? 난 가시 완갑으로 네 턱을 부술 수 있어. 넌 눈물을 질질 흘리겠지.' 그러곤 입으로 대답한다. "유익한 이야기입니다. 무전 채널 교환할까요?"
#14
난 너무 뒤틀린 것 같다. 나에게 권력이 없다는 데 감사한다. 하지만 턱막이는 진짜 좋은 직업이다. 나 같은 겁쟁이도 용기 있는 사람으로 덮어주는 게 턱막이다. 정말 다행이다. 짐승들이 턱이 아니라 전략미사일로 공격을 했으면 미사일 방어체계가 이런 영광을 뺏어 갔을 것이 아닌가?
#15
사냥꾼들의 모임에 나갔다. 누가 날 추켜세우더라. 같잖은 일이다. 입이 벌어진 건 사냥하다 다쳐서 근육이 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그렇다. 그 사람이 말하더라. "정말 대단해요. 턱막이님 같은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아쉬워요." 빈말이다. 같잖은 빈말. 그 사람이 계속 발끝으로 내 발끝을 건드렸다. 같잖다. 아마 사냥꾼 무리를 옮기게 하려고 유혹하는 걸 거다. 뭐 옮겨도 상관은 없다.
#16
살다 보니 꼭 속는 게 나쁜 건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속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속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인생 편하게 퉁치려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현명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현명함은 현명하지 못 한 삶에서 현명함을 끌어내는 것이다.
#17
그 여자는 사냥꾼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우두머리 때문에 처음으로 티라노사우루스 사냥에 나섰다. 엄밀히는 나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사실 정말 해보고 싶었다. 프로는 자신의 상황을 원망하지 않는다. 발끝을 살랑이던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들었단 이유로 위험한 계약에 서명해도 동기 부여할 수 있는 게 프로다.
#18
가끔 동기 부여가 안 될 때도 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껌을 씹듯 내 갑옷을 씹었다. 내 경험 밖의 문제였다. 다른 사람이면 두 동강이 났겠지만 나는 세 동강이 났다.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우두머리는 내가 없었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거짓말! 다신 속나 봐라!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용했을까!
#19
원래 이용이란 개념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계약은 서로를 이용함을 문서로 잘 정리해둔 것이다. 나도 우두머리를 이용하고 있으니까. 사실 내가 훨씬 잘 이용하고 있다. 굳이 그 사실을 밝힐 필욘 없다. 사냥할 때도 짐승이 사냥당한다는 기분이 들게 하면 안 된다. 짐승은 턱막이 하나만 바라보게 해야 한다. 정신을 차릴 때 즈음이면 화살로 화장을 하겠지.
#20
우두머리는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를 아주 하인처럼 부리고 있다. 자유를 얻어야 한다. 굴종의 열매는 언뜻 보기엔 달다. 우두머리가 내 머릿결을 만지거나 갑옷 입는 걸 도와줄 때면 속아넘어가곤 한다. 그러나 나에겐 진실을 보는 눈이 있다. 진실을 보는 눈은 현상의 생김새에 얽매이지 않고 그 안에 든 실질만을 본다. 인간은 굴종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21
굴종이 나쁠 것은 없다. 한 번 사는 삶이고 각자의 삶의 형태는 다 다른 법이다. 무엇이 나쁘다, 좋다 말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받아들이기 싫은 부분도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안고 사는 게 더 진보하고 발전한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두머리가 이번 일이 끝나면 사냥은 관두고 그 동안 모은 T스톤 들고 작은 섬에 가서 둘이서 밭을 일구며 살자고 했다. 꽤 멋질 것 같다.
#22
우두머리가 죽었다. 내가 사냥하다 넘어졌고 팔 밖에 붙인 가시가 거꾸로 찔렸다. 짐승이 내 다리를 잡아당기자 우두머리가 갑옷 없이 턱막이 역할을 했다. 그 여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수혈했으면 살았을 텐데. 곱씹어도 울분 터지는 일이다. 굴종의 세월도 이젠 끝났다. 밭 같은 건 필요 없었다.
#23
난 그 여자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자꾸 생각나고 꿈도 꾼다. 한땐 죽음이란 게 합리적인 제도라 생각했다. 누구나 겪는다는 게. 이제 와서 생각하니 꼭 누구나 죽을 필요는 없다. 죽고 싶은 사람만 죽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알아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죽어야 하나.
#24
한동안은 우울했다. 이제 괜찮다. 다시 머리에서 질투심도 돌고 열등감, 비아냥도 재를 뿌리고 다닌다. 우두머리는 죽었고 삶은 돌밭에서 뒹구는 거 마냥 굴러간다. 짐승들은 어제도 오늘도 턱을 놀린다. 이제 넘어지지 않게 갑옷을 개량했다. 왠지 며칠 안에 그 여자보다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거의 확신이 온다. 난 성욕 넘치는 탐욕스러운 중년 남성이니까.
#25
오래 생각했다. 그 여잔 못 잊을 거야. 나중에 사냥할 힘이 없을 정도로 늙으면 그 섬에 가 보자.

12. 타이포그라피와 전쟁

#1
북소리가 울렸다. 울타리 너머에 참호를 파고 죽창으로 가시밭을 꾸몄다. 화살이 날아와 북재비를 맞추자 북소리가 멎었다. 다른 북재비가 두터운 갑옷을 입고 북을 잡았다. 숲에서 적들이 몇 번 함성을 질렀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29분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시작했다.
#2
백부장이 십장을 데리고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점검했다. 붉은 물감을 담은 통이 병사들 손을 오갔다. 군의관이 붉은 물감은 피와 헷갈린다고 바르지 말자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양 눈썹부터 입술까지 줄을 이었다. 손이 매우 떨렸다. 십장이 자신이 없으면 큰 방패를 들고 궁수를 지키라고 했다.
#3
공병들이 울타리 근처에 폭약을 심었다. T스톤을 몇 수레는 써서 구해 온 화약이었다. 공병들은 위치를 숨기려고 화약을 안 심은 구덩이를 수십 개 판 다음에 새 흙으로 덮었다. 적들이 밀려왔고 폭약은 불발이었다. 부족장이 백부장의 뺨을 때렸다. 11시 51분. 적어도 점심 시간 이후에는 싸울 줄 알았다.
#4
목탑으로 올라가 방패를 들었다. 궁수가 화살을 쐈다. 적들은 안킬로사우루스의 가죽을 덧댄 넓적방패를 두르고 전진했다. 적들이 노래를 불렀다. 라 마르세예즈에 가사를 새로 붙였다. 적들이 100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폭약은 또 불발이었다. 울타리 문을 열고 포수들이 행진했다. 방패병들이 포수들 앞에 섰다.
#5
총알은 다 합해서 200발이 안 됐다. 총성이 터지자 연기 때문에 전장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백부장이 포수들이 돌아올 때까지 화살을 쏘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다. 적도 방패 사이로 총을 쐈다. 총성이 울리다 멈췄다. 비명과 신음도 연달았다. 적들이 투석기를 끌고 왔는데 고장 났는지 쓰진 않았다. 우리 투석기도 그랬다.
#6
늘 풍문이 돌았다. 어느 부족이 공룡을 길들여 용기병을 만들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11시 55분. 이젠 봤다. 숲에서 20기 정도가 튀어나왔다. 너무 빨라 화살로 맞출 수가 없었다. 연기가 걷혔고 돌아오지 못 한 포수들은 화약을 재다가 용기병들의 칼과 창에 찢겼다. 방패병들은 대다수가 쓰러져 죽었다. 적들의 총알이 더 셌다. 적들이 유명한 화약 장인을 모셨다는 게 사실이었다.
#7
11시 57분. 전장은 정리가 됐다. 아군은 용기병에 쓰러졌다. 울타리 문은 다시 잠갔다. 적은 방패를 두른 채 멈췄다.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부족장과 백부장과 참모들이 내가 있는 목탑으로 올라와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폈다. 적의 부족장이 만용을 부렸다. 방패병들과 같이 행진하다 총알을 맞았다.
#8
적의 백부장은 꽤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작전을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부족장의 주검을 끌고 군막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가 결정을 못 한 탓에 우리도 점심을 먹지 못 했다. 14시가 넘도록 적의 전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배가 매우 고팠다.
#9
14시 30분. 적이 숲으로 다시 물러났다. 보좌관이 부족장에게 사신을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다. 백부장이 나를 불렀다. 글씨를 잘 쓴단 이유로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시작은 이랬다. 귀하 부족의 상실을 위로합니다. 그 뒤엔 다음 주엔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전쟁은 빨리 정리하고 각자 농지로 돌아가자, 부족장 장례도 치러야 하지 않냐, 이런 내용이었다.
#10
14시 50분에 담이 크고 발 빠른 병사가 깃발을 매고 나갔다. 기다리는 동안 부족장이 공병대장을 참수했다. 의미 없는 짓 같았다. 부족장이 화약을 직접 샀을 텐데 왜 공병대장 머리가 잘리는가? 나는 2주 전까지 사무실에서 타이포그래퍼로 일했다. 아직도 실감은 잘 안 난다.
#11
15시 55분에 병사가 돌아왔다. 그 동안 들판에 널린 아군 사망자와 부상자를 데리고 울타리로 돌아왔다. 16시 30분에 아군에서 병사 넷이 나가 커다란 일산을 세웠다. 날도 흐린데 참 의미가 컸다. 진흙탕으로 책상도 하나 들고 나가 세웠다. 적의 보좌관이 나왔고 아군에서도 보좌관이 하나 나갔다.
#12
늦은 점심을 먹었다. 조리장이 말린 고기에 후추를 적당히 쳐서 뿌렸다. 이 정도 요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17시가 넘자 보좌관이 돌아왔다. 왜 망할 문서에 서명을 안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군막에서 일하는 친구 말을 들었다. 적은 조인식에 백부장이 나오니 아군도 백부장을 내보내겠다고 했는데, 적들은 부족장이 나오라고 요구했다.
#13
의전 문제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 조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일산 근처에 모닥불을 피웠다. 교대로 경계 근무를 섰다. 21시가 넘어서 부족장이 가벼운 차림으로 울타리 밖으로 나갔다. 보좌관이 무전을 치자 숲에서 적의 백부장이 갑옷을 벗고 나타났다. 서명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부족장과 적의 백부장이 악수를 했다.
#14
적들이 느리게 북을 쳤다. 후퇴였다. 횃불이 멀어졌다. 백부장이 군영을 돌아다니며 평화협정을 설명했다. 저녁이나 주고 얘기하면 좋으련만. 하루 종일 가슴이 뛰던 게 그제서야 가라 앉았다. 부족장은 수레를 타고 돌아갔고 보좌관들도 따라갔다. 병사들은 남아서 짐을 꾸렸다. 자정이 넘자 전사자의 가족들이 시체를 확인하러 왔다.
#15
사제들이 돌아다니며 각자의 종교대로 죽음을 마감했다. 유족들은 조용히 울었다. 백부장이 장례 절차와 유족연금을 설명했다. 경계 병력을 제외하고 소집된 인원은 짐을 옮긴 뒤 해산할 거라고 했다. 짐이 무거웠다. 부족 청사에 도착해 창고에 짐을 쌓았다. 십장들이 인원을 세며 급여를 나눠줬다.
#16
후발대로 온 병사들이 부족 청사에 왔다. 얘길 들으니, 공병대장의 아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부족장은 몸을 씻은 다음에 누빈 이불 위에 누울 것이다. 공병대장은 이제 썩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공병대장 아내의 원한 얘기가 아이들 사이에서 떠돌 것이지만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17
2주 전 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워프를 당했다. 부족장은 병사를 끌고 다니며 조난자들을 데려왔다. 소집을 해산하고 천막으로 돌아왔다. 신입들이 머무는 숙소였다. 지린내가 났다. 내가 흙을 바르게 펴 놓은 자리에 다른 놈이 거적을 깔고 누웠다. 구석에 가서 바닥을 다지고 거적을 깔았다. 마음의 눈으로 컴퓨터를 켜고 그래픽 프로그램을 열었다.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18
땅이 흔들렸다. 적은 자질구레한 데 매달리지 않았다. 부족 청사를 점령하고 부족장을 잡는 데만 집중했다. 적의 부족장은 교활했다.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우리 부족장은 수갑을 찼고 머리에 헝겊을 썼다. 그는 공병대장보다 14시간 정도 더 살았다. 적은 목을 베진 않았고 대신 맸다. 백부장과 십장들도 나란히 매였다. 전부 옷을 벗겼다.
#19
부족의 청사는 불탔다. 창고의 무기도 다 불탔다. 적의 병사들이 남은 사람들을 붙잡았다. 잠시 후에 동이 텄다. 적의 백부장이 충성을 선언하는 자에겐 이전의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했다. 나는 재산이 없었다. 바로 충성을 선언했다. 적의 병사가 물통을 던져줘 물을 마셨다. 이제 적의 병사가 아니었다. 시간은 7시였다.
#20
일부는 충성을 거부했다. 그들은 산기슭으로 가서 구덩이를 팠다. 병사들이 칼을 들어 그들을 내리쳤다. 저항은 없었다. 그들은 숨이 끊어져 아래로 떨어졌다. 병사들이 흙을 덮었다. 백부장이 문서의 글씨를 썼던 자를 찾았다. 다들 나를 지목했다. 오줌을 쌀 것 같았다. 백부장이 나에게 포고문 내용을 불렀다. 받아서 적었다.
#21
백부장이 원래 직업이 뭐였냐고 물었다. 타이포그래퍼라 답했다. 백부장이 웃으며 자신은 타이포그래피 회사에서 회계로 근무했다고 했다. 자신이 2년 전에 이곳에 왔으니 그 전에 컨퍼런스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잠을 못 자 피곤해 천막으로 돌아와 누웠다. 오전 11시 29분을 확인하고 잠이 들었다. 이제 겨우 15일이 지났다.

