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前 축구 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Ernst Ocwirk | |
출생 | 1926년 3월 7일 오스트리아 빈 | |
사망 | 1980년 1월 23일 (향년 53세) 오스트리아 클라인푀흐라른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 |
신체조건 | 183cm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 플로리츠도르프 AC (1942~1947) FK 아우스트리아 빈 (1947~1956) UC 삼프도리아 (1956~1961) FK 아우스트리아 빈 (1961~1963) |
감독 | UC 삼프도리아 (1962~1965) FK 아우스트리아 빈 (1965~1970) 1.FC 쾰른 (1970~1971) FC 아드미라 바커 뫼들링 (1971~1973) | |
국가대표 | 62경기 6골 (오스트리아 / 1947~1958) |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전 축구인.2. 경력
2.1. 클럽
빈에서 태어난 오크비르크는 1938년 지역팀인 FC 슈타들라우에 입단했고 1942년 플로리스도르퍼로 이적했다. 슈타들라우에서 뛰던 때 그는 전설적인 미드필더 요제프 스미스티크[1]의 눈에 띄어 포지션을 공격수에서 미드필더로 변경했다. 스미스티크는 오크비르크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를 자신의 친정팀인 SK 라피트 빈으로 데려오려고 했으나 지역 라이벌인 FK 아우스트리아 빈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경쟁했고 결국 오크비르크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적했다.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오크비르크는 거의 10년을 활약했는데 오크비르크는 팀의 핵심 선수였고 3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끄는 활약을 펼쳤다. 1956년 30세의 나이로 오크비르크는 해외로 이적한다. 그 행선지는 이탈리아의 UC 삼프도리아였는데 오크비르크는 엥겔베르트 쾨닝[2]의 뒤를 이은 세리에 A에서 뛰는 2번째 오스트리아 선수가 되었다.[3]
오크비르크는 삼프도리아에서 5년간 활약했으며 마지막 시즌에는 주장직을 맡기도 했다. 1961년 오크비르크는 이탈리아 생활을 청산하고 친정팀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왔고 1961-62 시즌에는 더블을, 1962-63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하며 깔끔하게 현역에서 물러났다.
2.2. 국가대표
1948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기 이전인 1947년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한 것이 메이저 대회 이력인데, 여기서 오크비르크는 주장으로 에른스트 하펠, 게르하르트 하나피, 칼 콜러 등의 동료들과 함께 3위 수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로잔의 열전[4]이라 불리는 개최국 스위스와의 8강전 경기에서는 팀의 4번째 득점을 기록해 0-3 스코어를 4-3으로 뒤집기도 했다.FIFA 세계 올스타팀에 참가한 경력이 2번 있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친정팀인 삼프도리아의 감독직을 역임했으며 쾰른에서 1년간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80년 1월 오크비르크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기일이 1월 23일인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오스트리아의 또다른 전설적인 선수인 마티아스 신델라의 기일이기도 하다. 신델라의 경우 1939년 사망.4. 플레이 스타일
1950년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 오스트리아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로 평가받으며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5]를 꼽을 때 이름을 심심치 않게 올리는 인물이다. 공격과 수비 모두에 능했으며 롱패스에 대단한 강점을 보였다. 조율 능력과 테크닉 역시 뛰어났다. 오늘날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의 선구자로 불린다.[1] 분더팀(한창 잘나가던 30년대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별명)의 주장이었던 선수이다.[2] 40년대 라치오와 제노아 등지에서 활약햤던 공격수[3] 여담으로 오크비르크 이후 3번째 오스트리아 선수는 1980년 인터 밀란으로 이적한 헤르베르트 프로하스카이다. 오크비르크는 이 해 1월 사망했다. 즉, 본인 이후 오스트리아 선수가 이탈리아 무대로 이적하는 것을 죽을때까지 보지 못한것.[4] 경기 결과 오스트리아 7-5 스위스의 월드컵 단일경기 최다 득점 경기이다. 열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경기 당일날 온도가 40도에 육박했기 때문이다.[5] 센터 하프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