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엄인섭 嚴仁燮 | |
출생 | 1875년 |
함경북도 경흥군 | |
사망 | 불명[2] |
본관 | 영월 엄씨 |
국적 | 한국 |
소속 | 동의단지회 권업회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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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와 일제강점기의 밀정을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2. 인맥
홍범도와 친분이 있었으며, 안중근 의사와 결의 형제를 맺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독립운동가들한테 신뢰를 받았다.3. 생애
1875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으며,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침략할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훈장을 받았다. 1907년 겨울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던 안중근·김기식과 결의형제를 맺고 일제와 싸울 의병을 모집하였다.1908년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을 총독으로, 이범윤을 대장으로 추대한 후에 좌군영장이 되어 우군영장 안중근과 함께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수비대를 공격하고 이어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그러나 회령전투에서 5천여 명의 일본군과 격전 끝에 패배하고 피신하였다. 1909년 3월 노브키에프스크 가리에서 안중근·김기룡·황병길 등 11명의 동지와 함께 왼손 약지를 자르는 동의단지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연해주로 건너갔으며,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권업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2년 훈춘에서 한국과 중국의 항일운동가 33명이 조직한 둔전영의 창립총회에 블라디보스토크 대표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3.1. 밀정으로 변절하다
사실 엄인섭은 그 이전부터 이미 일제의 밀정으로 변절한 상태였다. 일본총영사관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엄인섭은 동의회의 국내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인 1908년 11월경에 본 영사관에 출두하여 정탐으로 고용해 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그 후 엄인섭은 장장 14년 동안 일본정탐으로 활약하게 된다.가령 1911년에는 반일 언론 <대양보>의 간행을 막기 위해 93kg에 달하는 한글 활자 1만 5천개를 훔쳐서 <대양보>의 발간이 중단되도록 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일본 밀정으로 발각된 서영선이란 자를 한밤중에 몰래 탈출시키도 했다. 또한 1912년에는 연해주 한인들이 연추 지역에서 둔전영을 설립하려는 은밀한 논의도 일본총영사관에 밀고했다. 그 외에도 권업회의 사업 등을 일본총영사관에 낱낱히 보고했으며 이 때문에 1910년대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작성된 많은 기밀문서들의 정보는 엄인섭이 제공한 것이 많다.
심지어 엄인섭은 1911년 5월경에는 당시 국내외 한인무장투쟁의 상징이자 지도자인 홍범도 체포계획도 건의했다. 연해주 치타 지역에 거주하는 김모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홍범도에게 군자금 모집에 관한 위조편지를 보내면 홍범도는 부하 2, 3명과 함께 치타에 있는 김모를 만나러 갈 것이고 중간에 하얼빈을 경유할 것인데 하얼빈에서 홍범도를 체포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사살하자는 계획이었다. 천만다행히도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아 홍범도는 무사했다.
물론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엄인섭이 밀정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는 한인들 사이에서 저명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엄인섭이 일본정탐으로 의심을 받게 된 시기는 1920년 2월경이니 그동안 엄인섭이 민족해방운동에 끼친 해악은 엄청났다.
엄인섭의 일본정탐으로 의심받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간도 15만원 사건이었다. 더불어 이 사건은 엄인섭의 밀정활동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3.1.1. 간도 15만원 사건
1920년 1월 북간도의 철혈광복단 6명이 일제가 운송 중이던 일본화폐 15만원을 탈취했다.[3] 그들은 이 돈으로 항일투쟁에 쓸 무기를 구입할 예정이었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일본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돈을 고스란히 빼앗겼으며, 최계립만 탈출하고 다른 대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3.1.1.1. 이 사건에서의 밀정은 정말 엄인섭이었는가?
현재 많은 대중매체에서 이 간도 15만원 사건을 다룰 때 주도자들을 일본총영사관에 밀고한 밀정은 엄인섭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사건과 관련된 밀정이 정말 엄인섭이었는지는 현재까지도 불분명하다. 보통 일본 기밀문서에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밀정의 신분을 기록하곤 했는데 정작 이 사건과 관련된 기밀문서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을 그냥 우리 밀정(我 密偵)이라고만 지칭하고 있다. 당시 국내외에는 엄인섭 말고도 일제가 파견한 수많은 밀정들이 산재하고 있었으므로 이 우리 밀정이 꼭 엄인섭만을 가르킨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다만 당시 엄인섭의 경우 다른 밀정들과 비교해서 유독 돋보이는 정탐 활동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유력한 정보들도 많이 제공하여 수많은 밀정들 사이에서 단연 거두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우리 밀정이 엄인섭을 지칭하는 단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론은 간도 15만원 사건의 배후를 밀고한 밀정의 정체는 엄인섭이 유력하긴 하지만 그걸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다소 빈약하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일제정탐으로 지목된 또다른 사람은 당시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장 대리였던 김하석이다. 김하석은 바로 이 간도 15만원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다. 간도 15만원 사건이 발생한 후 30여년 후인 1950년 후반에 이인섭과 최계립은 당시 김하석이 일제정탐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간도 15만원 사건 직후에 작성된 일본 첩보자료나 장도정 등 한인민족운동가들이 남긴 기록에는 김하석을 일본 정탐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1920년 2월 2일자 일본 정보문서에는 김하석이 수배대상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간도 15만원 사건 직후인 1920년 2월 13일, 블라디보스톡시 경찰서장인 하리토프가 연해주 신한촌을 방문했을 때 장도정, 김진, 김영학, 전일 등 7명의 한인지도자들은 20명의 일본정탐 명단을 심사하고 작성하여 하리토프에게 건네주었는데 당시 이 명단을 심사한 전형위원에는 김하석도 포함되어 있다. 즉, 당시 김하석은 한인들 사이에서 밀정으로 지목받기는 커녕 의심조차 받지 않았다. 게다가 이인섭에 따르면 후에 김하석을 밀정이라고 단정한 최계립조차도 1952년까지는 김하석이 밀정이라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1952년까지는 최계립도 김하석을 밀정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엄인섭은 일제 밀정이라는 사실이 한인사회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후의 소식은 확실히 전하지 않는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할 때 함께 함경북도 경흥으로 갔지만 일본어가 서툴러 밀정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다시 훈춘으로 갔으나 일제의 밀정이라 하여 한인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전한다. 1936년 신세를 한탄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