13. 마지막 택배

#1
AX3048510YC14. 평생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번호다.
#2
인터넷에서 이어폰을 주문했다. 값이 제법 나가고 음질이 좋은 물건이었다. 4년 넘게 쓴 이어폰을 버리고 새로운 이어폰을 쓸 생각이었다. 주문을 하고 카드로 결제했다. 택배가 출발했다는 메일도 받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퇴근해서 소파에 누워서 2시간 정도 옛날 음악을 들을 생각이었다.
#3
퇴근길에 차가 막혔다. 라디오에서 가스관 공사 중에 폭발이 일어나 사람들이 실종됐단 얘기를 다뤘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는데 받지 않았다. 백미러를 보는데 뭔가가 번쩍했다. 동시에 굉음이 들리더니 차체가 앞으로 쏠렸다. 그렇다. 여기 온 사람들 다 겪는 일이었다.
#4
택배는 한동안 잊었다. 새로운 직장에 온 것처럼 적응하느라 시간을 꽤 썼다. 머물 곳을 마련하고 2주치 이상의 식량을 모았다. 해변에서 파도에 굴러다니는 상자를 뜯어 보드카도 몇 잔 마셨다. 다른 사람이 건전지를 찾더니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은 건전지를 휴대용 오디오에 끼웠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며 해변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보니 떠올랐다.
#5
평소엔 운송장 번호를 외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따라 앞으로는 받은 택배의 운송장 번호를 수첩에 적어두는 습관을 만들까 생각했다. 몇 번 안 하고 때려치울 습관이었지만 분명히 적어 뒀다. 땅에 묻어둔 물건을 꺼냈다. 며칠 전에 눈물을 흘리며 지구를 잊자고 묻은 거였는데.
#6
계산을 해봤다. 특정한 지점에서 워프가 일어날 확률과, 특정한 지점에 나의 택배가 놓여 있을 확률을 구했다. 변수를 대충 상상해서 집어 넣은 것이라 딱히 의미는 없었다. 행운이 있다면 그 택배도 이곳에 왔겠지. 어느 날 마법처럼 길을 가다가 택배 상자를 발견하고 운송장에 이 번호가 쓰인 거다. AX3048510YC14.
#7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울화가 치밀었다. 택배가 오질 않는다니. 보낸 지가 며칠인데 아직도 오질 않다니! 택배는 영원히 안 올 거다. 차라리 재림이 먼저 일어나겠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공무원들이 천국으로 갈 사람들의 명단을 스프레드시트로 정리하는 동안에도 내 택배는 어느 트럭이나 물류센터에 갇혀 오지 않을 것이다.
#8
남편은 내 장례식을 치렀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부재중 전화를 정리하다 택배 얘길 듣겠지. 택배 상자를 받고 바닥에 엎드려 오열할 것이다. 아니면 다른 여자랑 소파에서 내 얘길 하며 낄낄거리고 있겠지. 그 여자가 내 이어폰을 끼고 있을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간에 나한테 이어폰이 있지 않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
#9
다른 섬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해준 사람은 의학박사 학위도 받고 정신질환 관련 학술지 편집장으로 근무했지만 이곳에선 동물 똥을 묵혀 밭에 뿌리고 있었다. 내가 고민을 얘기하자 똥 무더기를 밭 고랑에 퍼붓더니 다른 빌어먹을 이어폰을 찾아서 만족하라고 하더라. 다른 사람 얘기를 들으니 그 사람은 월급날에 워프를 겪었다고 했다.
#10
모임을 만들었다. 마지막 택배를 받지 못 한 사람들의 모임. 다들 받았어야 할 택배를 얘기했다. 오렌지, 화장품, 키보드, 시계, 식약청에서 금지한 약물 등 다양했다. 모임의 마지막엔 다 같이 손을 잡고 원을 그렸다. 그리고 서로에게 말했다. "그 택배를 받지 못 하더라도 다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기만이었다. 그 택배를 받지 못 하면 우리의 삶은 완전해질 수가 없다.
#11
그 사람은 다정했다. 택배를 받지 못 하더라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이혼을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 사람도 그렇다고 했다. 이곳의 부족들은 원할 경우 법으로 그곳에서의 혼인을 정리해줬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 아니냔 빈정거림도 많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마음을 정리할 공식적이고 법적인 게 필요했다. 나는 8년, 그 사람은 6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12
2년 정도는 행복했다. 결혼이 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아내가 다른 섬에 나타났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 사람의 아내가 눈 앞에 나타나 그 사람과 포옹할 때도 믿지 않았다. A4지에 손으로 적은 부족법원의 재판 통지서가 온 다음에야 믿었다. 재판은 늘어졌다. 판사가 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다른 섬에서 판사를 불러오기로 하면서 미뤄졌다. 오랜만에 택배를 떠올렸다.
#13
마지막 택배를 받지 못 한 모임은 계속 이어졌다. 마지막 택배를 받지 못 한 사람은 매일 이곳으로 왔다. 혹시나 이 곳으로 내 택배가 왔더라도 다른 사람이 먼저 뜯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 택배는 영원히 찾을 수 없다. 세상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타임머신을 만들어 과거로 돌아가 내 택배를 찾아도, 어딘가의 나는 택배를 찾지 못 할 것이다.
#14
다른 부족 사람들도 구경을 왔다. 지구에서도 활동한 저명한 판사들이 뗏목을 타고 와서 재판부를 구성했다. 다들 무전기를 켜 놓고 재판의 결과를 기다렸다. 다른 부족의 거물 변호사들이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아무도 비용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일을 맡을 권한을 사겠다며 가격을 제안했다. 나는 AX3048510YC14를 찾아 달라고 말했다.
#15
똑똑한 사람은 돈을 좇는다. 어떤 분야의 발전을 원한다면 그 분야에 금괴를 올려두면 된다. 그러면 순식간에 길이 닦이고 매뉴얼이 생기고 저서가 편찬될 것이다. 3명이 합법적으로 공유한 2회의 결혼은 앞으로 발생할 일들에 앞서 좋은 판례가 될 것이다. 무전기는 인터넷을 대체해 소식을 널리 알렸다. 북쪽의 설원 섬에서 스밀로돈들도 이 문제를 두고 의견을 나눴을 거다.
#16
상자는 작았다. 변호사들은 상자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내가 워프를 겪은 장소에서 33km 떨어진 곳에서 동시에 다른 워프가 일어났다. 화물트럭이 빛의 터널을 지나 모래 더미로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쓸 만한 물건을 수집하는 중에 상자를 발견했다. 그 트럭은 비동기 워프를 겪으며 나보다 늦게 왔다고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100억 분의 1 이하라고 했다.
#17
플레이어를 구해 이어폰을 꽂았다. 변호사들에게 이어폰 색깔을 잘못 말했다. 음질은 좋더라. 사기꾼들 같으니. 하지만 사람들은 스토리를 원했다. 내가 실패한 결혼을 겪더라도, 내가 간절히 원하던 무언가가 보상했을 거라고. 내가 원하는 보상은 이렇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그 사람이 좀비가 되고 내가 샷건을 들고 있길 소망한다. 어쨌건 그 이어폰은 변호사들한테 집어 던졌다.
#18
AX3048510YC14.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찾는다면 나한테 어느 정도의 보상은 되겠지. 정말 잊을 수 없는 번호다. 처음엔 잊어서 수첩을 파헤쳐야 했지만 말이다.

14. 타조의 일기

#1
숲은 날 배신했다. 나는 분노를 느꼈다. 한참 동안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제 나는 분노를 가라 앉혀 이 기록을 남기노라.
#2
숲의 법 2조에 따라 동물친구들은 입을 다문다. 나는 규칙을 지켰다.
#3
숲의 법 14조에 따라 붓으로 글을 쓰면 안 된다. 나는 규칙을 지켰다.
#4
숲의 법 62조에 따라 알파는 알파벳 전체의 행동을 감독하고 관리한다. 알파는 4년 전에 황달로 죽었고 승계순위상 내가 알파다.
#5
71조에 따라 숲에서 3개월 이상 해가 뜨지 않으면 모든 문서를 폐기한다. 동물친구들은 다음 일출까지 생존 대기한다. 대기 기간 동안 알파는 연 1회 이상 현황을 점검하고 기억한다. 나는 해당 조항을 준수했다.
#6
마지막 조항. 해님이 1년 이상 두절될 경우 놀이는 취소된 것으로 본다. 이 경우엔 알파의 재량에 따른다. 황달로 죽은 알파는 이 문제에 관해 나에게 인수인계하지 않았다. 하긴 고열에 눈이 뒤집혔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7
놀이 취소로 인해 숲의 법은 사실상 효력이 중지되었다. 그러므로 알파, 아니 임무지휘관인 나는 나의 일기 작성을 승인한다.
#8
D-1567. 근무 중에 전화를 받았다. 상관이 호랑이를 소개했다. 눈빛이 형형하고 사납다. 호랑이랑 악수를 했다. 무기 판매 얘기를 했다. 속을 떠보는 것 같았다.
#9
D-1344. 면접이 끝났고 나는 숲에 들어왔다. 어디까지가 면접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놀라운 얘길 들었다. 이 얘기는 나의 보안규정에 따라 검열한다.
#10
D-155. 훈련을 마쳤다. 훈련 내용은 나의 보안규정에 따라 검열한다. 그러나 쉽지 않은 훈련이란 것 정도는 써두겠다. 야생동물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타조가 됐다. 타조랑 전혀 닮지 않게 생겼단 이유로 말이다.
#11
D-3. 모든 일정이 취소됐단 얘기가 돌았다. 호랑이가 숲에서 쫓겨나고 모든 게 뒤집힐 거라고 했다. 다들 손을 놓고 잡담만 하고 있다. 상관이 부르더니 나무가 베일 거니 휴가를 쓰라고 했다. 몇 년 한 게 허탕이 됐다.
#12
D+0. 자정에 호랑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조국 얘기를 하길래 연극을 했다. 같이 온 승냥이가 티켓을 넘겼다. 이제 숲을 떠나 물로 가라고 했다. 물은 몹시 위험했다. 가라 앉는 법은 알아도 뜨는 법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나는 그리 진지하진 않았지만 유능했다. 놀이가 시작됐다. 알파는 미어캣, 베타는 나, 감마는 노르웨이숲이었다.
#13
D+0.5. 동물친구들은 다 같이 깔때기로 갔다. 국자가 동물친구들을 푸더니 깔때기에 박았다. 동물친구들이 비명을 질렀다. 노르웨이숲은 깔때기에 몸이 반으로 나뉘었다. 우린 노르웨이숲의 보물을 챙겨줬다. 보물은 알파가 제안한 우리만의 비밀이었다. 안녕, 노르웨이숲.
#14
D+3. 처음 사흘은 굴을 팠다. 굴이 없으면 동물친구들은 활동을 못 하니까. 해님이 사흘 동안 얼굴도 안 비추다가 드디어 비쳤다. 숲은 당혹스러워했다. 위치도 날짜도 안 맞았다. 그래도 깔때기를 찾는 놀이는 계속 하기로 했다.
#15
D+185. 알파랑 나는 계속 놀았다. 이제 놀이가 질렸다. 새 국자를 찾으려고 했는데. 깔때기는 안 보였다. 이날 마지막으로 해님을 봤다.
#16
D+300?. 해가 4달 넘게 안 뜬다. 종이를 태웠다. 알파는 몸이 많이 안 좋았다. 놀이가 취소될 가능성을 내가 얘기했지만 알파가 화를 냈다.
#17
RST란 걸 알게 되었다. 물에서도 나름 시간을 재는 법이 있었다. 개척자들은 결국 방법을 찾아낸다. 날짜를 비교해보니 얼마나 오차가 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끔찍하다. 어떤 해님을 보고 이야기한 걸까? D+550일대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난 RST가 내키지 않는다. 내 시간이 편하다. 그게 좀 더 명확하게 떠오른다.
#18
D+619. 이날은 정확히 기억한다. 알파가 죽었다. 양지 바른 곳에 묻었다. 이제 내가 알파가 되었다.
#19
D+837. 해가 떴다. 숲이랑 연락이 닿았다. 숲은 동물친구들을 잊어버렸다. 미어캣도, 노르웨이숲도, 타조도 기억 못 했다. 그러나 이론의 뼈대는 잡아가는 것 같았다. 소름이 끼쳤다. 다시 해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20
한 가지 알게 되었다. 물에서 생긴 오차는 숲에서도 생긴다. 물살이 수면을 흔들면 바깥의 숲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숲에서도 물 속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오차를 감수해야 한다. 수면에 보이는 타조의 모습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 타조알이 보이더라도 울 거 없다. 물 속의 타조는 타조알로 돌아갈 수 없다. 숲엔 타조가 있다. 타조는 물 속에 있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21
티 내지 않았지만 다른 동물친구가 나를 알아 보았다. 호랑이는 보험을 들어 놓았다. 알파가 제안한 건 알파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우린 서로 다른 물에 사는 줄 알았다. 우린 부둥켜 안고 울었다. 이제 수중생물로 진화해야 했다. 같이 숲에서 온 친구가 있으면 반갑다. 이때부터 나도 RST 세는데 익숙해져서 그런가 날짜를 정확히 기억을 못 했다.
#22
몇 년이 지났다. 동물친구들과 만나서 사냥을 다녔다. 물 속 생활도 나름 즐거운 구석이 있다. 어디나 풍부한 양분과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동물친구들은 애써 가능성을 무시했다. 하지만… 소문은 실체가 되고 팔다리가 생겨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동물친구 몇이 맞아 죽었다. 숲에서 괴물이 온 게 분명했다. 괴물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괴물이 숲에서 온 것만은 분명하다.

