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養賢庫고려 때 국학의 장학재단.
2. 상세
1119년(예종 14) 관학 진흥책의 하나로 처음 설치되었다.[1]이곳에는 판관(判官)이 있어 양현고에 속한 토지에서 세를 거두어 운반, 이를 관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2] 고려 말에 국학이 쇠퇴하고 양현고의 재원도 고갈되자 안향(安珦)의 건의로 섬학전(贍學錢)을[3] 만들어 양현고에 귀속시키기도 했다.
관학 진흥책은 과거 전문 반인 7재, 서적을 출판하는 서적포, 섬학전 지급 등이 있다.
조선에서도 이를 모방한 제도를 만들었다. 양현고(조선) 참조.
[1] 예종은 당시 사학 12도 같은 사학의 융성으로 위축된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교육개혁을 단행,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사(學舍)를 설립하여 유학생(儒學生) 60명과 무학생(武學生) 17명을 입학시키고, 이들의 교육과 국학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 국자감 안에 양현고를 설치했다.[2] 처음에는 2명의 판관(判官)을 두었으나, 1243년(고종 30)에는 4명을 더 두어 2명은 양현고에 딸린 전지(田地)로 파견하여 수세(收稅)와 양곡의 운반을 맡게 하였고, 2명은 양현고에 남아 있으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관리하도록 하였다.[3] 1304년 고려 충렬왕때 만들어진 성균관의 장학재단으로, 유학의 진흥을 위해 문무관리 6품 이상은 은(銀) 1근씩,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