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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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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조선시대의 의관 양예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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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예수(楊禮壽, ?~1597/1600)

조선 중기의 의학자로, 허준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의관으로 명종, 선조 두 대에 걸쳐 어의를 지냈다.

2. 생애

본관은 하음(河陰)(현재의 강화군 하점면)으로, 어릴적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양예수의 예수의 조부가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이고, 부친이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및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했기 때문에 양반 출신인 유의였을 것으로 보인다.

명종 18년(1563년)에 세자가 편찮으니 내의 양예수(楊禮壽)가 모시고 진찰하고 약을 쓰면서 다른 의원은 알지 못하게 하다 증상이 위독해져 알려졌다고 기재되어 있어, 상당히 야심이 있었던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사관이 '공을 독차지 하려고 한 짓'이라며 대놓고 비판할 정도.

명종 19년에 종5품 내의원 판관이 되었고, 이어 명종 20년에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어 상당한 출세가도를 달렸다.

선조 14년에는 부친과 동일한 종2품 가선대부, 선조 20년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가자되었다.

선조 28년에 세자의 병세가 차도가 없자 해주에 당시 출장을 가있던 양예수를 즉시 부르는게 어떠냐고 도제조가 청하자, 선조가 바쁜 의관을 불러서는 안된다고 이를 반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소설 동의보감의 영향과 미디어 매체의 영향으로 시대가 겹치는 허준과 경쟁 관계인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와 관련된 기록은 달리 없다. 양예수가 이미 당상관으로 자리를 잡은 뒤이고, 허준 또한 출세 가도를 달린 것으로 볼 때 오히려 후계자로 낙점하고 협력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편.

말년에는 허준, 정작 등 내의원들과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만 명종 18년의 양예수의 야심있어 보이는 행적을 작가가 일부 참고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이할 점으로 동생인 양지수라는 사람도 의관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자 스스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3. 대중매체

드라마 허준에서도 어의로 등장한다.
유의태와의 악연으로 인해 정치 당략정인 면모를 어느정도 보이면서도, 허준의 성실한 모습에 일정 시점 이후에서부터는 허준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