15. 내가 하는 일

#1
나는 일 때문에 먼 불안정섬에 나왔어. 소나무 같은 게 많고, 추운 곳이야. 오늘은 몸상태가 좋아서 편지나 써둘꺄 해. 편지라니. 원래 지구에 있을 땐 편지 같은 거 쓴 적 없었어. 여기선 편지가 낙이지. 화물 워프홀에 편지 보내면 간부들이 검열하니까 이건 사람 손으로 보낼게.
#2
지금 옆에 꽃을 태웠는데 향이 독특해. 전에 만났을 때 내가 하는 일이 농부라고 했잖아. 사실 그렇게 떳떳한 일 하지 않아. 여긴 야생이고 거지 같은 곳이야. 편지로 아무리 예쁜 말 써도 현실이 달라지진 않더라고. 내 도덕심은 말라붙었어.
#3
네 어깨가 생각나. 햇볕에 타서 살이 일었지. 여긴 바람이 차. 배탈이 자주 나고 어떨 땐 설서가 너무 심패서 몸 안에 있는게 죄다 쏟아질 것 같더라고. 여기 와서 몸무게 재 본 적은 없는데, 물가에 가서 내 꼴을 보면 거식증 걸린 10대 같아. 이제 40킬로그램도 안 될 거야.
#4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알아? 그 뭐 같은 워프에 휘말려 온 사람들 잡아다가 무법섬에다가 파는 거야. 너나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처럼 넋이 빠져서, 전화기만 붙잡고 있는 사람들 말이야. 뭐 그 사람들 애기들 같지. 착한 사람도 있을 거고, 나쁜 사람도 있을 거고. 여러 사람 있을 거야.
#5
충격이겠지. 솔직히 이 편지를 부칠 자신도 없어. 몸 상태가 좀 나을 때마다 한두 단어씩 늘리고 있어. 이 고통이 죗값이라고 생각하기도 해. 하지만 그렇진 않을 거야. 우린 아무 상관도 없는 걸 상관이 있는 것처럼 연결하니까. 어떤 놈은 죄 짓고 오래 살다 고통없이 죽겠지.
#6
영화 기억 나? 막 노예 감독관이 노예한테 채찍질하고, 사람들은 그걸 당연히 여기고. 현대인을 그거 보고 감수성이 없다고 하잖아. 난 여기서 느껴. 조건이 약간만 달라져도, 우린 채찍을 든 사람이 되거나 채찍에 맞는 사람이 딜 거란 걸. 난 운이 좋았지. 일단은 든 쪽이니까.
#7
채찍을 들었다고 딱히 인생이 행복한 건 아냐. 채찍을 맞는 쪽은 분명 불행하겠지만. 채찍을 든 놈이 행복할 거라 믿는 건 환상이야. 근데 행복한 사람이 없어도, 채찍은 내려가지 않아. 먹고 사는 건 행복과는 무관한 문제란 생각이 들어.
#8
많은 징병관들이 여러 나무를 찾아다녀. 어떤 나무의 뿌리를 갈면, 마음이 진정되거든. 향초를 만들어 피우면 기분이 좀 나아져. 다른 징병관이 내가 있는 천막에 향초를 피워줘.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나에겐 다정해. 내가 토한 것도 닦아줘.
#9
위선이겠지. 나는 다른 사람을 그리 괴롭히면서 나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게. 편지에선 이렇게 죄책감을 말하지만, 조난자들의 섬에 가면 끈으로 사람을 묶고 유리조각을 진액에 짓이겨 붙인 채찍으로 때려. 머리가 아픈데 자꾸 내가 했던 일이 떠올라서 괴로워.
#10
요 며칠은 몸이 좀 나아졌어. 먹을 것도 먹고, 똥도 잘 쌌어. 그것도 다시 시작했어. 내가 하는 일을 다시 생각해봤어. 여기서 도망가면 입막음하겠다고 쫓아올 거야. 이 편지는 내 수첩에 끼워뒀어. 징병대장이 식사하는데 자식 얘기를 해. 자식을 정말 사랑하나봐.
#11
이건 인신매매도 아니고, 노예제랑도 무관하대. 부족에서 징병 영장을 받았고, 징병 대상을 공급하는 것 뿐이래. 그 부족이 어디 있는진 아무도 몰라. 영장은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야. 붉은 잉크로 글씨를 썼고, 금박으로 꾸미고 도장도 찍었어. 커피하우스란 사람이 줬대.
#12
커피하우스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죽였던 징병관 무리도 그런 말 하는 거 보면 여기의 전설 같아. 징병관들은 소속 다르면 서로 죽여. 이 일에 경쟁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서로 무전도 열심히 훔쳐들어. 먼저 가서 조난자를 싹쓸이해야 하니까.
#13
몇 주 바빠서 이 편지 썼다는 것도 잊어 버리고 있었어. 그 일을 하고 왔어. 너는 한적한 섬에서 오늘도 대장간에서 땀을 흘리고 있겠지. 시뻘겋게 불길이 올라도, 일을 마치면 들판으로 나가서 건강한 바람을 쐴 수 있을 거야. 난 갈 데가 없어. 널 만나러 가지도 못 하지.
#14
들은 얘기인데, 어디 징병관이 조난자를 잡아다 뗏목에 태웠대. 정원보다 한참을 초과해서. 가라앉았는데 도망갈까봐 손목에 묶은 끈을 안 풀어줬대. 그냥 이 모든 게 견디기가 어려워. 잠을 자면 악몽을 꿔서 해 뜰 때까지 눈만 감고 있어.
#15
가장 나쁜 건 워프야. 워프가 아니었다면 우린 이렇게 되지 않았어. 이건 확실하게 워프가 나빴다고 말할 수 있어. 확실하게 나빠. 내가 선한 인간은 아니겠지만, 워프에 너무 큰 책임이 있어. 기근에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벌할 수 있을까? 워프는 기근보다 더 해.
#16
쓴 걸 다시 읽어봤는데 변명 같았어. 보내지도 못 할 편지가 길어지고만 있어. 뭔가 떳떳한 일을 하고 죽고 싶은데, 이 일 하다간 내가 언제 죽는지 알지도 못 하고 죽을 것 같아. 갑자기 뒤에서 곤봉을 맞을수도 있고, 칼에 찔릴지도, 화살에 꿰뚫릴지도 모르지. 그 순간 캄캄해질 거야.
#17
조난자를 잡으러 갔어. 잔해 밑에 숨소리가 들렸어. 공포에 줄였지만 숨길 수는 없는 크기였어. 다른 징병관이 근처에 있나 봤어. 아무도 없었어. 물병을 담은 자루를 잔해 밑에 넣었어. 거기엔 없다고 다른 징병관들한테 말했어. 그 일 때문에 기분이 약간은 편해졌어.
#18
징병관들은 정의 같은 게 듀랑고에 일어날 일이 없다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세상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도 있어. 죄책감을 느끼지만 죄를 저지르는 나도 있겠지만, 죄를 벌하겠다고 자기 목숨을 걸 인간도 있겠지.
#19
누가 우리를 죽여서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하면 어떡할까? 나는 저항해야 할까? 요새 악몽을 꿔. 정의롭고 잔인한 괴물이 나타나서 징병관을 찌르고 베고 으깨. 싸움에 닳고 닳은 징병관도, 징병대장도 이길 수가 없어. 괴물은 바다에서 올라왔어.
#20
이 편지는 도저히 못 부치겠어. 가는 길에 버릴 거야. 그래도 내가 언젠가 이 일에서 도망갈 수 있으면 너랑 같이 먼 곳에 가서 살았으면 해. 서로 괴롭히지 않고, 양보하고, 사랑만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에 말이야. 내 마음은 병든 것 같아. 이건 평생 낫지 않을 것 같아.

16. 횡령범의 충고

#1
나는 준법시민이야. 법이 없을 땐 준법의 경계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게 준법시민의 자세지. 이걸 읽으면 꽤 질투가 날지도 몰라. 너는 꽤 성실히 일했는데, 어떤 인간은 이렇게 쉽게 벌어먹고 사는 게 화가 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성실함이 자연이 존중하는 척도는 아니잖아?
#2
자연은 생존의 가능성을 중시해. 나는 뻐꾸기 같은 위치야. 누군가의 열심에 기생해서 생존하는 거지. 하지만 그 열심을 존중하고 사랑해. 그 열심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동기부여할 자신도 있어. 열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열심이 보상박고 있단 피드백을 주는 거야.
#3
이건 횡령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야. 네가 있는 부족에서 네가 얼마를 버는지는 중요한 게 아냐. 네가 버는 게 버는 것 같단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한 거지. 티스톤의 흐름은 최대한 복잡하게 꾸려. 지불수단을 다양하게 만들고, 일정도 꼬이게 하는 거지. 누가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없게.
#4
불안정섬에서 개척자들이 통나무 수백 더미를 잘라서 해변에 놓았다쳐. 너는 그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 통나무를 모았는지 진심으로 칭찬해. 그러면 개수가 좀 안 맞는 건 다들 넘어가. 왜냐면 어쨌든 일이 잘 이뤄졌다고 믿으니까 말이야. 사라진 통나무가 다른 섬 장터에 가도 말이야.
#5
기생의 핵심은 그거야. 기생하는 대상을 파멸시켜서는 안 돼. 숙주가 죽어버리면 기생도 이뤄질 수 없어. 개척자들의 열심은 격려하고, 소중히 해줘야 해. 비록 횡령을 하는 입장이라고 사람들의 열정과 성실함은 아름다운 거야. 나는 마음 깊은 곳에 내 기반을 그렇게 닦았어.
#6
사실 위기가 없던 건 아냐. 부족장이 의심을 했지.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부족장도 횡령을 하고 있었거든. 자기가 챙길 몫이 줄어드니까 의심을 한 거야. 횡령범이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다른 횡령범이야. 우리의 생태지위는 그렇게 넓지가 않으니까 말이야.
#7
내가 나무 잔에다가 깃털나무 뿌리로 만든 술을 따랐지. 부족장이 얼굴이 벌개졌어. 나는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놨어. 부족장은 대놓고 무전기로 자신이 횡령한 물건을 팔아주는 사람들과 연락했거든. 그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선수를 쳤지.
#8
너는 부족의 살림을 담당하는 인간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실망했다. 부족장이 그렇게 말했지. 얼굴 낮짝이 대기권보다 두터웠어. 어떤 인공위성도 나사 조각 하나 안 남길 기세였지. 내가 그 동안 모은 서류를 보여주니까 술만 더 마셨지.
#9
모든 액션엔 반작용이 있어. 내가 돈을 벌면서 적을 한 명도 안 만들 수는 없지. 부족장이 나타나면서 그 동안 누려온게 꼬였어. 비율을 조정할까 했는데, 이 인간이 욕심이 정말 끝이 없다라고. 결론은 하나였지. 횡령범은 하나면 충분해. 리더처럼 말이야.
#10
부족장의 사주를 받은 부족원들이 화살을 빗나가게 쏘거나 하는 일이 있었지. 갑자기 자고 있는데 천막 밖에서 불길이 일기도 하고 말이야. 여기선 경찰을 찾아갈 수 없었어. 뭐 거기라도, 이런 일로 경찰을 찾아갈 순 없고 말이야.
#11
나는 계산을 했지. 앞으로 내가 여기서 횡령할 수 있는 총액과, 부족장이 더 이상 횡령을 하지 못 하게 막는 비용의 총액 중 어디가 더 무거운지 말이야. 그리 큰 차이는 안 났어. 횡령범이 지녀야 할 덕목. 감정 같은 거 버려. 비용 계산만으로도 세상 사는 데 참고할 증거는 차고 넘쳐.
#12
계산이 끝나자 불명확했던 것들이 명확해졌지. 난 결혼을 했어. 애인이란 대통령 후보와 같아. 선거날까지 몇 사람이 자신이 될 거란 꿈을 꾸지만, 결국 한 사람만이 선택되지. 다른 인간들은 패배자가 돼 집에 돌아가 잠을 못 이루고, 결혼의 이유는 간단했어.
#13
부족장을 없애고 남편을 새 부족장으로 앉혔어. 감투가 멋지기만 하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결혼은 강력한 동맹이야. 때로는 죽은 뒤에도 지속되는 동맹이기도 하지. 근데 이 결혼으로 문제점이 하나 생겼지.
#14
부족의 재산과 내 재산을 구분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졌어. 횡력을 하는 것보다, 부족 명의의 재산을 늘리는 게 나한테 더 이득이 되겠더라고. 여기선 회계보고서 같은 거 공개할 의무는 없잖아. 오랫동안 횡령을 해온 입장에선 이성적으론 이해하지만 감성적으론 낯선 일이었지.
#15
그런 일은 굉장히 긴 시간에 걸쳐서 생겨. 내가 부족의 일개 구성원으로 횡력을 하는 것과, 부족의 일을 통제할 수 있는 입장에서 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굉장히 다른 종류의 경험을 요구하지. 횡령은 새로운 형태로 혁신을 겪어야 했어.
#16
뭐 하는 일이 크게 바뀐 건 아니었어. 부족원들을 격려하고,그들이 먼 불안정섬에서 캐오는 자원이 공정하게 분배된다고 믿는 게 중요했지. 각자가 얼마를 몫으로 받는지를 비밀에 부쳤어. 이 대목이 중요해. 그러면 수치가 왜곡되거든. 그 틈 사이로 내 몫이 비집고 들어가는 거지.
#17
모두가 통나무를 10개씩 캐오고, 몇 명에겐 11개 만큼의 보상을 주고 나머지에겐 9개 만큼의 보상을 줬어. 그 사이에 남는 건, 부족의 지속가능성과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 이런 모호한 단어들로 때우고. 미래를 위해 네 몫을 조금 떼놓을게, 이러면 다들 납득했으니까.
#18
미래는 일어나지 않아. 미래를 생각하면 현실에 충실할 수가 없지. 언제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을 생각한다고 현재의 몫을 포기하니까 말이야. 굳이 궤변을 늘어놓자면, 횡령이란 자신이 누려야 할 현재가치를 최대화하는 걸 수도 있지. 리스크를 각오하면서 말이야.
#19
어쨌건 전통적인 의미의 횡령은 이제 나한테 끝났어.나는 부족 하나를 완전히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 부족이 지닌 가치를 최대화하는데 집중할 거야. 부족의 소유주들에게 돌아갈 이익을 키울 거야. 부족의 소유주가 누군지는 평생 모르겠지만 말이야.
#20
내가 몇 년 이 짓거리를 하면서 얻은 교훈은, 세상에 모두의 이익 같은 건 없다는 거야. 남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일어나서 너를 위해 살아. 내가 횡령을 하건, 부족을 말아먹건 그건 날 위한 일이야. 너도 그렇게 살아야 해.

17. 요리사가 된 이유

#1
내 손목시계는 아직도 돌아간다. 모르는 섬에 가면 정오 때 12시를 맞춘다. 하루 중 가장 큰 일이 점심을 하는 거다. 밤에는 다들 일을 쉬니까 저녁은 가볍게 먹는다. 이게 지구와 듀랑고의 큰 차이다. 여기선 야근을 해도 생산량이 꼭 늘어나는 게 아니니까.
#2
내 일은 요리사다. 지구에선 딱히 요리를 하지 않았다. 밤이면 마트에 가서 냉동 음식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요리가 있건, 난 몰랐다. 냉동 음식엔 칼로리, 탄수화물, 당류, 지방, 단백질의 성분표가 분명히 적혔다.
#3
현대인은 수치에 익숙하다. 콤프소그나투스는 자기 꼬리에 고기가 100그램 당 몇 칼로리인지 적고 다니지 않는다. 나무에 맺힌 열매는 자신이 독성을 품고 있는지 누군가 도전해 볼 때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듀랑고에서 요리사는 이 모든 지식에 첫 탐험가가 되어야 한다.
#4
이곳에서 처음으로 먹었던 음식은 이름 모르는 갈색 공룡의 고기였다. 파리가 날아다녔고, 믹서기에 간 것처럼 살점과 뼈가 뭉개져 있었다. 매가 고파서 살점을 뜯은 뒤에 직접 먹었다. 끔찍한 맛이 났다. 며칠동안 몸져 누웠다.운이 좋았다면 그대로 눈을 감았겠지.
#5
며칠 뒤에 입이 바짝 마른 채로 눈을 떴다. 입술은 찢어졌고, 배는 여지껏 못 느껴본 배고픔에 끔찍하게 몸부림쳤다. 땅을 기어 다녔다. 물가까지 기어가서 물을 마셨다. 물 위로 가지가 긴 나무가 자랐는데 열매가 달렸다. 열매를 먹었다. 쓴 맛이 났다.
#6
지구에선 너무나 당연해서 잊히는 사실이다. 인간은 수분이다. 뭔가 먹고 마시고 싸는 건 수분을 몸 곳곳에 재배치하는 과정이다. 처음엔 갓 입사한 회사원처럼 비효율적으로 이를 처리했다. 속이 뒤집어지고, 눈앞이 안 보이기도 했다.
#7
알게 된 정보를 저장할 방법이 많지 않았다. 새로운 식물이나 동물을 볼 때마다 아는 바위에 달려가서 적어둘까? 택배상자에서 수첩이나 펜을 찾는 날도 있었지만, 아닐 때도 많았다. 그러면 구비문학이 머리에서 태어난다. 내 머리가 그걸 다 기억하는 거다.
#8
아침이면 눈을 떴다. 위험한 짐승이 있나 한참을 살폈다. 흙을 캐서 뿌리를 자르고, 죽은 동물이 있나 보고 있으면 뼈와 살점을 뜯어냈다. 햇볕에 모든 걸 말렸다. 수분이 없을수록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자연엔 무엇도 마트에 납품할 만큼 풍성한 모습을 하지 않는다.
#9
자연을 알게 되는 건 연봉 인상과 같다. 어떤 과일이나 고기가 좀 더 내 입맛과 맞는지 알게 되고 그 지식만큼 행복했다가 곧 예전과 같아진다. 하지만 예전의 방식대로 살면 더 불행해진다. 마음은 살면서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한두가지 동기부여를 한다. 내겐 요리가 그랬다.
#10
꿈을 꾼다. 마트에 가면 향신료가 코너에 수십 종식 있다. 세상엔 나라의 이름만큼 선호하는 냄새와 맛이 있다. 그건 성적 지향만큼이나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문제다. 나 역시 오랜 여행 끝에 고향의 공항에 돌아오면 나는 냄새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고 듀랑고에서 재현하기를 원했다.
#11
사람들은 여러 얘기를 했다. 무법섬에서 벌어지는 전쟁, 불안정해역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온갖 풍문들, 난 그런 건 관심 없었다. 섬마다 이름도 없이 자라는 풀을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직접 씹어보기도 하고, 물에 불리고, 가루를 내고, 불에 태우기도 했다. 모르는 병도 수없이 걸렸다.
#12
듀랑고에서 무슨 병이든 두렵지 않다. 여기선 뇌졸중이나 암에 걸려 죽을 만큼 오래 살진 않을 거니까 말이다. 운이 나쁘면 죽는 거고 죽으면, 뭐 죽을 만 하니까 그런 거라고 납득할 거다. 수용의 5단계 같은 건 없다. 그런 건 현대사회나 겪는 마음의 질병이다.
#13
섬마다 수백 가지 풀이 있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 냄새와 맛을 내는 풀은 많지 않다. 뭘 먹어도 쓴 맛만 났다. 차라리 정치인에게 희망을 품는 게 더 현실적으로 보였다. 혀가 검게 변했고, 눈 밑이 누렇게 떴다. 목이 부어서 물 한 잔 못 마시는 날도 있었다.
#14
어느 날 특징 없게 생긴 풀 앞에서 멈췄다. 풀은 가뭄에 시들어 있었다. 열매인지, 종양인지 검고 비틀어진 게 달려 있었다. 지쳐 있었기에 그냥 지나갈까 생각도 했다. 근데 페나코두스 한 마리가 멍청한 얼굴로 계속 그 풀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발로 차서 쫓아내고 내가 맡았다.
#15
보따리를 열어서 말린 고기를 물에 불렸다. 칼로 썰고, 맛은 없지만 독도 없는 말린 풀떼기들을 풀어서 끓였다. 그 위에 페나코두스를 맛가게 한 풀의 열매를 가루낸 것을 뿌렸다. 거기 날씬 아마 섭씨 50도는 됐을 거다. 오물에 찌든 속옷은 허벅지에 들러붙었고, 바람은 썩은내가 났다.
#16
숟가락에 담긴 멀건 국물은 갈색빛이었다. 누가 거기다 휴지를 던져 놓으면 막힌 변기라 믿었을 거다. 하지만 코 끝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현대인의 감각을 어루만졌다. 좋은 냄새였다. 우리가 왜 그토록 서로를 혐오하고 전쟁을 벌였을까? 나는 이제 알 수 있었다.
#17
내가 좋아하는 냄새를 누군가 별로라고 말하면 그걸 어떻게 참을 수 있는가? 혐오와 전쟁은 결국 이 냄새의 부산물이었다. 나라도 이 향신료가 별로라고 누가 말하면 당연히 칼을 들고 찾아갈 것이다. 하지만 난 배울만큼 배웠으니 적의 몸을 베는 대신에 요리를 해줄 거다.
#18
나는 그 섬에서 한참을 지냈다. 혼자서 한 식문화를 형성했다. 다른 재료는 다 갖다 버렸다. 가루 낸 향신료만 보따리 가득 담고 섬을 떠났다. 안개 많은 늪섬에 가자 침울한 표정의 사람들이 모닥불 주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 표정을 유지할 생각이었을 거다.
#19
그들의 식사는 푸석한 빵보다는 그냥 밀가루 덩어리였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그 음식으로 속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물을 끓이고 그들이 갖고 온 재료를 다듬었다. 그 친구들은 내가 그래도 제지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곁눈질로 봤는데 콧구멍만 벌렁거렸다.
#20
물이 끓자 수증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침내 누군가 말했다. 도대체 거기다가 뭘 처넣은 거야?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몇 년만이라고 이 새X야! 그 친구들은 바닥까지 한 방울 남지 않게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그래. 난 그렇게 요리사가 된 거다.

18. 부족장 평판 회람장

#1
이 회람장은 되도록 곳곳에 뿌려서 많은 개척자들이 봤으면 합니다. 일단, 나부터 얘기하자면 툰드라 섬 쪽에 가는 원정대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파란색 원을 상징으로 쓰는 부족에서 간 건데요. 거기 부족장이 통나무 모은 걸 몰래 다른 부족에 팔았습니다.
#2
나도 추가합니다. 부족장이 자기 동생을 2인자로 앉힌 부족에서 일했는데, 뭐 그런 부족이 너무 많아서 거기 부족장이 이거 보고 열받아서 내가 누군지 찾아낼 수도 없겠죠. 암튼 그 동생 새X가 사냥 때마다 덫을 잘못 파놔서 많이들 죽었어요. 부족장 동생이 2인자인 부족은 가지 마세요.
#3
다른 사람들 쓴 거 봤는데 열받네. 내가 있던 데는 그 B로 시작하는 도시섬에 있는데. 아무튼 얘기가 좀 길어요. 거기 부족장이 사이코야, 무법섬에서 전쟁할 때 맨날 술에 취해서 전선에 나왔거든. 지도도 안 보고 작전 지시를 내렸어. 근데 일단 부족장이니 지켜야 하잖아.
#4
그때 우린 구체적인 전략 목표가 없었어. 어느 거점을 차지하겠다, 상대에게 어떤 조건을 끌어내겠다 그런 게 전혀 없었어. 명령이 내려오면 그냥 가서 싸웠지. 식량은 떨어지고, 무기도 없는데 전쟁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거야.
#5
그러다가 갑자기 서로 흰 연기를 피우더라고. 종전 선언이 된 거지. 짐 다 싸고 도시섬으로 철수한댔어. 급작스러웠지. 참모부에 일하는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협상 조건이 말도 안 되게 우리한테 불리한 거야. 사채업자도 이것보단 관대하겠다 싶더라고.
#6
이거 읽는 다른 핍박받는 개척자 여러분. 전쟁이 왜 갑자기 끝난지 알아요? 부족장이 도시섬에서 기르던 데이노니쿠스가 아프다고. 부족 수의사가 전쟁에 데려온 다른 동물들 있어서 그깟 데이노니쿠스 돌보러 갈 수 없다고 하니까 병력을 모두 철수시킨 거야.
#7
뒷얘기 궁금해하는 사람들 많은데 내가 끔찍한 짓을 해서 말하긴 그래요. 뭐, 여러분. 내가 엄청나게 도축의 달인이란 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그 부족장한테 복수할 수 있는 옵션이 나한테 많지 않았거든요. 나 때문에 회람장 분위기 우울해지겠네.
#8
무법섬에 페나코두스자리 별 모양으로 깃발 쓰는 부족 알아요? 꽤 유명한 부족인데. 거기 부족장은 타르보사우루스한테 산 채로 내장을 뜯겨야해. 전쟁 중에 자기가 원하는 화단을 못 꾸몄다고 병사 셋을 교수형에 처했거든. 그거 보고 바로 도망쳐나왔어요.
#9
여기 회람장 앞에 적힌 거 읽어 보니 우리 부족장은 인간적이었네. 그냥 성격이 나빴거든. 입냄새가 엄청 심했고. 양치를 안 할수록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란 자기 확신이 있었거든. 뭐 지도력은 나쁘지 않았는데 입냄새를 못 견뎌서 나왔어.
#10
다들 허접한 얘기들이다. 우리 부족장은 머리잡이란 사람이었는데 여러분들도 무법섬에서 봤을지도 몰라. 지금은 화살 맞고 죽었지만, 살아있을 적엔 위세가 대단했거든. 얼굴에 비늘 문신 넣고, 향초 피우고 그러면 우린 무슨 군신이 내려온 줄 알았어.
#11
지금은 2대 머리잡이가 부족장인데, 그 사람 부족장 올라올 때 난 나왔어. 너무 현실적인 인간이라서 1대 머리잡이처럼, 마술적인 힘이 부족에 머물지 않을 것 같았거든. 1대 머리잡이가 향초를 피우고 벽에 대고 법문을 외우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
#12
1대 머리잡이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 자기가 죽으면, 타르보사우루스들이 사는 섬에서 다시 깨어나 붉은 바다를 건너서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혹시 붉은 바다를 본 개척자가 있으면 언제든 내가 있는 무전 채널로 연락달라고. 부탁해.
#13
앞에 작성한 개척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 부족은 도시섬에서, 그 칼이랑 도끼 많이 만드는 부족인데 여러분들도 써봤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 부족장이 사람 보는 걸 싫어해서 무조건 일이 있으면 무전으로만 보고해달래.
#14
근데 무전기가 듀랑고에서 멀리 간다고 해도 난청지역도 있고, 무전기가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게 가능하냐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니까, 부족장이 숲에 숨었어. 일 있으면 봉화를 피워서 물어봐. 봉화로 모르스 부호를 보내는 방법 개발해봤어요?
#15
내가 있는 부족은, T로 시작하는 부족이고, 칼 9개가 겹쳐진 모습을 상징으로 쓰는데 그리기가 너무 어려워서 부족장 밖에 못 그려. 부족장이 회의도 안 오고 뭐 비전도 없고 맨날 칼 9개만 그려. 근데 2인자가 성실해서 부족은 돌아가. 이 부족을 떠나야 하나 고민이 많이 돼.
#16
이거 아무나 써도 되는 겁니까? 저는 628소위원회란 혁신적인 단체를 이끄는 소위원장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적은 이 회람장은 저희가 디지털 기반으로 정보를 전환한 뒤에 각 부족장들에게 메일로 발송하고 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입니다.
#17
각 부족장들의 천막을 잘 살펴보시면 노트북이 바닥에 숨겨져 있습니다. 듀랑고가 그렇거든요. 살바도르 박사한테 용역 의뢰를 받고 듀랑고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임의로 추출되었습니다. 배심원처럼 선정되었습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18
회람장 중간에 이상한 사람이 낀 것 같은데, 내가 있는 부족장 얘기나 해볼게요. 이 사람 암 말기인데 절대로 자기 후계자를 안 만들려고 해요. 하루에 절반은 의식이 없는 사람이 보고는 꼬박꼬박 받겠대요. 여러분은 이따구로 살지 마세요.
#19
바위 틈에 누가 회람장 박아 놓은 거 보고 읽어봤는데, 뭐 누가 찢기도 하고 뿌리기도 하고 그랬네요. 부족장들이 여기 오나봐요. 암튼 세상에 별별 부족장 다 있단 걸 알게 되네요. 사실 저도 부족장인데, 글 읽고 많은 걸 느꼈습니다.
#20
아무래도 이 회람장이 다 모여 있으면, 여러분들 필적 같은 걸 보거나 그럴 수도 있으니까 제가 적절히 나눠서 뿌리겠습니다. 부족장이란 게 마땅히 주어지는 자리 같은 게 아니란 걸 명심하면서 살도록 하겠습니다. 양치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19. 보험증명

#1
어떤 보험사든 이 메모를 앞으로 본 사건을 조사하는 데 있어서 객관적인 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이 메모의 작성자는 여행 중에 워프에 휘말린 일반인임을 밝히며, 어떤 직업적 편견에 근거하지 않고자 애쓴 글임을 분명히 합니다.
#2
워프란 말이 믿기 어렵겠지만, 작성자와 다른 조난자들이 겪은 문제를 그 단어가 아니면 설명하기가 어려운 점을 양해하기 바랍니다. 작성자는 워프의 작동원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실제로 보면 이 표현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3
일단 승무원과 조종을 맡은 책임자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워프가 일어난 순간에 승객들을 안정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간헐적으로 워프가 몇 번 더 작용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자기보호를 하지 못 하고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일단 명복을 빕니다.
#4
관련자들이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사망하면서, 현장의 조난자들의 안전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령탑이 부재했습니다. 조난자들은 좁은 면적의 섬에 고립되었고, 주변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이 이어졌습니다.
#5
그나마 무전 연락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잠시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전 내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이곳이 듀랑고이며, 지구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구조대가 오는 일도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무전으로 자신의 위치를 밝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6
워프 직후에 조난자들이 얼마나 격앙돼 있었는지는 글로 적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의약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남은 물건을 두고 조난자들끼리 싸움이 이어져 사망자까지 나왔습니다. 사망자는 가진 걸 다 뺏기고 시체까지 훼손되면서 신원 확인도 어려웠습니다.
#7
몇 사람이 나서서 조난자들을 진정시켰지만, 모든 그룹의 조난자를 포섭할 수는 없었습니다. 듀랑고와 지구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걸 확신하자, 일부 그룹의 마음이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적확한 것일진 모르겠으나 마음이 메말라가는 게 보였습니다.
#8
문학적인 표현을 자꾸 써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안전벨트를 풀고 정글로 들어온 순간, 사람들의 마음을 묶고 있던 다른 무언가도 풀려버린 것 같았습니다. 조난자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기회도 놓쳤습니다. 무덤에 묻힌 사람들 중 몇 사람은 죽은 이유를 모릅니다.
#9
치안 유지를 하고자하는 그룹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룹의 기민성은 우리의 기대만큼 빠르게 나타나지 못 했습니다. 적어도 몇 달은 더 혼란기가 계속 될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치안 유지는 포기하고 자기 방어로 목표를 선회했습니다.
#10
그 과정에서 누군가 책임지고 기록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교차검증할 수 있도록 최소 세 사람이 기록을 별도로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그런 이유로 기록을 남기고, 그와 별개로 보험사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도 이렇게 남기고자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11
제 시계가 맞다면, 아직까지 이 모든 일이 조난 후 24시간이 안 된 상태에서 일어났습니다. 처음 30분 정도는 휴머니즘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엔 많은 사람들이 못나지더군요. 어딘가에 나를 존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을 거란 믿음은 정말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12
희망적이진 않습니다. 어디서 먹을 걸 구할지, 흐르는 물을 마셔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공룡을 봤습니다. 이 부분에서 많이들 희망을 잃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본 건데, 현실은 더하더군요. 부정할 수 없는 공룡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13
여러 무전을 받고 있고, 이 무전을 종합할 때 이 세상은 재난 대비 시스템이 전혀 없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구조자 TF란 곳에서 구조하러 가겠단 무전을 보내긴 했지만 신빙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14
이 근처는 섬으로 된 지역입니다. 생존자는 해안 지역에 있습니다. 섬의 중심부에 가파르지 않은 언덕이 있고, 밀림이 우거집니다. 길이 없어서 내륙으로 접근이 어렵습니다. 이때문에 워프 당시에 발생한 사망자나 화물 상당수를 아직 수습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15
다른 승객들의 증언을 모아 봤습니다. 워프가 발생하기 전에 빛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승무원에게 얘기했지만 빛이 반사된 걸 잘못 봤을 거라고 묵살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 빛이 워프의 발생과 관련이 있는 현상이라면, 책임자들이 다소 무책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16
안 좋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보험이고 나발이고. 여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이 일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걸까요? 하루 종일 그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섬의 기후는 최악입니다. 풀에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붓고 열이 납니다.
#17
이상한 흔적들도 찾았습니다. 섬에 사람들이 살았던 모양입니다. 아마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떠난 것 같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이 현상이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닐 겁니다. 워프에 휘말려서 조난된 사람이 여기에 정말 많을 겁니다. 근데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18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를 모를리가 없습니다. 이건 버뮤다에서 일어나는 실종 같은 음모론이 아닙니다. 이 일은 외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고 통계만 내도, 비정상적인 무언가가 작용하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가 알고도 모른 척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19
몇 백 년이 지나서 이 메모를 보게 되더라도, 반드시 책임을 규명해야 합니다. 분명히 증거가 있을 겁니다. 항공사고, 기차사고, 자동차사고, 폭발사고, 집단실종 등 관련된 데이터가 있습니다. 억울해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밝혀주셔야 합니다.
#20
사실 정말 보험사가 이 메모를 볼 수 있을지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더 이상 이 메모를 들고 다니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바다를 건너다 제가 빠져 죽기라도 하면 메모도 사라질 테니까요. 남겨둘 것입니다. 보험사에서 꼭 찾아내길 기원합니다.

20. 조난 직후 비망록

#1
나는 게임 개발자다. 게임 컨퍼런스 가는 길에 워프를 만났다. 조난을 당했다. 불안을 떨쳐보려고, 내가 하던 일을 생각하려고 한다. 만약에 듀랑고가 게임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로 했다. 익숙한 걸 생각하면서 공포를 이겨내는 건 전통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
공룡. 많은 사람들이 공룡을 좋아한다. 나도 숲에서 울부짖는 공룡을 바라보며 통찰을 얻고자 한다. 공룡이 나를 짖이겨 놓을 거란 것만 생각하면 끝이 없다. 부정적인 마음을 떨치고 긍정적으로 보자. 공룡의 근육이 움직이는 걸 보며 모션을 만든다면 어떤 게 사실적일지 생각해보자.
#3
누군가 공룡에게 잡아먹히는 걸 봤다. 그 사람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는데 공룡들이 살점을 이빨로 뜯었다. 자연의 너무 잔혹하다. 다시 한 번 게임을 만들 수 있다면, 이 생생한 경험을 전달하고 싶다. 사실로 겪기보단 게임으로 겪는 게 행복한 것이라 생각한다.
#4
정말 냇물 딱 한 모금만 마셨는데 배탈이 났다. 사람이 똥 싸다가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 질병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게임은 없는가? 자연에서 뭘 먹어치우건, 내장에 들어가면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할 것이다. 몸은 몇 번이나 이겨야 하지만, 질병은 한 번만 이기면 된다.
#5
아파서 누웠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죽어도 아무도 기억 해주지 못 할 거란 게 너무 슬펐다. 한 번 뿐인 삶이라니. 살면서 강력한 동기부여도 되겠지만, 때론 아주 깊고 깊은 절망감의 원천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니. 내가 만드는 게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6
기분이 좀 나아졌다. 현실엔 배경음악이 없다는 게 아쉽다. 휘파람이라도 불어본다. 누우니 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다가오고 멀어지고, 바람이 잎의 바다로 헤엄친다. 공룡 울부짖는 소리가 나면 몸서리를 친다. 저 소리는 도시에선 들을 수 없는 거다. 신비롭고 무섭다.
#7
인간은 왜 이리 나약할까? 숲에서 간신히 먹을 만한 열매 몇 개를 주워 가방에 담았는데 꽉 찼다. 만일 지구로 돌아가서 개발을 할 수 있다면, 꼭 널찍한 보관 공간을 줄 것이다. 현실의 인간이 들 수 없는 무게라도 상관없다. 겨우 몇 백 미터 운반했는데 어깨가 부서질 것 같다.
#8
같이 있는 사람들이 풀독이 올랐다. 섬의 식물에 독기가 많다.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조난자 중에 약사가 있는지 찾았지만 없었다. 의사를 한 명 찾았지만, 이 섬에서 약을 구할 수는 없었다. 모든 병에 듣는 약이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은 스스로 회복하기만 기다린다.
#9
사람의 상태는 너무 많은 것에 좌우된다. 체력조차도 수면의 질, 식사량, 정신적인 건강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게임이 그립다. 현실에서도 붉은 막대기 하나가 그 사람의 건강 상태를 표현하는 전부라면 얼마나 세상이 명확해질까? 삶은 쉽지가 않다.
#10
하늘을 날아가는 익룡을 보았다. 야생으로 떨어지니 내 자신이 땅에 붙잡힌 걸 알게 되었다. 세상은 3차원인데 우리에게 허락된 축 3개 중 1개는 영 의미가 없다. 돌아가서 게임을 만든다면, 이 3개의 축을 모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할 것이다.
#11
의미 없는 메모들이지만 적다 보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수첩에다가 부러진 연필로 적는 게 아니라, 사무실 내 자리에서 업무용 솔루션을 켜고 적는 것 같다. 뭘 먹었더니 몸에 반점이 생기고, 짐승을 피해 나무 위에 올라와 있어도 게임 개발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12
다른 조난자와 말다툼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그 사람이 쓰레기라고 했다. 남들이 진정하라고 할 땐, 감정적인 얘기가 아니라 열린 자세로 토론을 하는 거라고 했다. 속내는? 그 사람 얼굴을 갈기고 싶었다. 내가 과일도 나눠줬는데, 사람이 너무 불친절하다.
#13
그 사람과 다시 얘기를 해봤는데 공통점도 있었다. 알고 보니 예전에 바로 옆 사무실에서 일했더라. 그 사람이 그 게임을 개발했다니. 내가 좋은 댓글도 많이 달았는데. 지난 번이랑 다르게 그 사람 말투도 좀 누그러졌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라고 했다.
#14
게임을 출시할 때마다 어떤 욕을 먹을까 생각했다. 늘 아랫배가 딱딱해지고 소화기관이 작동을 멈췄다. 이젠 그 기분조차 그립다. 공룡들이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는 걸 보면 아랫배가 딱딱해지는 정도가 아니다. 현실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다.
#15
컨퍼런스가 열리는 지역이라 그런가, 조난자 중에 게임 개발자가 더 있었다. 직군별로 모임을 해도 될 정도였다. 다들 기분 전환을 하기로 했다. 나뭇가지와 시트를 모아서 작은 천막을 짓고 그 아래에 모였다. 72시간 동안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불안감을 떨치고 싶었다.
#16
여기서 비디오 게임을 만들 순 없었다. 보드 게임을 만들었다. 72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게 보드 게임 만들기인 상황에 처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정말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주장들이 강한지 질려버렸다. 어떻게든 자신이 기획한 요소를 넣고 싶어했다. 나라고 양보하진 않았지만.
#17
누가 자신이 넣은 요소가 밸런스에 맞지 않다고 빠지자 화가 나서 천막을 떠나버렸다. 다들 내버려두라고 했다. 내가 가서 달랬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쓰레기라 했을 땐, 한 번 날리고 싶었는데 이젠 내가 이 사람의 사회성을 걱정하고 앉았다니. 세상은 이상하다.
#18
이 메모를 적으면서 다시 느끼지만, 안 좋은 상황일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걸 생각하는 게 좋다. 나는 게임 개발자고, 게임을 개발하는 걸 생각하면서 처음의 긴 시간을 버텨냈다. 누군가에겐 그게 노래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을 거다. 72시간이 끝날 무렵에 무전을 받았다.
#19
구조자 TF라니. 처음엔 믿지 않았다. 무전에서 들은 건 주로 조롱이었다. 우리가 얼마 못 가 죽을 거고, 살아남아도 누군가의 노예 노릇 밖에 못 할 거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얘기가 달랐다. 흩어지고 고립된 사람들을 구할 거라고 했다. 정말 믿어도 될까? 하지만 믿기로 했다.
#20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내가 어려울 때 얼마나 힘이 되는지. 구조자 TF의 사람들이 정말 우릴 구하러 온다면 그 사람들을 따라 가고 싶다. 아니라면 다른 삶을 모색해봐야겠지. 하지만 어느 쪽이라고 이곳에 걸맞은 게임을 개발하고 싶다. 잊지 말자.

21. 다른 구조대원의 기록

#1
나도 K님이나 찰리님처럼 되고 싶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 두 분한테 무전은 못 보내겠다. 그분들 무전을 듣고 있는 건 비밀이다. 이 메모를 그분들이 주워서 보게 된다면... 일단 팬이라고 알고 계세요.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멋지세요.
#2
이렇게 내 메모를 그 분들이 올 곳에다가 뿌려두는 것 자체가 내가 하는 구조 활동이 사실 그분들의 눈에 띄기 위함임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겠지. 저는 이 섬에 구조를 하러 왔습니다. 이 섬에 조난자들이 있을 거란 신호를 포착했다고 무전 채널에서 들었어요.
#3
저는 이 섬 같은 곳을 잘 압니다. 이 섬은 보통 열대섬이 아니에요. 독섬이에요. 다행히 도착해보니 독이 건기네요. 만약에 우기였다면 뭔가 조치를 해보기도 전에 조난자들이 다 죽었을 겁니다. 뭐라는 걸까? 그 사람들이 읽지도 않을 텐데 왜 이런 걸 쓰고 있을까?
#4
쓰러진 사람들의 의식을 확인하고, 목이 마른 사람들에겐 물을 떠다 마시고, 미리 준배해둔 구호물자를 뿌렸다. 정말 구호물자에 집중했다. 다른 부족원 시간을 뺏으면서 이 일을 할 순 없었다. 내 남는 시간에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부족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5
사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찰리님이 열기구 만드신다고 여러 부족에 재료를 문의하실 때 저희 부족에서도 물자를 공급해드렸어요. 아마 절 기억하시긴 어려울 거예요. 굉장히 특징 없게 생겼거든요. 제 언니가 화물 워프홀 운반 일도 도와드렸는데 기억 안 나셔도 상관없어요.
#6
뭐 굳이 얘기가 나와서 말씀드리자면, 두 분은 뒷얘기를 다 아실 수는 없겠지만요. 제가 두 분을 뒤에서 몇 번 도와드린 적도 있어요. 전에 두 분이 구조 활동하러 오시는데, 랩터 무리가 지나가려고 해서 제쪽으로 유도하기도 했어요. 전 베테랑 사냥꾼이니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7
사실 구조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땐, 제가 숭고하게 나타나서 누군가를 일으키는 모습을 상상했죠. 그렇게 일으킨 인간이 왜 늦게 도와주냐, 뭔가를 달라 이렇게 요구하는 순간이 오면 좀 빡이 쳤어요. 몇 번 때리긴 했는데 심하겐 안 때렸어요.
#8
정말 두 분의 정신력도 존경합니다. 저는 화나면 손이 먼저 나가버려요. 조난자들은 절대로 제정신일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 사람들 행동하는 거 보면 화가 치밀어요.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좋은 사람만 생각하면 살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죠.
#9
나는 왜 이 메모를 작성하고 있는 걸까? 이 메모를 쓴다고 정말 K님과 찰리님이 읽을 수 있을 것도 아닌데. 나는 위로 받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조난자를 구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닐 거다. 하지만 과정에 많은 부분이 있다. 빡치는 부분도 있고 좋은 부분도 있다. 빡치는 게 많지만.
#10
차분히 생각해보니 죄책감인 것도 같다. 예전에 험한 일을 했다. 뗏목을 기습하는 해적을 잡아다가 바다에 집어던졌다. 해적은 죄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한 번도 주지 않고 바다에다 집어던진 게 잘 한 일인 걸까? 그 사람처럼 눈 하나 깜짝 안 하긴 힘들었다.
#11
다시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필요악이다. 장기적으로는 더 합법적이고, 권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하는 게 맞겠지만 당장은 그 방법이 최선이다. 그건 맞다. 그렇지만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가? 왜 내가? 다른 사람이 할 수는 없는가? 그래서 난 그 일을 관뒀다.
#12
지쳤다. 죄책감은 옳은 일에서도 느낄 수 있다. 나는 자발적인 구조대원이 됐다. 아마 조난자를 구조하는 일을 하면 죄책감을 덜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찰리님과 K님의 무전을 들은 것도 좋았다. 구조대원을 하면 속죄하는 기분이 들 거라 생각했다. 그들을 위한 속죄는 아니다.
#13
이건 내 다친 마음에 속죄하는 일이다. 옳지만 끔찍한 일을 하는 것보단, 옳고 마음 편한 일을 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 더 좋다. 나는 왜 이 기록을 계속 쓰고 있는가? 그냥 적당히 써버리고 어딘가 버리는 게 나을 거다. 이걸 누가 주워 읽어도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까?
#14
K님과 찰리님의 무전을 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누군가 무전에 끼어들고 있었다. 잡음이 심해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지만 과묵한 인간이었는데 K님과 찰리님과 어울려 보이진 않았다. 앙코라라니. 아주 구린 이름이다. 부모가 버릴 자식에게 붙이는 이름 같다.
#15
사실 그래요. 언니도 그랬어요.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요. 저는 두 분보다 아마 열 살은 많을 거예요. 하지만 두 분보다 성숙한 인간일지는 모르겠네요. 지금 이 섬에 와서 구조활동을 하고 있는데 앙코라 그 사람도 여기로 오는 거겠죠? 제가 무전 들은 게 맞다면요.
#16
쉴 때면 자꾸 잔인한 상상을 하게 된다. 앙코라란 인간이 누군지 얼굴도 모르겠지만, 이 섬에 나타나서 돌아다니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스럽다. 언니가 그랬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다른 구조자를 보고 앙코라라로 생각해버릴지도 모른다.
#17
선한 일을 하려고 했는데, 내 머리는 왜 자꾸 악한 일을 생각하는가? 해적들을 바다로 집어던진 걸로도 만족하지 못 한 것인가? 내가 이런 짓을 한다면 K님이나 찰리님이 좋아하지 않겠지.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렵다. 이 글을 쓰면서도 자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18
K님. 찰리님. 앙코라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렇게 특별히 대우하고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요? 저는 지은 죄가 많아서, 두 분께 다가갈 수가 없어요. 하지만 모르죠. 그 사람도 어디서 엄청난 죄를 짓고 다닐지도요. 두 분을 빼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에요.
#19
징병관 척후를 보았다. 근처 섬에 징병관들이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 시비를 걸어서 징병관 그룹 하나를 다 바다에 가라앉힌 생각이 났다. 척후 하나를 잡았다. 덕분에 앙코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던 걸 좀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죄인이다. 마음이 약한 죄인이다.
#20
저는 이 섬에서 구조 임무를 더 할 생각이에요. K님이나 찰리님이 이 섬에 오신다면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낯을 똑바로 보진 못 할 것 같아요. 두 분의 빛나는 모습을 보면 제가 지은 죄가 떠오를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늘 응원하고 지켜 보고 있어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22. 저주받은 섬

#1
본 메모는 정찰팀에서 남긴다. 우리를 지원하러 올 귀하의 팀을 기다릴 수가 없다.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메모를 작성하고 철수할 예정이다. 무전 난청 지역에 있는지 귀하 팀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적절한 곳에 메모를 저장하였으니, 확인하면 무전을 바란다.
#2
이 섬에 오래 있지 마라. 빨리 철수하라. 평범한 열대섬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독성이 매우 강하다. 이 섬의 생물은 독성을 탄소만큼이나 익숙한 것으로 여기도록 진화한 모양이다. 적절한 약품이 없이 이 섬에 있는 건 산소 탱크 없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
상황을 설명하자면 부족장을 암살했던 자들을 추적했다. 인원을 줄이고, 짐을 줄이고 기동성을 높였다. 개인섬과 도시섬으로 이어지는 워프홀 경로 등도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놈들이 옆으로 빠져나갈 여지 자체를 없앴다. 거기까진 성공적이었다.
#4
놈들의 무전이 끊겼다. 놈들은 여지껏 채널을 바꾸지 않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우리가 채널을 감청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채널을 바꿨거나, 놈들이 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거나. 후자의 경우에도 옵션은 여럿이 있었다. 듀랑고에서 무전기는 이해하기 힘들다.
#5
첫째, 워프 에너지의 간섭으로 무전이 왜곡되어 전달되지 않는 경우. 둘째, 무전기를 버렸을 경우, 이 경우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 희박하다고 봤다. 셋째, 우리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무전 자체를 당분간 포기했을 경우, 넷째,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총 네 가지 옵션이다.
#6
섬에 상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변에서 놈들의 깃발을 발견했다. 돌아다니며 워프홀과 크레이터에서 워프 에너지를 관측했다. 노이즈의 양이 며칠내로 섬이 사라질 수준은 아니었다. 머물 곳을 구축하고, 섬을 수색하기로 했다. 섬은 열대섬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7
몇 사람이 몸살 증세를 보였다. 추적이 길어져 여독이 심해진 거라 생각해 부하들에게 휴식하도록 시간을 주고 소수만 꾸려서 섬을 수색했다. 무덤을 발견했다. 흙을 얇게 덮은 탓에, 짐승이 헤쳐 놓아 주검이 드러났다. 죽은지 얼마 안 돼 보였다. 놈들의 목걸이를 발견했다.
#8
주검은 반점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섬의 내부로 더 들어가자 천막 몇 개를 발견했다. 흙이 마르지 않은 삽이 널부러졌고, 천막 일부는 짓다가 만 것이었다. 파리가 자욱했다. 천막 근처에 시체가 몇 구 더 있었는데, 짐승들이 먼저 다녀갔다.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나 놈들로 보였다.
#9
묻히지 않고 남은 시체들도 반점 자국이 선명했다. 천막 한 곳에서 책상에 엎드린 시체를 발견했다. 살 곳곳에 반점이 붉게 피었다. 놈의 머리색깔과 문신, 장신구를 보자 누구인지 알았다. 부족장 암살을 주도했던 놈이었다. 부족장의 명복을 빌며 놈의 머리를 베었다.
#10
머리를 양지바른 곳에 매달았다. 말려서 부족으로 갖고 갈 생각이었다. 귀하의 팀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메모를 남기고, 철수 경로를 탐색하기로 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몸살을 앓던 부하들 중 일부가 매우 고열 상태가 되었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열이 났다.
#11
다행히 나는 곧 회복했지만 부하 셋이 죽었다. 다른 부하들도 몸에 반점이 나타났다. 섬에 약재가 있나 찾았다.K인가 하는 사람이 전에 무전에서 구조용 약품 얘기한 것이 생각났다. 그때 약재가 될 수 있는 게 뭔지 들었는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시하는 게 아니었는데
#12
섬의 다른 방향에 개척자 몇이 내려서 캠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희귀 독을 얻으로 온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약재에 비싼 값을 불렀다. 빨리 움직여야 해서 티스톤 같은 걸 챙겨오지 않았다. 일단 물러서고 새벽에 기습하기로 했다. 새벽을 기다렸다.
#13
여전히 귀하의 팀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새벽에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을 모아 개척자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썼다. 입에는 뿔로 통을 달아 까마귀처럼 생겼다. 우리의 칼을 보자 그들이 항아리 뚜껑을 열고 연기를 피웠다. 연기를 마시자 어지러워 버틸 수가 없었다.
#14
일어났다. 그들이 우리를 해치진 않았다. 무기와 옷을 뺏겼다. 우리는 알몸으로 숲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지금은 섬의 독이 우기이니 빨리 떠나라고. 이상한 자들이었다. 살고 싶음 건기에 오랬다. 소름이 끼쳐 거처로 돌아갔다. 부하들의 상태를 살폈다.
#15
결단을 내렸다. 이 부분은 귀하의 팀원들에게도 충분히 설명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섬 내부에 상태가 심각한 부하들을 격리해 놓았다. 모두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살아있는 다른 부하들에게 병을 옮길 수는 없었다. 당사자들은 의식이 없어 동의를 구하진 못 하였다.
#16
아마 귀하의 팀이 도착해 이 메모를 확인할 때면, 그 부하들을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상태가 호전됐다면 가능한 빨리 섬을 떠나라고 그들에게 메모를 남겨두었다.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면 사망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까지 기록하고 우리는 떠나겠다.
#17
보충한다. 독 전문가들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우리의 환자들을 데려간 것 같다. 섬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보러 갔는데 다 사라져 있었다. 짐승이 다녀간 흔적도, 핏자국도 없었다. 캠프로 가니 독 전문가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데려간 게 분명했다.
#18
무슨 목적으로 데려갔는지는 알 수 없다. 무법섬에 병사로 쓰려고 데려가진 않았을 거다. 구하려고 데려갔단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 까마귀 같은 가면만 보면 머리가 아찔해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새 부족장께 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쪽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19
나는 내 자신을 전문화된 부족 군인이자 추적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섬은 그런 나의 경험에도 호의적인 곳은 아니었다. 독의 건기니 우기니, 개념은 잘 모르겠지만 만일 그런 섬으로 대규모 워프가 일어나 지구 출신 조난자들이 쏟아지면 그 섬은 그대로 무덤이 될 것이다.
#20
보충한다. 나는 떠나지 않았다. 갈 수 있는 부하들은 먼저 보냈다. 다시 몸에 반점이 나타나고 열이 난다. 나 때문에 뗏목에서 몰살할 수는 없다. 앞이 안 보여서, 손만으로 글씨를 쓰고 있다. 보충한다. 아직 살아있다. 보충한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23. 징병대장의 기록

#1
나는 부족장에게 신성한 영장을 받았다. 무법섬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성전이다. 모든 개척자는 부족에 들어가 자신의 의무에 종사하여야 한다. 징병을 거부하는 자는 반역자이다. 이는 역사의 진보를 거스르는 행동으로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 나는 집단의 힘을 믿는다.
#2
고립되고 분열된 개척자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부족장의 영도하에, 한 부족의 깃발 아래 모여서 칼과 도끼를 들어야 한다. 개개인의 나약함은 부족의 단결력에 스러진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묶으면 기둥이 된다. 병사는 망설임 없이 부족의 영광을 향해 행군해야 한다.
#3
나는 징병대장으로서 이 섬에 왔다. 현대적인 행정체계의 일환으로서, 모든 개척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그들을 적합한 부족의 호적에 올려둘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야생에 버려진 조난자가 아니게 될 것이다. 부족의 깃발이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리라.
#4
이곳에 오기 전에 태동을 들었다. 무전기에 잡히는 노이즈는 무게가 각각이 다르다. 가장 큰 것은 바다에 새로운 섬을 낳고 거둬간다. 워프홀과 크레이터가 뿜는 소리는 경박하다. 태동은 다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세상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함을 깨닫게 된다.
#5
워프는 지구에서 듀랑고로 사람을 데려온다. 워프는 파장을 일으킨다. 파장은 무전기에 잡힌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안다. 생명이 생겨난 이래, 다음 세대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소리가 존재함을. 태동은 그런 것이다. 무전기에 잡히는 태동 역시 그렇다.
#6
태동.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표현인가? 아기가 제 어머니의 몸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움직임처럼 그 워프의 노이즈는 듀랑고에 새롭게 기여할 이들을 불러온다. 조난자는 아기와 같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어르고 키우고 가르쳐야 한다.
#7
징병관들과 태동의 위치를 추적했다. 지도를 펼치고 삼각형을 그렸다. 워프삼각측량으로 위치를 추정했다. 후보군에 오를 만한 섬이 몇 개 있었다. 못 본 사이에 새로운 섬이 생겼을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었다. 시간이 긴박했다.
#8
다른 징병관들이 사용하는 채널에 경고를 보냈다. 그들은 애국자들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소속의 애국자들이 모두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그들의 애국심은 존중하되, 나의 부족이 우선권을 가짐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공격한다면 몇 배로 복수해 줄 것이다.
#9
차가운 섬이다. 징병관들이 초소를 세웠다. 이 섬엔 조난자가 없다. 그러나 가까운 다른 섬에 있는 건 확실하다. 가장 먼저 운송로를 확보해야 한다. 무법섬으로 가능한 빠르고 안전하게 징집병을 보낼 경로를 닦아야 한다. 운송로가 없으면, 징집병이 생겨도 소용이 없다.
#10
징병관들이 무전 채널을 바꿔쓰라는 지시를 어긴다. 동료 징병대장들도 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 질책하기가 어렵다. 다른 징병관들과 충돌하게 되면 곤란하다. 징병관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확보할 수 있는 징집병과 운송로의 숫자는 줄어든다. 경계할 일이다.
#11
척후를 보냈다. 근처의 열대섬이 의심스럽다. 근처에서 들을 수 있는 무전을 모두 다 들으려고 노력한다. 사용할 무전 채널을 정하는 암호체계를 만들었지만 머리 나쁜 징병관과 징병대장이 이해하지 못 했다. 정보가 새어나가는 건 각오해야 한다. 시간이 급하다.
#12
나에게 더 큰 권한이 있다면, 징병관과 징병대장의 구조를 개혁할 것이다. 징병대장 중 최선임자로서 내가 가진 권한은 그리 크지 않다. 다른 징병대장들이 작정하고 내 일을 방해한다면 나로서는 정당하게 이를 제지하고 막을 방법이 없다. 집단의 힘은 분명한 권한에서 생겨난다.
#13
척후에게 연락이 왔다. 무전을 들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대섬에 조난자가 있었다. 숫자는 상당했다. 운송로는 다른 징병대장에게 맡기고, 징병 절차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출발할 수가 없다. 인원에 변동이 생겼다. 보고되지 않는 뭔가가 있다.
#14
다른 징병대장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상황을 파악했다. 많은 징병대장이 겪고 있는 문제를 보고하지 않고 숨기려고 했다. 무책임한 짓이다. 파악 결과, 누군가 섬에 확보해둔 초소에 침입해 징병관과 징병대장을 죽였다. 다른 소속의 징병관들 짓으로 보인다.
#15
어떤 일이든 잘 되면 잡새가 모여든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징병 절차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를 흉내낸 후발주자들이 끼어들면서 일을 망친다. 병력에 공백이 생기면, 운송로의 주요 포인트를 확보할 수가 없다. 더 병력 손실이 생기면 행정 집행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16
공격자가 누군지 파악해야 한다. 놈은 소수 정예다.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다. 징병관을 죽인 것은 반역행위다. 반역자는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목매달아야 한다. 이대로 놈을 잡지 못 하고 철수하면 징병관들의 기가 죽을 게 분명하다. 반드시 처리하고 가야 한다.
#17
증언을 모았다. 믿기 어렵지만 놈은 단독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주를 받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섬에 다른 개척자들도 유입되는 것으로 볼 때 놈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인 게 분명하다. 이럴수록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가 어려워진다.
#18
다른 징병대장이 개입 가능성을 얘기했다. 개입한 게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어난 적 없던 이런 일이 일어난 걸 보면, 가능한 가능성은 모두 검토해야 한다. 누구건 우리 일을 방해하려고 사람을 보낸 거라면, 보복을 해야 한다. 살인자를 찾아내 죽일 것이다.
#19
손실이 크다. 복수에 눈이 머는 건 현명하지 못 하다. 이번 징병은 절차적으로 난점이 많았다. 안 되는 일에 매달리는 건 좋지 않다. 출구 전략을 생각하자. 공격자는 단독 행동이 아닐 것이다. 고작 한 명에게 이 많은 인원이 당할 수는 없다. 일단 운송로를 폐쇄하고 문서를 소각한다.
#20
캠프나 항구는 놈에게 걸릴 수 있다. 모두가 동시에 탈출하려고 하면 위험하다. 다른 징병대장들에게 대기하라고 했다. 우리 그룹이 먼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내면, 연락할 것이다. 집단에겐 부침이 있다. 오늘 우리는 전략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후퇴가 아니다.

24. 개인 연구자의 메모

#1
연구를 하다 보면 동기부여가 어렵다. 특히 불안정섬을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키티에게 말을 걸듯 이 종이 쪼가리에게 말을 걸게 된다. 안녕? 메모야. 이곳 날씨는 매우 춥다. 몇 달 넘게 그것들을 추적하고 있다 보니, 가족들이 그리워진다. 다들 도시섬에서 잘들 지내고 있겠지.
#2
그것들의 이름을 적진 않겠다. 그 이름은 그것들이 하는 진짜 나쁜 짓을 가려 버린다. 그것들은 가짜이다. 어느 시대에 태어나건 타인을 압제하고, 싸구려 대가를 받아먹고 호가호위했을 테다. 그것들의 얼굴은 다 너무나 비슷하다. 제복을 입고 곤봉을 들었다.
#3
그것들은 악하다. 나는 이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 그것들은 듀랑고의 곳곳에 흩어진 섬을 돌아다니며, 워프로 갓 조난된 자들을 찾는다. 조난자는 듀랑고를 알지 못 한다. 그것들은 조난자를 노린다. 조난자를 찾아가 노예로 삼는다. 조난자는 듀랑고를 그렇게 각인하게 된다.
#4
가족들한테 이 주제를 처음 얘기했을 때 다들 반대했다. 도시섬의 부족들엔 정의로운 부족들이 있다고 했다. 정의로운 부족들이 힘을 모아 그것들을 벌할 거라고 했다. 어느 세월에? 지금 실천할 수 없는 정의가 뭔 놈의 정의란 말인가? 정의란 시대를 불문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5
그것들을 연구해 기록으로 남기고, 부족장들에게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닥터 라마에게 얘기할까 했지만 그 친구한테 걱정만 시킬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닥터 라마는 그것들을 잘 모른다. 그 친구는 좀 더 세상의 밝은 면을 잘 보는 친구다. 나는 어두운 면을 주로 본다.
#6
두렵기도 하다. 내가 죽으면 가족들은 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내 붉고 헝클어진 가슴털을 보고 알아낼까? 꽤 웃기겠지만 가족들한테 웃긴 일은 아니겠지. 그것들은 칼과 도끼로 나를 도려낼 것이다.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나는 거리를 두고 놈들을 쫓고 그것들의 무전을 듣는다.
#7
그것들은 허술하다. 무전 채널을 잘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듀랑고에선 모든 게 허술하다. 허술한 자가 더 허술한 자를 핍박한다. 조난자들은 돌멩이 하나 들지 못 한다. 무전에서 그것들이 태동을 얘기했다. 진짜 태동의 의미를 아는 자라면, 그런 표현을 쓰진 못 할 것이다. 추악하다.
#8
그것들은 조난자가 발생하는 워프의 노이즈를 태동이라고 했다. 그것들이 짐을 꾸려서 섬을 여럿 옮겼다. 조난자들의 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도 따라서 움직여야했다. 멀리서 그것들을 관찰하고 무전을 들었다. 곧 조난자들의 섬에 닿을 게 분명했다.
#9
연구자로서 관찰 대상에 개입하는 건 연구를 훼손한다. 그러나 내가 연구를 하는 것보다 그것들이 그 짓을 못 하게 하는 방법은 없는가 고민이 된다. 그게 더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벌하려고 하는 부족장은 없다. 악한 부족장은 그것들의 후원자이다. 선한 부족장은 침묵한다.
#10
그것들의 내부에 양심이 있는 자가 하나 없을까? 그것들이 한둘도 아닌데 그 중에 양심 있는 자가 어찌 한 명도 없단 말인가?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슬펐다. 설원의 섬에 이르렀다. 눈이 아름답고 독특한 공룡과 포유류들이 사는 곳이다. 인간의 악행은 결코 그 풍경에 어울리지 않다.
#11
곧 그것들이 그것을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들이 본격적으로 운송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곧 그것이 시작되고, 나는 가책으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기록하고 문서로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이 일에 집중해야 한다.
#12
그것들의 척후가 조난자들의 섬으로 출발했다. 확인이 되면 그것들은 북을 치고, 횃불을 들고 돌아다닐 것이다. 악행이 섬에서 춤을 추고, 태양은 보기 부끄러워 빛을 잃는다. 어두운 시대가 몸을 기울이고, 듀랑고는 선한 마음을 잃은 체 표류한다. 나는 수치스럽다.
#13
오늘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해풍에서 소금기가 느껴졌다. 얼음 밑으로 개울물이 흘렀다. 무전은 달랐다. 그것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들의 초소 몇 곳이 기습을 당했다. 그것들과 똑같은 짓을 하는 다른 무리가 공격한 것 같았다. 악인끼린 서로 싫어한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14
걱정은 이런 싸움이 그것들이 더 크고 단일한 조직으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은 아닌가다. 그럴 가능성도 검토해야 한다. 만약 그것들이 통합된다면 대처하기가 어려워지고, 선한 부족장은 바짝 엎드린 채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겠지. 긍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15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초소가 계속 불타고, 그것들이 죽어간다. 뭔지 알 길이 없다. 몸을 숨긴 곳에서 벗어나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 나는 공포와 설렘으로 걸음을 옮겨 초소로 갔다. 부러진 깃발이 나부꼈고, 천막과 수레는 잿더미가 되었다. 찢어진 갑옷 조각이 굴러다녔다.
#16
나는 보았다. 정의가 인간의 형상으로 그곳에 들렀다. 정의는 눈을 가린 채 칼을 휘둘러 그것들의 살점을 베었고, 도끼로 사악한 정수리를 찍었으며, 망치로 못 박았다. 정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판을 내렸다. 그것들의 무전이 증명하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17
흥분을 가라 앉히자. 현장을 봤을 때의 강렬한 느낌은 사실이지만, 내 머리가 하는 말이 늘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다시 생각해보자. 무언가가 그것들을 공격했다. 이건 확고한 사실이다. 무언가는 공룡이 아닌 인간이다. 하지만 타르보사우루스 못지 않게 강한 인간일 것이다.
#18
다른 무전을 들었다. 그것들이 도망가려고 했다. 그것들은 분열됐고, 우두머리들은 저만 살 생각이었다. 섬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정섬을 사라지게 하는 워프도 아닌데 섬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공포에 질렸다. 얼마간 그것들을 연구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19
나는 궁금해졌다. 그것들을 공격하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지금껏 단 한 명의 용기 있는 자를 보지 못 했다. 나 자신도 용기 있는 자가 되지는 못 했다. 그런데 지금 용기 있는 자가 나타났다. 나와 같은 섬에 그 자가 있다. 인생에 이런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20
다시 생각했다. 연구 주제를 늘릴 수는 없다. 현재 주제를 일단 마치고 다음 주제를 생각하도록 하자. 그것들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일이 먼저다. 그 일은 이제 곧 끝나겠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도시섬으로 돌아가서 문서를 정리하자. 정리를 마치면, 다음 주제로 넘어가보자.

25. 무명 징병관의 메모

#1
못해 먹을 짓이다. 나는 부역자다. 이자들은 미쳤다. 이들은 정부 없는 징병관이다. 어떤 법률도, 조직도 이들에게 징병 권리를 내린 바가 없다. 이들의 행동은 옛날 항구에서 사람을 잡아다가 선원으로 태웠던 것보다 훨씬 악질이다. 그런데 나는 징병관의 옷차림을 했고 무기를 들었다.
#2
나 역시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징병되었다. 내가 탔던 버스가 낭떠러지에 떨어졌다. 누군가 망가진 문짝을 뜯었다. 나는 잠시 천사를 생각했다. 온 건 악마였다. 징병관은 조난자를 끌어낸 뒤에 줄로 묶었다. 눈을 가리고 쓰러진 채로 파도의 오르내림만을 느꼈다.
#3
교육 때는 눈을 풀어줬다. 징병관은 우리가 노예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들은 합법적으로 징병 영장을 발부받았고, 그에 따라 우리를 징병한 것이라 주장했다. 총체적으로 헛소리였지만 속이 울렁거렸고 배가 고팠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4
현대의 합법적인 정부란 것도, 결국 과거에 존재했던 폭압적인 어떤 결사체가 여러 차례의 반란과 혁명을 거쳐 상속받은 것이다. 함무라비의 법전이 의회와 국민 투표를 거치진 않았지만, 현대의 법은 그로부터 많은 상속을 받았다. 합리화를 마친 나는 징병관이 됐다.
#5
징병관 중 상당수는 나와 같은 식으로 징병관이 됐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징병을 거부했다. 징병관이 된 다음에 나는 나와 같이 끌려온 사람들을 구슬리는 일을 맡았다. 징병관의 옷을 입고 나타나자 그들은 놀랐다. 그러나 몇 분만에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재설정했다.
#6
나는 폭력에 길들여졌다. 무언가가 일이 되면, 무언가에 더는 감정을 느끼기 어렵게 된다. 나는 운송로를 확보하고, 조난자를 찾아다녔다. 조난자에겐 징집의 의무를 설명했다. 모든 절차는 우리의 기준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알았다. 이게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
#7
워프는 자연 현상이다. 자연 현상을 재난으로 만든 건 우리였다.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조난자만을 찾아내, 납치했고 무법섬에 데려갔다. 무법섬의 사악한 부족들은 병사가 필요했다. 우리가 병사를 공급했다. 무법섬의 이름 모를 부족에 팔려간 병사는 오래 살지 못 했다.
#8
마음의 폭풍에도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상황은 지속됐다다. 이 섬에 오는 길에도 마음은 흔들렸지만, 행동은 흔들리지 않았다. 우린 태동을 기다렸다. 태동이 왔다. 배를 띄웠다. 설원의 섬에 왔다. 나무를 베고, 갖고 온 재료로 초소를 만들었다. 무기를 정비하고, 무전을 기다렸다.
#9
메모엔 이렇게 쓰지만 현실의 나는 내 일에 충실하다. 어떻게 조난자들을 제압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10개는 넘게 설명할 수 있다. 섬 곳곳을 돌며 사냥을 했다. 식량을 마련해야 했다. 굶긴 채로 데려가면, 무법섬의 부족장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병에 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10
운송로에서 징집자를 병들지 않게, 굶주리지 않게, 다치지 않게 데려가는 과정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나의 마지막 양심일까?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부역 행위일까? 대답하기 어렵다. 식량과 약품을 준비하는 건 결국 무법섬으로 사람들을 데려가기 위한 것이다.
#11
아마 역사는 이랬을 것이다. 불의를 물리치는 사람들이 세상을 만들어간 게 아니라, 불의한 자들이 세상을 만들고, 뒤늦게 그들의 후손 중 일부가 정의로운 자들로 탈바꿈했겠지. 아직 듀랑고엔 정의가 오기엔 멀었다. 야생은 생존에 최적화된 곳이지 정의에 최적화된 곳은 아니다.
#12
나는 조난자들을 보면 고개 들지 말고 손을 뒤로 모으라고 소리 지른다. 나는 정확한 매듭법으로 그들의 손을 묶는다. 절대 묶인 사람 힘으로 풀 수 없는 매듭이다. 내 상관인 징병대장은 나를 좋아한다. 내 양심이 얼마나 고결함을 꿈꾸건, 나는 징병관이다.
#13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징병관과 징병대장이 한 무리가 아니란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징병 영장을 내주는 부족 소속이란 말 따윈 새빨간 거짓말이란 거 다 알고 있다. 그 거짓말을 누가 지어냈는진 몰라도 정말 악랄한 인간일 것이다.
#14
일상적인 일이 많다. 약재 모으고, 식량 모으고, 뗏목도 만들어둔다. 이번 징병은 뭔가 꼬였는지 징검다리에서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운송로 선상에 놓인 섬을 징검다리라고들 한다. 근처에 조난자가 있을 텐데 병력이 이동하질 않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대기만 했다.
#15
사실을 알게 됐다. 다른 초소가 공격을 받았다. 공격해온 쪽에선 징병관과 징병대장을 동물처럼 잡았다. 공격당한 초소는 아수라장이다. 징병대장들 말을 들으니, 우리와 경쟁 관계인 징병관 무리에서 공격을 해온 것 같다. 일이 곧 마무리될 것 같았는데 교전이라니, 꼬였다.
#16
조난자를 데리러 가는 건 완전 중단됐다. 사안이 커진 모양이다. 이 섬엔 다른 개척자들도 있다. 보는 눈이 많은데도 우릴 대놓고 죽인다. 적이 보통 배짱이 아니다. 그렇게 죄를 저질렀는데 죽고 싶진 않다. 이 상황을 어떻게 피해갈지만 생각하고 있다. 아, 인간이여.
#17
듀랑고에 오기 전 나의 삶을 생각한다. 나는 세일즈맨이었다. 신호에 걸리면, 나의 삶이 좀 다르기를 바라곤 했다. 이렇게 다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악몽을 꾼다. 내가 이 섬에서 나가지 못 하고 죽는다. 적의 칼에, 주먹에, 도끼에, 망치에 쓰러진다.
#18
징병대장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안 좋은 생각을 하다 보니 황당한 생각까지 떠오른다. 혹시 하늘에서 우리를 징벌하러 내려온 게 아닐까? 몇몇 징병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듀랑고에서 살명서 정의를 내세우며 우리랑 싸우려고 한 자는 보지 못 했다. 아직까지는.
#19
또 다른 초소가 공격당했다. 초소는 박살이 났다. 상대는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조난자들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철수해야 한다. 징병대장들은 망설이고 있다. 철수하려다가 대규모 기습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들은 이 상황에서도 보신주의에 빠져있다.
#20
철수를 순차적으로 하기로 했다. 나의 초소는 후순위로 밀렸다. 천막에 누워서 차가운 바람소리를 듣는다. 누군가 걸어온다. 뽀드득 소리가 난다. 만일 저 자가 초소를 공격한 그 자라면 나의 메모는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훗날 내가 속죄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길 소망한다.

26.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

#1
모든 징병관은 다음의 교육 내용을 숙지한다. 실질적인 행동은 없으나, 일부 부족이나 단체에서 우리의 활동을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근거 없는 비난이 대부분이나, 여론에 휩쓸리기 쉬운 개척자가 늘어날 우려가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몇 가지 사항을 설명한다.
#2
우선, 이 활동은 불법이 아니다. 듀랑고에 갓 도착한 개척자에게 부족의 성원권을 부여하는 건 전혀 문제가 없다. 여러 부족장과 충분히 논의한 끝에 나온 결론이다. 성원권의 부여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문제이다. 지구에선 신생아라도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바로 국적을 부여한다.
#3
아울러 지구에선 일방적으로 국적을 이탈하는 건 불가하다. 국적을 이탈함에 있어선 여러 충족 요건이 있으며, 각 부족은 이를 무법섬에서 충분히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 징병 절차를 위임받는 징병관이 탈퇴 절차를 설명할 의무는 없다. 징집 대상자에게 이 점을 주지시킨다.
#4
만일 징집 대상자가 영장 제시를 요구할 경우엔 해당 징집 대상자를 물리적으로 제압한다. 이는 징집 대상자들의 호의적인 태도를 이끌어는 데 좋다. 낮은 확률이지만, 징집 대상자가 무장했을 경우엔 현장에 있는 징병대장이 집행을 계속할지 판단하도록 한다..
#5
징집 대상자를 호송하는 과정에서 의료, 식사 등의 문제를 징병관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대처하는지를 외부에 알린다. 이 부분은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수치나, 실제 사례 등을 발굴하여 무전을 보내거나 할 때 자주 언급하도록 한다.
#6
무전에서 징집 대상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삼간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면 그냥 무전 밖에서 해라. 여기가 아무리 야생이라고 해도, 우리 절대 다수는 현대에서 넘어온 인물이며 현대적인 언어 감수성에 예민하다는 걸 명심한다. 합법적인 행동은 입 바른 말 위에서 더 빛을 발한다.
#7
만일 다른 그룹의 징병관과 충돌이 있으면 가능한 협상한다. 불안정해역은 지리적 특성상 각 그룹이 주 활동 지역으로 삼는 지역을 특정하기가 어렵다. 그때문에 작은 의견 차이도 쉽게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속은 달라도 동종업계의 인물을 존중하는 건 상식이다. 먼저 존중하자.
#8
충돌이 무력으로 이어질 경우엔 현장에 있는 징병대장의 판단에 따른다. 상대를 제압하는 게 용이할 경우엔 가능한 빠르고 적극적으로 제압하고, 소문이 퍼질 구멍을 차단하라. 상대 징병관을 무법섬으로 운송하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가능한 현장에서 처분한다.
#9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행이 어려울 경우엔 현장에서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 데스크 입장에선 무전만으로 구체적인 보고를 받기가 어렵다. 무전으로 상세한 정보를 보낼 경우엔 새어나갈 우려도 크다. 만일 도주해야 하는 상황이면 우선 본 문서 등을 포함한 제문서를 반드시 소각한다.
#10
암호 체계가 복잡하고 불완전하다는 건 데스크에서도 잘 인지하고 있다. 현장에서 적용하기엔 어려운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전 채널을 정해진 암호 해독에 따라 옮기지 않는다면 잠재적인 적에게 우리의 내부 정보를 다 고백하는 거다. 징병대장은 책임감을 갖기 바란다.
#11
징집 대상자를 운송할 때, 그들 중 우리에게 협조적인 인물을 발굴하는 데 집중한다. 다수의 집행을 검토한 결과, 약 10-15% 정도는 약간의 보상만으로도 우리의 일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협조자 중 일부는 새로운 징병관으로 뽑아 써도 좋으며 이는 현장의 판단에 일임한다.
#12
협조자를 중심으로 징집 대상자들의 분위기를 통제하라. 협조자는 포승을 빨리 풀어주고 비협조적인 징집 대상자를 통제할 권한 일부를 위임한다. 대체로 협조자는 구체적인 폭력행위를 설명해주지 않아도 금방 자신의 방법을 터득한다. 이러한 분리는 징병관의 위엄을 높인다.
#13
협조자에게만 정보를 풀어라. 협조자는 우리의 아젠다를 빠르게 체화한다. 협조자의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집행의 성공 가능성도 높아진다. 무법섬에 도착했을 때도 부족원 인계 행사 등에 협조자를 별도의 좌석으로 배석시키는 등 차별화한다. 반감이 그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14
무법섬에서 부족장을 만날 때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한다. 최대한 예의있게 대한다. 무법섬에서 우리와 협조하는 부족들은 중무장했고 긴 전쟁을 치른 베테랑들이다. 비용 문제 등에서 갈등이 있을 경우엔 반드시 데스크로 보고하고 데스크의 지시에 따르도록 한다.
#15
징병대장은 징병관 인사관리에 있어서,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은 없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 관심 징병관은 곰팡이와 같아서 한 번 생기면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깨끗하게 지워내기가 쉽지 않다. 합법적인 행동도, 각 구성원의 심약한 마음에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명심한다.
#16
징병대장이 한 가지 더 명심한다. 징병 집행은 결국 집단 공동의 일이다. 집단의 기강이 흔들리면, 갓 온 조난자들의 저항에도 질 수 있다. 휘하의 징병관들과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건 좋지만, 현장의 위기상황엔 인간성보단 지휘권이 우선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둬라.
#17
듀랑고엔 그 잘난 총 몇 자루 구하기 어렵다. 아직 어느 부족도 화약에 필요한 재료 모두를 확보하는 방법을 찾아내진 못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은 일이 신체의 능력 한끗 차이로 결정될 것이다. 후회하면 늦다. 신체를 늘 단련하라. 틈나면 운동하고 몸을 만들어라.
#18
소문에 따르면 모 단체의 누군가는, 고객에게 빚을 지우고 빚을 갚지 못 하면 무법섬에 팔아치운다고 한다. 이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한심한 작태이다. 사사로운 개개인이 금전을 이유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건 법이 없는 곳에서도 불법이라 할 수 있다.
#19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징병 절차는 완전한 합법이다. 우린 이 야생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상세한 법률에 근거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은 이런 일을 해낼 수 없다. 우리로 인해 듀랑고는 야생에서 벗어나 문명화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모든 징병대장과 징병관은 자부심을 가져라.
#20
아직까지 그런 인간은 보지 못 했지만, 우리의 행동이 불의라며 우리를 벌하려는 자가 있다면 말이다. 정말 그런 인간이 있다면 본보기로 삼아라. 누구도 우리의 집행을 방해할 수 없게 본때를 보여줘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걸로 말이다.

27. 탈주 기록

#1
다른 징병대장들은 VIP를 잘 모른다. 나 역시도 들어본지 오래 되어서 잘 기억나진 않는다. VIP와 관련된 사항은 문서화를 잘 하지 않았다. 그만큼 다들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동료는 다 죽게 생겼고 밖엔 알로사우루스가 돌아다닌다.
#2
내가 VIP를 인지하게 된 것은 3년 정도 전이다. 다른 선임 징병대장들이 나를 불러냈고, VIP의 개념을 설명했다. 전부터 그 친구들한테 VIP란 단어를 몇 번 들었는데, 그때는 VIP의 뜻이 큰손인 어느 부족장이라고 생각했다. 징집 대상자를 많이 필요로 하는 큰손 말이다.
#3
VIP는 그런 게 아니었다. VIP는 문서화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징병대장들도 알고 있는 정보가 분산되어 있었다. 각자의 진술이 엇갈리는 경우도 많았다. VIP는 자신에 관해 모순되는 정보를 여러 루트로 진술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고도로 훈련된 의도라 본다.
#4
한동안은 VIP가 가공의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VIP와 직접 무전을 할 일은 없었으니까. VIP의 의향을 전달하는 인물이 몇 있었고, 그들의 지시사항은 음어와 암호로 가득했다. 선임들이 징병관들에게 가짜 징병 영장에 관한 장광설을 늘어놓듯이, 그런 연극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5
그러나 그런 이론은 오래 가지 못 했다. VIP의 지시사항은 여러 사람이 조합해서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VIP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
#6
나는 그 과정이 어느 역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반란이라고 여겼다. 실력을 키운 선임들이 지휘를 내리는 VIP에게 저항했고, 저항의 결과 우리는 운명을 선택할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VIP가 일방적으로 우리를 버린 것이었다.
#7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생각이 분명해졌다. 징병관 그룹은 여럿이 있다. 우리 소속이 아니고, 장차 위험이 되겠다 싶으면 다른 그룹은 가차없이 죽였다. 내가 죽인 자들이 남긴 문서를 봤다. 문서화하지 말란 지시를 어기고, 문서화했단 내용이었다. 내용은 해괴해 이해하기 어려웠다.
#8
그들에겐 커피하우스란 인물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문서에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커피하우스가 특정한 시기부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시기가 적혀 있진 않았지만, 무언가 해당 인물에게서 VIP와 공통점을 느꼈다. 막연한 육감이 실마리를 찾아갔다.
#9
자신이 업무로 종사하고 있는 분야는 우주의 탄생부터 존재했을 것 같다. 그러나 모든 분야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지시를 받고 시작한다. 우리가 징병이라고 부르는 이 일도 분명히 시작점이 존재한다. 그 시작점은 누구인가? 듀랑고의 역사는 짧다.
#10
증언을 취사 선택했다. 버릴 게 많았다. 사람들의 판단력을 희석하려고 이상한 정보를 풀었더라. 이 일의 역사를 추적했다. 이제는 은퇴해서 다른 섬에 살고 있던 징병대장을 만났다. 이 일이 처음 시작됐을 때를 명확하게 기억하진 못 했지만 누군가의 지원이 있었다고 했다.
#11
이 이후로 별다른 증거를 찾아내지 못 해서 한동안은 이 생각에서 멀어졌다. 징병 업무 처리하는 걸로 바빴다. 어쩌다가 부족에서 일하는 정보관들을 만났다. 정보관이란 멋진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무전을 훔쳐 듣거나 섬마다 소문 수집하러 다니는 시정잡배들이었다.
#12
부족 정보관의 말은 걸러 들어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자신이 아는 정보를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잦았다. 물수리라고 안 좋은 소문이 도는 정보관이 있었다. 징병관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얘기를 하는 걸로 유명했다. 처음엔 그게 멍청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13
물수리는 그랬다. 징병관은 하청이고, 무법섬에 인력을 쏟아붓기 위해 임시로 썼던 도구에 불과하다. 방침이 바뀌고 윗쪽에선 관심을 잃었고, 만약에 설친다 싶으면 한 번 싹 정리될 것이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다 입에 납을 물고 쓰러질 거다. 이랬다.
#14
물수리는 알코올 중독자에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그 말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설원섬에서 물수리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누군가가 우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부서진 초소와 쓰러진 징병관에게 사적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익도 보이지 않았다.
#15
내 생각을 다른 징병대장들에게 말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징병 그룹일 가능성을 높게 쳤다. 다른 그룹과 충돌하는 일은 몇 번 겪어봤다. 이 싸움은 뭔가 의도가 달랐다. 상대는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인원이다. 우리처럼 비무장한 조난자를 상대하는 쪽이 아니었다.
#16
내 문제는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 했다는 거다. 초소 몇 개가 더 박살나도, 우리는 다른 징병 그룹의 무전을 확인하려고 애썼다. 설사 다른 징병 그룹의 공격이더라도 이 정도로 얻어 터졌으면 협상은 하지 말아야 했다. 시간은 한정적인데 다들 판단을 잘못했다.
#17
징병대장들과 탈출 우선순위를 정했다. 설원섬은 살인자가 돌아다니는 침몰선이었다. 배에서 탈출할 땐 정해진 우선순위가 있다. 그 조건에 따라 나는 먼저 탈출했다. 워프홀로 도망치면 적의 협력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최대한 조용히 도망쳤다.
#18
조용히 도망치는 건 행동의 제약을 높인다. 그래서 근처 섬에 간신히 도착했을 때 잘못된 행동 결과를 되돌릴 수가 없었다. 이 섬엔 알로사우루스가 살았다. 면적이 넓지도 않고 자원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운송로에서 절대 고려하지 않아야 할 그런 지역이었다.
#19
누군가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병을 숨긴 것도 문제였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인원 대다수가 열병에 걸려서 몸져누웠다. 사냥꾼들의 욕이 떠올랐다. 물어죽을! 물어죽을! 밖에는 알로사우루스가 있고, 숨은 곳엔 병균이 가득하다. 이 탈주 기록을 쓸 쪽지도 거의 남지 않았다.
#20
우리 모두는 여기에서 죽을 것이다. 과거의 전조 몇 가지를 무시한 게 가장 큰 이유다. 저지른 짓엔 반드시 대가가 돌아온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과거의 잘못 몇 가지를 바로잡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내게 더 글을 쓸 수 있는 공간만큼이나 보이질 않는다. 다 끝났다.

28. 중간상의 회고 메모

#1
경고) 내가 남긴 좌표 지시에 따라 이 메모를 발견했다면, 괜찮다. 하지만 혹시라도 우연히 이 문서를 발견했다면 신변을 위해서라도 잘 보관해두고, 위원회가 몰락할 때까지는 이 메모를 공개하지 마라. 위원회를 어떻게 생각하건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이다. 정보는 제 때 활용해야 가치가 있다.
#2
이 메모를 추적해서 찾아냈다면 위원회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 거라 가정한다. 이 메모는 그런 독자를 상정하고 작성되었다. 본 메모의 작성자로서, 내 신원을 밝힐 수는 없으나, 내 일은 전형적인 중간상이었다. 의약품, 무기, 통신장비를 부족장들에게 전달하는 일 말이다.
#3
중간상은 점조직이고, 이를 깨고 다른 중간상과 통하면 위원회에서 죽였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가 않다. 내 실력이 대단해진 게 아니라, 감시망이 헐거워진 것이다. 위원회는 지금껏, 컬트 집단으로써 자신들을 잘 숨겼고, 여러 부족장들을 매수하거나 협박하는 일을 잘 했다. 과거형으로 말이다.
#4
위원회는 여러 물자를 구해왔고, 중간상은 일부는 자신의 이익으로 떼고, 부족장들에게 공급했다. 그 대가로 부족장들에게 위원회의 요구사항을 설명했다. 위원회는 우선, 각 부족장들이 조난자들의 커뮤니티를 통합하고, 더 큰 규모의 정치적 결사체를 형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위원회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고, 각기 다른 이름을 썼지만 요구사항이 동일해 출처가 같단 걸 알 수 있었다.
#5
꺼림칙한 의심이야 늘 있었다. 어떻게 이 많은 현대 물자를 어느 균열이나 크레이터에서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위원회가 살인이란 채찍과 중간상의 이익 확보란 당근을 잘 휘두를 때는 중간상들은 모두 잘 받아들였다. 이익을 위해서 의문이나 양심은 얼마든 팔 수 있는 게 중간상들의 특성이니 말이다.
#6
몇 달 전부터, 위원회가 공급하는 물자의 품질이 떨어지고 수량이 줄어 들었다. 우리가 느꼈다면 부족장들도 각자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이를 공유했을 것이었다. 부족장들은 다른 파이프라인을 물색하고 떠들어댔다. 몇몇이 본보기로 살해되었지만, 대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학습 효과가 생겼다. 위원회의 장악력이 정점을 지났단 것이다.
#7
일반적인 개척자라면 내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알아둬라. 기퍼와 준타의 싸움은 유명했다. 어제 듀랑고로 워프를 겪어 온 조난자라도 오늘 아침엔 기퍼와 준타의 싸움이 얼마나 컸는지 들었을 것이다. 준타는 엄혹한 법 집행으로 이름이 났고, 기퍼는 온정적인 부류의 표를 얻는 그다지 온정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8
그 둘의 싸움에 동원된 폭발물과 총기의 숫자는 지금 듀랑고의 모든 부족들이 소유한 것을 다 합해도 미치지 못 할 것이다. 그때는 소모전이었기에 가능했다. 위원회는 견제하고자 하는 적이 있었다. 적도 물자가 많았지만, 위원회 내부에선 소모전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봤던 것 같다. 적은 풍족했지만 더 성장할 수 없었으니까. 더는 해가 떠오르지 않으니까.
#9
당시의 분위기는 냉전스러웠다. 적은 직접적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진 않았고, 위원회처럼 여러 부족장을 지원해 자신들을 대리하게 했다. 냉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기퍼와 준타는 그런 일환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이 메모를 읽으려고 여기까지 왔다면,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라.
#10
위원회는 뭔가 그 시절엔 확실한 공급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소모전이 가능했다. 그 이후로 물자가 풀려나오지 않았다. 적은 그때 엄청 큰 손실을 겪고 움츠러들었다. 그들이 사라지면서, 위원회는 힘을 독점했다. 쌍둥이를 절대 허용하지 못 하는 게 늘상 그렇다. 숲에서 하는 일이 그렇다. 숲, 내가 한때 젊음을 바쳤던 곳이지. 해님을 간절히 기다리던 숲!
#11
사담을 좀 적겠다. 나는 운이 좋았다. 물에 떨어졌을 때, 시간대가 달랐다. 화상이 상반신을 태워,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걱정도 사라졌다. 위원회의 중간상이 되었다. 자신이 독점적 지위에 있다고 여기면, 주의력도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그 덕도 봤다. 아마도 숲에선 날 사망으로 분류해놨겠지.
#12
이제 위원회는 신통치 않다. 물론, 위원회를 견제할 만한 세력이 있는 건 아니니, 내가 이 메모를 작성할 때 몰락할 때까진 공개를 아껴두라고 했다. 신통치 않아도, 과거에 비해 신통치 않단 얘기니까. 하지만, 약점이 한 번 노출되면, 그 사이에 뭐가 끼어들어 더 커질지 모르는 일이다. 중간상들 역시 이에 대비한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
#13
위원회가 물자 공급을 줄이고 그 질이 떨어진 건, 위원회 내부에 어떤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있단 뜻이다. 물자를 얻어 오는 파이프라인에 문제가 생겼다고 볼 수 있겠다. 야심이 크고 머리가 나쁜 부족장들이라면 자신이 위원회 대신에 그 파이프라인을 확보하는 걸 생각할 수도 있다. 최초 시도자들은 위원회에 죽겠지만, 위원회는 서서히 흔들릴 것이다.
#14
숲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숲은 상대가 자신을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조직 내에 만연했는데, 예측할 수 없음이 생각보다 효율이 좋지 않단 걸 이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그 동안 계획을 뒤엎고, 그 큰 비용을 쓰면서도 결국 성배 하나 못 찾았단 것으로 조바심이 머리 끝까지 솟았을 것이다.
#15
다른 가능성도 있다. 물자 공급의 감소가 파이프라인 문제가 아니라 자원 배분의 우선 순위가 변경에 의할 가능성이다. 조바심이 난 숲이 그런 시그널을 계속 보냈다면, 무리한 판단에 근거를 부여하고 실천했을 가능성이 있다. 성배를 찾지 못 한다면, 성배를 만들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란 말이 회의 시간에 튀어나왔을지도 모르지.
#16
그렇다. 솔직히 나도 이 메모를 작성하면서 자신은 없다. 숲을 떠난지 오래라 거기 정보는 낡았다. 듀랑고에서 얻은 새로운 신분으로 오래 살았고, 중간상 일에 여념이 없었다. 이 메모를 읽는 이가 내 뜻을 이해하고 말고도 중요하지 않은듯 하다. 나는 불안하다. 성배를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말이다.
#17
위원회의 핵심 인물이 누구인지는 중간상으로선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끝자락에 있는 옷자락만을 만질 뿐이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며, 지위를 잃거나, 혹은 부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어쩌면 숲의 시그널 없이도 자발적으로 밑에서 다른 계획을 꾸몄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원회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빠질 수도 있다.
#18
워프 이상이 워프 에너지의 통상적인 변화라는 말이 듀랑고의 아마추어 과학자들 사이에 나온다. 나 역시 그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는다. 그러나 워프 이상이, 인위적인 변화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인위적인 변화의 주체가 있다면 말이다. 이 듀랑고에서 위원회가 아닌 다른 곳이 그랬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한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19
숲은 리스크가 큰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엔 하늘이 돕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은, 무작위로 주어진 행운에 의미 부여를 한 것이었다. 언젠가는 들통이 날 일이다. 단지 시간차가 있을 뿐이고, 어떤 책임자는 책임을 지기 전에 죽어 빚을 전혀 갚지 않을 것이다. 빚은 이곳의 개척자들이 진다.
#20
먹고 살기 위해 중간상 일을 했다. 이 체계가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이젠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느낌이 좋지 않다. 위원회가 무너질 만큼 긴 시간은 아닐 것이다. 무너져서 이 메모가 정보로 활용된다면 기쁜 일이겠지만, 높은 확률로 무너지는 건 듀랑고가 될 것이다. 근거는 불확실하나, 직감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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